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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리서치-①~④] 퓨마갤이 꼽은 상사로서의 감독은?
안녕하세요 퓨갤리서치입니다! 오래오래 기다리셨습니다. 2주 전에 진행된 조사인데 제때 결과를 내오지 못해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변명을 하자면 제가 졸업을 앞두고 공모전을 준비중이라... 불쌍한 학식노을 너그러히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T.T이번 [퓨마갤이 꼽은 상사로서의 감독/단장] 리서치는 지난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사흘간 진행됐으며, 퓨갤러 총 104분이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럼 먼저 가장 직장상사로 두고싶은 감독님부터 살펴볼까요?와우! 가장 많은 퓨갤러들이 직장 상사로 두고 싶은 감독은 KIA 이범호 감독님이네요! 퓨마갤러 10명 중 4명은 이범호 감독님과 일하고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형님같은 리더십에 푸근한 인품, 능력까지 두루 갖춘 감독님이죠 ㅎㅎ. 뒤로는 슈동님과 원기신이 각각 2위 3위를 마크하며 퓨갤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군요.원래는 여기서부터 사유를 하나하나 짚어봐야하는데 제가 정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ㅎㅎ 한번에 살펴보는거로 해요. 그렇다면, 퓨갤러들이 가장 직장상사로 두고싶지 않은 감독님은 누굴까요?퓨갤러들이 가장 직장상사로 두고싶지 않은 감독님으로는 염경엽 감독님이 꼽혔어요 T.T 못된 찍찍노들 29년만에 우승시켜줬더만 은혜도 모르고 음해하는 게 정말 괘씸하군요! 뒤로는 베이징의 영웅 한화 김경문 감독님과 개씨부랄꼰대졸장 돌태형이 2,3위를 각각 마크하며 퓨마갤러들의 원성을 사고있군요.그럼 차례차례 사유를 살펴보도록 해요먼저 범호콘입니다. 압도적인 인기(40표,38.5%)와 낮은 기피율(3표, 2.9%)을 자랑하는 만큼 사유 역시 긍정적인 말들이 많네요! 특히 "형처럼 친근하지만 든든한 리더가 되어주실것 같다", "부하에게 편하고 열정적이실거같다" 등 리더십에 관한 칭찬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외모에 관한 의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독님보단 미남이라서", "못생겨서 옆에 있으면 잘생겨보일듯" 부터 "못생겨서 혼내도 웃길 듯" 등 다양한 선호 의견도 있었습니다.반면, 기피 의견 3번도 모두 외모에 관한 의견이였습니다. 세 건 모두 문자 그대로 '못생겨서' 싫다고 합니다.다음은 만두콘입니다. 득표수 자체가 적은만큼 의견 수도 적습니다. 수비 많이 늘 듯은 너가 야구선수냐ㅡㅡ경리신은 건강과 집요함에 관한 평가가 주를 이뤘네요. 악질 찍찍노들의 발음 음해 세례가 있었습니다. 너네 그러다 전부 돌려받는다ㅡㅡ슈동님: 빠와 까를 모두 미치게 하는 이 시대의 슈퍼스타!강철콘: 이런 류의 감독은 명과 암이 확실하죠. 저도 강철콘같은 상사 아래서 일해보고 싶네요. 상당한 미노년?이셔서 멋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x추는 빨고싶지 않아요.뿌동님: 한 건의 긍정평가마저 개인적인 악감정인 부분은 뿌동님의 여론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부분이네요...돌태형: 마찬가지로 명과 암이 확실합니다. 개졸장년. 그래도 저는 개인적으로 튼동님 아래에서도 있어보고 싶습니다. 조직관리 측면에서 배워가는 거 많을 듯.경문콘: KFC 할배같아요. 어르신 음해하지 마라ㅡㅡ 이거 절반은 접대노랑 혜화노일듯.인권콘: 성적 조금 못냈다고 아주 개자식을 만들어놨구나ㅡㅡ원기신: ㅇㅅㅇㄱㅅ정리에 들어가지 못한 의견들은 다음 글에 올려두겠습니다.이렇듯 의견을 쭉 알아봤습니다. 날것의 텍스트는 다음 글에 정리해서 올려두겠습니다.그런데, 아무래도 스타성이 넘치는 감독님들에게 표가 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감독님 즉, 스타성 넘치는 감독님은 누구일까요?아무래도 선호표를 40표씩이나 얻은 범호콘을 쉬이 이기기는 어렵군요! 퓨마갤 아이돌 슈동님도 당당히 2위를 차지했습니다. 