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농구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농구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미국에서 너무 맛있다고 판매 금지당했던 전설의 술 대한민국인디언
- 극한직업 역무원 ㄷㄷ..jpg 감돌
- 스압) 한국 최저일급으로 구매력 체험한 중국인 ㅇㅇ
- 아내의 위생 관념 수준.jpg 감돌
- 하와이에서, 하정우랑 와인만 200병 마셨다는 성동일.jpg ㅇㅇ
- 감동감동 6.25참전 UN군들 사진 개킹카
- 실시간) 아들이 군기 문란으로 입영취소 당했습니다 ㅇㅇ
- (공포, 소름)롯데월드... 오싹오싹 명탐정 코난 콜라보 시마시마
- 훌쩍훌쩍 인류역사상 최악의 시대 ㅇㅇ
- 뉴진스럽다 고닉 ㅈㄴ 불쌍하네 ㅋㅋ 직정령
- 한선월 사망...기사 입갤 ㄹㅇ...jpg Adidas
- 싱글벙글 김정은의 호화로운 인생....JPG ㅇㅇ
- 담배꽁초 휙, 20분 뒤 불길 활활 슈붕이
- 20년전 미국농구 기술을 처음 본 한국 반응 농갤러
- [단독]3억 실은 차량 눈앞에서 놓친 경찰, 강남 한복판 환전사기.jpg ㅇㅇ
한국전에서 귀환한 미군 참전용사들의 후일담
William Dewey Freeman(1928년 10월 3일 – 2022년 5월 27일)전쟁이 끝나고 알게 된 것인데, 내가 속했던 중대 인원 중 1951년 횡성 학살에서 생존한 사람은 나 포함 고작 7명이었다.내가 생존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수도 없이 내 자신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죽고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신의 도움 외에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당시 조지아의 내 고향사람들은 교회에서 나를 위해 무척 기도했다고 한다.난 신이 그 기도들에 응답했다고 생각한다.귀국해서 한 어르신이 그랬다. "자네는 날 모르지만 난 자네를 잘 알아. 자네가 한국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일요일 아침과 저녁, 화요일 밤에 모두 모여 자네를 위해 기도 했었거든."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freeman_william_d/index.htmDale Alfred Erickson(1931년 1월 7일 – 2022년 11월 26일)캠프 펜들톤에 도착하자 질병검사 후에 재입대를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고 난 전쟁에서 충분히 군대를 경험했다고 생각했다.더 이상 폭력과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임시중대에서 기차표를 줬다. 1951년 12월 13일 미 해병대에서 제대 했고, 그때 난 스무 살이었다.기차역에는 아무도 없었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축하도 없었다. 내 형제를 비롯해서 친구들은 전쟁 이야기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마치 지난해에 여름캠프를 갔다온 기분이었다. 난 내 기억의 짐을 내려놓고 싶었으나 아무도 관심 없었다.더 큰 문제가 생겼다. 일주일 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신경이 예민했고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한밤중에 갑자기 심장 마비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고 한국에서 전투하는 꿈을 꾼다.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1952년 난 미네소타-듀러스 대학에 등록해서 1년을 다녔다. 대학에 다닐 때 군 경력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 안했다.다른 학생들과 섞이기 힘들었다.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밝지 못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erickson_dale/index.htmDavid Morris Williams(1932년 11월 17일 생)귀국명령을 받을 즈음 난 소대 전령을 하고 있었고 아마도 철의 삼각주 근처였을 것으로 기억한다. 전선의 마지막 밤은 정말로 신경이 예민했다.내가 처음 왔을 때 있었던 병사는 이제 몇 명 되지 않았다.난 전우들에게 행운을 빌며, 1951년 9월 초 한국을 떠났다. 계급은 상병. 샌프랜시스코(Golden Gate Bridge)의 금문교를 봤을 때 난 정말 감회에 젖었다.정말 집이구나 싶었다.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항구에 나와 나를 반겼다.어머니는 나를 보시고는 살짝 놀라셨다. 참전 기간동안 난 키가 5cm 넘게 더 자랐고 체중도 30파운드가 더 늘었다. 떠나기 전보다 조용한 사람이 되었고, 전쟁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누가 물어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다.한국전 경험은 날 정말 고착시켰고, 참전 이전에 비해 난 좀 더 거칠어졌다.한국전을 통해서 자기확신도 생겼지만, 남들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williams_dave/index.htmEldon L. "Ike" Stanley(1930년 9월 6일 – 2017년 9월 6일)한국이 날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는 아니다.PTSD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오곤 했다. 꽤 오래 갔다.난 텍사스 언저리로 가서 살기 시작했다. 나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곳이다.한국을 잊기 위해 일부러 그런 곳에 자리 잡았고, 근처 모든 나무를 잘라 불태워버렸다. 민간인으로 돌아오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난 이미 훈련된 킬러였다.한 직장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고 한 군데서 3-40년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인생에서 최고로 오래 일한 곳은 9년이다. 운송회사에서도 일했고 아서 머래이 스타일 (현대무용)의 스튜디오에서 무용교사도 1년 반 동안 했다. 거기서 여자를 하나 만났는데 당시 가톨릭 사회에서는 개신교와 결혼하는걸 멀리했었다.1953년 경에 반지와 모든 걸 준비해 청혼했으나 그녀는 반지를 돌려주며 거절했다. 