순수 기피표 득표로 3위를 차지한 경리신, 선호표만으로 15표를 채운 원기신도 눈에 띄네요! 쇳물노분들은 뿌동님좀 그만 미워하세요...단장도 빨리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오랜만에 긴 글 쓰려니까 뇌이징오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니저리서치-②] 퓨마갤이 꼽은 상사로서의 감독은?(의견종합) 단장은 더 기가막힌- [매니저리서치-③] 퓨마갤이 꼽은 상사로서의 단장은?이어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단장입니다! 퓨갤러들이 좋아하는 인물들이 우글우글! 누굴 선택할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데요, 퓨마갤의 선택은 과연! 백중세! 퓨마갤러들이 가장 상사로 두고싶은 단장님은 28표를 받은 임선남 단장님이에요! S대 출신의 스마트함에 귀여운 외모까지! 상사가 아니라 남자친구로라도 삼고싶네요 으흐흐 뒤로는 LG의 자부심 차명석 단장님과 갓데를 망친 개씨부랄병신새끼가 2위와 3위를 차지했습니다. 성민규 찍은 애들 진짜 성민규같은 상사 만나라. 응원하는 팀마다 성민규같은 단장 부임해라 그렇다면, 퓨갤들이 가장 상사로 두고싶지 않은 단장님은 누구일까요? 바로바로... 안봐도 뻔하죠. ㅂㅅ. 그 새끼가 1위를 차지했네요! 2위는 장석신, 3위는 태룡신이 마크하고 있습니다. 못된 수전노와 혜화노의 배은망덕함이 느껴지네요! 특이사항이라 하면 기피 표를 받지 않은 후보가 셋씩이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강력한 인물들이 있어서 그쪽으로 표가 모인 듯 하네요. 그럼 역시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재학신은 조용히, 확실하게 하시는 단장님인 듯 합니다. 염런트가 갖춰둔 시스템을 잘 운영해나가는 느낌입니다. 부럽다. 카소녀의 아버지 주낙신입니다. 진짜 다 해줬는데 카지노분들 삼성 임원이 조스로 보입니까? 퓨마갤러의 정신적 아버지, The 미디어프랜들리, 명석신입니다. 저도 명석신같은 상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실수해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또 유쾌하시면서도 강단있는. 부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광대가 되시고, 조직을 위해서라면 한 몸 불사르는 훌륭하신 분일 듯. 찍찍노들아 마음을 좀 곱게 써라ㅡㅡ 태룡신입니다. 낭만과 능력을 전부 갖추고 있지만 왠지 악덕느낌이 있습니다. 비리 많은 정치인 느낌이랄까. 나도현 단장님과 김재현 단장님은 스타성을 좀 더 길러오시길 바랍니다. 김재현 단장은 용진신한테 원포인트 레슨 받으세요. 매스컴에다 김강민을 빼꼈다 드립치면 쇳물노들 좋아 죽을 듯. 어휴. 그래도 명석신이랑은 다른 의미로 재밌긴 할 듯. ETR 그 자체. 근데 이제 조직이 좆됨. 저새끼 말 듣고 실무 집행했다가는 나도 실업자됨. 꾸러기혁 등장! 미친염전노들 ㅋㅋㅋ 아래 절규하는 꼬꼬노들이 불쌍하지도 않냐ㅡㅡ 진짜 사람이 이렇게까지 귀여울 수가 있나. 귀여운 외모에 기계같은 내면을 가진 남자. 접대의 터미네이터, 스카이넷. 행복한 직장생활을 원한다면 명석신에게, 커리어를 원한다면 선남신에게. 근데 이분 은근 불호가 있네요? 장사하자 먹고살자 오늘도 방실방실~ ㅇㅅㅈㅅㅅ. 벤처기업이 좋다면 장석신 아래로 들어가는 것도 방법일 듯. 근데 이제 수틀리면 나까지 순장됨. 같이 지내면 재밌긴 할 것 같음. 저 좋은 머리에서 ㅈㅅㅂ ETR 다 갖춘 기상천외한 발상들이 나오고(때로는 범법적인 발상도) 그거 시행도 해보고. 은근 남자 중학생같네요. 매일매일이 오프로드 차 타고 비포장도로 질주하는 그런 기분이려나. 말만 들어도 설레요. 암튼, 단장 스타성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퓨마갤이 지목한 스타성 넘치는 단장으로는... 제발 죽어. 득표비율이 거의반반인데, 빠와 까를 모두 미치게하는 돌아버린 스타성;; 나도 이새끼때문에 돌겠음. 다음으로는 선호표를 가장 많이 받은 임선남, 개민규보다 기피표가 부족해 3등을 차지한 차명석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4위부터 6위까지의 기피표 비율이 인상적이네요. 나도현단장은 스타성좀 만드시길. 암튼 여기까지 매니저 리서치를 살펴봤습니다. 4편으로 의견들 올리고 줄이겠습니당. 잡떡리서치도 빨리 할게 ㅠ - [매니저리서치-④] 퓨마갤이 꼽은 상사로서의 단장은?원색적인 비난들이 다수 있습니다. 걸러보시길..
작성자 : 퓨갤리서치고정닉
윌리엄 슈타이니츠 : 세계 체스 챔피언의 탄생
[시리즈] 체스 옛날 이야기 · 15세기의 체스 대격변 패치, "여왕의 체스" · 인디언 오프닝과 어느 시골 브라만의 이야기 · 미국체스협회 레이팅 2위를 달성한 살인범의 이야기 · 1000년 전의 이슬람 체스 퍼즐, 만수바(مَنصوبة) · 에반스 갬빗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 ㅋㅋㅋㅋ 이건 진짜 체스 성유물이네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上 - 영웅편 -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下 - 악귀편 - · 대수기보법과 오스만제국 출신 체스마스터 이야기 · 체스 유럽 전파 초기의 무서운 이야기 ※ '하워드 스턴튼 편'을 먼저 읽고 이 글을 읽는 것을 강력히 권장함메시와 호날두.페이커와 쵸비.테니스의 빅3."세계 최강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어쩌면 시대와 종목을 불문하고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일 것이다.팬들은 오늘도 인터넷에서 자신의 시간과, 명예와, 부모를 걸고, 끊임없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19세기의 체스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체스 세계 최강은 누구인가?"체스 세계 챔피언이라는 공식 타이틀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체스 플레이어들은 계속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왔고,그들의 입에서는 그간 이러한 이름들이 오르내려왔다.18세기 체스 세계를 주름잡았던 프랑스의 필리도어, 파리 최강 생아망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영국의 하워드 스턴튼, 1851 국제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한 독일의 아돌프 안데르센,그리고 결정적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미국의 폴 모피.폴 모피는 유럽을 방문해 안데르센을 비롯한 유명 체스선수들을 모두 압살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모피의 갑작스러운 은퇴로 '현역 최강'의 자리는 다시 한동안 안데르센에게 돌아가는 듯했지만, 그 다음 "세계 최강"의 자리는, 과연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인가?체스계는 신세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오늘은, 아돌프 안데르센의 뒤를 이어 19세기 후반 "세계 최강"의 자리를 차지하고, 포지셔널 체스라는 새로운 체스의 대원칙을 정립하였으며, 최초의 공식적인 '세계 체스 챔피언'의 타이틀을 만들어낸,William Steinitz(1836-1900)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슈타이니츠는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 프라하의 게토에서 유복하지 못한 유대인 가정의 아이로 태어났다.그는 이마가 툭 튀어나온 통통한 땅딸보에 절름발이로, 평생을 지팡이를 짚고 살았는데, 눈만큼은 언제나 이글이글 불타는 모습이었다고 한다.어릴 적부터 수학과 체스에 제법 두각을 보였던 슈타이니츠는 성년이 되어 제국의 수도 빈(Wien)으로 유학을 떠나 빈 공과대학에 입학하지만,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체스만 존나게 두다가, 1년만에 성적 불량으로 퇴학을 당하게 된다.당시 빈은 중부유럽 체스의 메카.학생이란 신분을 잃고 무직백수가 된 그였지만, 체스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며, 빈 체스 클럽에서 체스 실력을 키워나간다.그는 당시 매우 공격적인 플레이로 '오스트리아의 모피'라는 별명을 얻었으며,빈 체스클럽 챔피언십에서 59년 3위, 60년 2위, 61년 1위를 차지하며, 중부유럽 체스 최강자 중 한 명으로 자리 잡게 된다.물론, 여전히 가난한 채로.때는 1862년.1851년 수정궁 세계박람회의 대성공에 힘입어, 영국은 다시 한번 세계박람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물론 영국 체스계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수정궁 세계 박람회와 함께 개최됐던 최초의 1851 국제 체스 토너먼트와 마찬가지로, 영국 체스계는 국제대회의 개최를 위해, 세계 각지의 내로라하는 체스 선수들을 초청한다.슈타이니츠는, 빈 체스 클럽의 대표로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결과는, 14명의 참가자 중 6위. 그리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우승자는 11년전과 동일하게, 독일의 아돌프 안데르센.모피가 사라진 체스 세계의 최강은, 여전히 그였다.슈타이니츠는 1862년의 대회가 끝난 뒤에도 런던에 남기를 택했다.당대 런던은 전세계 체스의 중심지였고, 탄탄한 체스 플레이어층과 독보적인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도시였다.전문 체스 선수로 밥 벌어먹고자 하는 사람이었다면 런던은 사실상 세계에서 유일한 선택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런던에서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런던에서, 슈타이니츠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이방인이자 유대인, 그리고 전문 체스선수였다.그리고 체스계는 여전히 아마추어리즘이 지배하고 있었다.하워드 스턴튼은 셰익스피어 학자.헨리 버드는 회계사.아돌프 안데르센은 수학 교사.존 오웬은 성직자. 그리고 슈타이니츠는 체스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는 반백수.중산층들 사이에서 체스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점차 체스를 생업으로 삼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 당대인들의 눈에는 체스는 어디까지나 '취미', 체스를 직업으로 택한다는 것은 썩 바람직한 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체스 대신 변호사의 길을 택한 폴 모피도 이런 말을 남겼던 것처럼."체스를 둘 줄 아는 것은 신사의 소양이지만, 체스를 잘 두는 것은 인생을 낭비했다는 신호다."그리고 사실, 유대인이고, 전문 체스 선수고, 이런 것들보다도 더 근본적으로,슈타이니츠는 성격이 존나게 셌다. 도무지 논쟁을 피하지 않는 성격이라 살면서 무수한 적을 만들었다.그리고 그 무수한 적 중에는, 똑같이 성격이 존나게 셌던 당대 런던 체스계의 지배자, 하워드 스턴튼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워드 스턴튼과 그의 친구들은 슈타이니츠를 끊임없이 공격했고, 슈타이니츠는 평생을 런던 체스계의 주변인으로 살아가야만 했다.그러나 체스 선수만큼 능력주의적인 직업이 또 있을까.체스는 순수한 개인전. 자기만 잘하면, 결국에는 실력을 증명해낼 기회가 온다.그리고, 슈타이니츠는 증명해냈다.(좌, 슈타이니츠. 우, 안데르센)1866년, 아돌프 안데르센을 상대로 한 매치에서 8승 6패 0무로 승리.같은 해, Henry Bird를 상대로 한 매치에서 7승 5패 5무로 승리.1867년, 파리 세계박람회와 함께 열린 국제 토너먼트에서 3위.1870년, 바덴바덴 국제토너먼트 우승.그는 이제 명실상부 세계 최강자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고,심지어 1870-1871년 보불전쟁의 여파로, 프랑스와 독일과의 교류전까지도 잠시 어려워짐에 따라 런던에서는 슈타이니츠를 막을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게 되었다.그리고 그럴수록 스턴튼 일파의 속은 타들어갔다.'누가 저 새끼 좀 막아봐'라는 간절한 열망으로, 1872년, 세인트 조지 클럽은 해외로 눈을 돌려, 체스 유망주를 영국으로 초청해온다. 그가 바로 독일제국 출신의 유대인 체스선수, 요하네스 주커토르트(Johannes Zukertort)였다. 그는 아돌프 안데르센의 근무지인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대학을 다녔고, 덕분에 안데르센으로부터 체스를 배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안데르센의 제자였던 그가 안데르센을 뛰어넘었다는 소식에, 세인트 조지 클럽은 잽싸게 그를 슈타이니츠의 대항마로 낙점, 그와 슈타이니츠와의 매치를 주선한다.그러나 결과는 의외로 허망하게 끝났다.7승 1패 4무, 슈타이니츠의 압승. 그의 지위는 더더욱 공고해졌다.1870년대, 이미 최강의 자리에 오른 슈타이니츠는 이전의 낭만주의 스타일을 버리고, 점차 새로운 기풍의 체스를 두기 시작한다.앞선 위대한 플레이어들(특히 모피)의 기보를 깊이 연구한 끝에, 그는 당대의 낭만주의 체스가 공격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방어가 빈약해서 성공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그는 체스에서 통용될 수 있는 일련의 원칙들을 발견해냈고,폰 중앙 확보, 폰 구조 약점, 비숍쌍 이점 활용, 나이트 아웃포스트, IQP 등에 대한 선구적인 분석을 수행했다.그리고 그 원칙들을 바탕으로 포지션 상의 사소한 이점을 축적하여, 준비를 마친 뒤에야 결정적 이득을 취하는, 소위 '포지셔널 체스'를 정립해낸 것이다.그가 도입한 이러한 원칙들이 모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슈타이니츠는 그것들을 분석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플레이스타일로 정립했으며, 자신의 글을 통해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슈타이니츠는 현대 체스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충분히 받을 만했다.물론, 당대 낭만주의 메타로 체스를 두던 이들에게는 이것이 그냥 씹게이체스로 보였고,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그는 다시 한 번, 경기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체스를 증명해낸다.1873년, 빈 국제박람회와 함께 열린 1873 국제 체스 토너먼트.오스트리아 황제의 후원을 받았던 이 대회에서, 슈타이니츠는 자신의 새로운 플레이 원칙과 함께 다시 한 번 당당히 1위를 거머쥔다.당시 2위는 영국인 중 최강의 선수로 불렸던 조셉 헨리 블랙번이었다. 그리고 3년 뒤, 1876년.대회 1위·2위를 차지했던 슈타이니츠 - 블랙번 간의 매치가 성사되는데, 충격적인 7승 0무 0패의 결과가 나오고 만다. 갈드컵은 드디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제 과연 그 누가, 슈타이니츠가 "세계 최강"이라는 사실을 감히 부정할 수 있었을까?아직 남아있었다. 단 한 명이.요하네스 주커토르트가.세인트 조지 클럽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주커토르트는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1877 라이프치히 토너먼트 3위.1878 파리 체스 토너먼트 1위.1881 베를린 체스 토너먼트 2위.슈타이니츠가 저술에 집중하느라 토너먼트에 출전하지 않았던 1870년대 후반, 주커토르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고, 이목을 끌어모았다.1882년 빈 토너먼트에서는 슈타이니츠와 주커토르트 모두가 출전했고, 슈타이니츠는 1위, 주커토르트는 4위를 차지했지만, 점수차는 1.5점차.더블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진행된 해당 대회에서, 둘의 상대전적은 한 번은 무승부, 그리고 한 번은 주커토르트의 승리였다.그리고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1년 뒤의 1883년의 런던 국제 토너먼트였다. (당시 1883년 대회에 대한 체스 잡지 일러스트. 좌측 상단에 주커토르트 vs 슈타이니츠.)더블 라운드 로빈 + 무승부시 재경기로 진행된 당시 대회에서,주커토르트는 22승 4패 7무라는 괴물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2위였던 슈타이니츠는 19승 7패 7무.더욱 엄청났던 것은, 대회의 마지막 3경기가 진행되기 전만 해도 주커토르트는 22승 1패였다는 것이다.그 유일한 1패는 슈타이니츠가 안겨준 것. (해당 대회에서 상대전적은 1승 1패)장기화된 대회 일정으로 신체적 컨디션이 완전히 무너진 주커토르트는 마지막에 약한 상대들에게 연달아 3패를 했는데, 그러고도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런던 체스계는 간만에 신이 나서 슈타이니츠를 신나게 물어뜯기 시작한다."슈타이니츠는 정말로 세계최강인가?" "주커토르트야말로 세계최강이 아닌가?"동시기에, 슈타이니츠와 주커토르트 사이에서는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슈타이니츠는 The Field라는 잡지에서 체스 칼럼 작가로, 주커토르트는 The Chess Monthly라는 잡지에서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슈타이니츠가 자신의 칼럼에서 주커토르트의 플레이를 자신의 포지셔널 플레이에 의거해 신랄하게 비판했고, 이에 The Chess Monthly가 맞대응 하면서,인신공격까지 난무하는, 훗날 '잉크 전쟁'이라고 불리는 분쟁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세계 최강은 누구인가? 잉크 전쟁의 승자는 누구인가?그 모든 결론을 내기 위해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슈타이니츠가 주커토르트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합의문에는 이러한 문구가 명시되어 있었다."a match at Chess for the Championship of the World."1886년, 최초의 공식적인 세계 체스 챔피언십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체스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챔피언십 매치는 미국에서 개최되었다.1883년 말, 런던에서의 끝없는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슈타이니츠가 결국에 미국 이민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미국 시민권 받으면서 빌헬름Wilhelm 슈타이니츠에서 윌리엄William 슈타이니츠로 공식 개명.)슈타이니츠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영국에서 사는 것보다 미국에서 죽는 것이 낫다. 영국에서 이기는 것보다 미국에서 패배하는 것이 낫다.""그러나 잘 생각해보니, 난 아직 죽을 생각도 없고, 패배할 생각도 없다."첫 5경기는 뉴욕.그 다음 4경기는 세인트루이스.마지막 11경기는, 모피의 고향인 뉴올리언스, 모피가 초대 회장으로 있었던 뉴올리언스 체스 클럽에서 열렸다.예상대로, 주커토르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슈타이니츠는 가장 첫 경기에서 승리를 차지했지만 연이은 네 경기에서 연달아 패배했다. 1승 4패.10승을 먼저 따내는 쪽이 승리하는 규정에서, 이는 당연히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그러나 뉴욕에서 부진했던 슈타이니츠는 세인트루이스에서부터 흐름을 역전시켰고, 흐름을 잃은 주커토르트는 급속도로 무너져내렸다.슈타이니츠의 승리, 공식적인 체스 세계 챔피언이 처음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종종 이 최초의 세계 챔피언십은 낭만주의 VS 고전주의라는 등식으로 멋들어지게 표현되곤 하는데, 사실 경기를 까고 보면 주커토르트는 그의 스승 안데르센 같은 순수한 낭만주의자로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주커토르트는 뛰어난 체스선수였다. 주커토르트는 이미 슈타이니츠의 포지셔널 체스의 개념을 상당 부분 흡수하고, 또 활용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아직 슈타이니츠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을 뿐.그리고, 두 선수 간의 가장 결정적 차이는 정신적인 지구력에 있었다.당대의 체스 잡지, British Chess Magazine에는 이런 독자 코멘트가 달리기도 했다."You’ll see if Zukertort loses the first two or three games right off he will collapse altogether, but if Steinitz loses nine games off the reel he will play the tenth with just the same pertinacity with which he played the first. Steinitz never plays better than when fighting the uphill battle. Zukertort only shows his best when fortune smiles.""만약 초반 두세 판에서 주커토르트가 진다면, 그는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슈타이니츠는 연속으로 아홉 판을 잃더라도 열 번째 판에서 첫 번째 판과 똑같은 끈기로 싸울 것입니다. 슈타이니츠는 힘든 싸움을 할 때 가장 잘 플레이합니다. 반면 주커토르트는 운이 좋을 때만 자신의 최고 실력을 보여줍니다."슈타이니츠는 당대에도 널리 알려진 미친 정신력의 소유자로, 그는 토너먼트보다는 1:1 매치에서, 그리고 장기전에서 훨씬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부류의 선수였다.반면, 주커토르트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고, 평소 심장병을 앓고 있어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여 생활하기도 했다.그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음에도 후반에는 완전히 무너져내렸던 1883년 대회에서도 그랬듯이, 그는 결코 장기전에 적합하지 않았다.의사는 주커토르트에게 체스를 그만두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고까지 경고를 했지만,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I know that, but play or no play, I must be, and am, prepared to be taken away at any time without a moment’s warning."그의 말대로 주커토르트는 2년 뒤, 1888년 체스를 두던 중 뇌졸중으로 45세 젊은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좌 라스커, 우 슈타이니츠)슈타이니츠는 이후 미하일 치고린, Isidor Gunsberg, 엠마누엘 라스커를 상대로 챔피언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내며 8년간 타이틀을 유지했으나, 라스커의 두 번째 챔피언십 도전에서 패배하여 챔피언 타이틀을 상실하였다.그러나 그의 유산은 계속해서 남았다. 다음 세대의 최강자들인 지크베르크 타라쉬와 엠마누엘 라스커는 슈타이니츠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이들은 그의 체스 이론을 정교화하고 더욱 발전시켜 보급해나갔다.종종 슈타이니츠가 챔피언 중에서 임팩트가 없는 편이라는 망언(?)이 종종 들리고는 하는데,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이는 슈타이니츠가 체스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아, 우리가 더 이상 슈타이니츠 이전의 체스를 더 이상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그는 한 명의 뛰어난 체스 플레이어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론으로 체스의 메타 자체를 뒤엎어버린 이론가였다.슈타이니츠가 가져다 준 충격을 정말로 느끼고자 한다면, 슈타이니츠의 게임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의 게임을 보는 것은 어떨까.그 게임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과연 누가 그것을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또 하나의 그의 유산.1886년, 슈타이니츠와 주커토르트의 매치로 시작된 체스 세계 챔피언십은 올해로 138주년을 맞이한다.2024년의 세계 최강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체스 팬들은 다시 한번 그 답을 기다리고 있다.
작성자 : 김첨G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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