이후 그 일을 그만 두고 6개월간 은둔했다.그 어떤 직업도 정착이 안 됐다. 오클라호마 시티의 댄스 스튜디오로 갔다. 거기서 로리타 로빈슨을 만나 결혼했고 장인을 위해 4년간 일했다.그 다음 정유회사에서 5년 동안 일했고, 이후 트럭회사에서 4년간 일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stanley_ike/index.htmHarold John Sydnam Jr.(1927년 7월 28일 – 2017년 3월 30일)민간인이 되었을 때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한 동안 배에 수류탄과 대검을 놓지 않으니 잠이 안 왔다.내 왼쪽 귀는 청력을 상실했었고, 1년이 지나고서야 부분적으로 돌아왔다.난 대학으로 돌아가 탄광 엔지니어링을 더 배우려고 했다.그러다 알래스카의 좋은 일자리를 얻었다. 패시픽 노던 항공 알래스카 지사였다.나의 해병대 총 근무기간은 4년 10개월 3일이었다. 알래스카에서 아내를 만나 1953년 결혼했다.1959년 항공사에서 퇴사하고 알래스카에서 주립경찰이 되었다. 주방위군으로도 참여해서 1979년에 중령 계급으로 알래스카 주방위군 부 작전관이 되었다.1983년에 은퇴해 캐나다에 정착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sydnam_harold/index.htmCarl Edward Bowers(1932년 10월 13일~2008년 10월 2일)1951년 5월 일본에서 미국으로 도착한 한국전 참전병 3,759명, 테네시 출신 75명 중 내가 있었다. 시애틀에 도착했는데 세 번째 한국전 참전병 combat rotation의 시기로 분주했다.난 1952년 3월 29일 육군에서 명예롭게 제대했다. 마지막으로 있던 곳은 노스캐롤라이나 포트 브래그 육군병원이었다.제대하고 90일 후 난 다시 공군에 재입대했다. 로리다 탬파의 맥딜 공군기지로 전입을 가서 외과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KC-130과 KC-135 통신병도 했다.그때 아니타 에슬린을 만나 53년 7월에 결혼했다. 공군에서 2년을 근무하고 복부의 부상 부위가 좋지 않아 더 이상 근무할 수가 없었다.난 현재 한국전 전상 100% 장애인 판정인 상태다.아들 셋을 낳았고 둘째인 마이클은 이라크에 세 번이나 참전했다. 아내는 2002년 1월 1일 세상을 떠났다.올해 2007년에 난 심장마비 두 번을 겪었고, 9월에 다시 폐 수술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다.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겪었던 것들은 내가 잊고 싶었고 그것이 떠오르면 어떨 때 정말 나를 괴롭힌다.그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한국전쟁이 어떤 것인지 말하고 싶었다.전장을 정말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투가 어떤 것인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bowers_carl/index.htmRichard Cornelius Bohart(1928년 9월 4일 생)항구에 안기가 잔뜩 낀 아침에 도착했는데 아무런 행사도 없었고 크게 "WELCOME HOME!"이란 플랭카드가 보였다.배에서 내리니 커피와 도넛이 제공되었다. 미국 땅을 다시 밟는 기분은 정말 감격스러웠다.너무 감정이 차올라 목이 막힌다. 그 감흥은 3일간이나 계속 되었다.전화로 가족들에게 난 아무 문제없다고 알렸다.나는 샌디에고 신병 보충대에서 대기하다 1951년 12월 7일 정식으로 제대했다. 제대하기 전 한국에서 얻은 부상을 치료하고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교관을 했다.캔자스 대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남은 학업을 끝내고 1954년 1월 졸업했다.재입대는 꿈꾸지 않았다. 난 전쟁과 죽음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한국전을 잘못 알고 있었다. 전쟁은 길어졌지만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들의 일상에 전쟁은 없었다.제대 후 해병대 경험은 나를 보다 모범적인 시민으로 만들었다. 약간의 문제는 있었으나 사회생활에는 문제가 없었다.그러나 밤마다 악몽이 찾아와 한국은 결코 날 떠나지 않았다. 전투가 어제의 일처럼 막 불타오른다. 술 정말 많이 마셨다.이후 화학회사에 들어가 중남미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거기서 화학회사의 거대한 시설 총괄 매니어 일까지 했고 4년 전에 은퇴했다.재혼한 아내와는 올해 결혼 36주년을 맞았고 두 아들과 딸을 낳았다. 그 이전의 결혼에서는 아이가 없었다.한국전 이후 나 자신은 힘들었다.한국에서의 전투와 죽음을 떠올리는 것도 힘들었고 밤에 찾아오는 악몽도 싫었지만, 낮에도 어떤 냄새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리는 숲을 걷다가 갑자기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돌아오곤 했다.그런 이유로 이번 인터뷰는 어려웠다. 어떤 질문으로 인해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났다. 잠자리에 들면 악몽으로 인해 편두통이 늘어나기도 했다.지금도 과거 전투에 대한 기억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아내는 내가 인터뷰 도중 과거의 기억에 더 민감해졌다는 걸 알았다. 나와 연관된 해병 전우들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정말 내 기억을 되살릴 다양한 질문을 받았고 난 성심성의것 답변했다. 가장 컸던 것은 PTSD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다.http:// 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bohart_richard/index.htm
작성자 : 투하체프고정닉
애니 덕에 인구가 계속 증가하는 일본 도시.jpg
고령화, 저출산이 이어지며 일할 인구가 줄어들고 수도권에 사람이 집중되는 현상을 겪는 중인 일본.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사람이 없어서 일본 도시중 절반은 미래에 사라질 지경이라 지금 있는 사람들이라도 최대한 모아보려 전국 지자체가 각자 자기네 와서 살라고 홍보하는 중임. 한편 농어업등의 1차산업, 중소업체들의 경공업이 주산업인 시즈오카현 누마즈시도 인구감소 현상의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였지만, 최근들어서는 완전 예외중의 예외가 되어버림 10년전만 해도 연간 1000명이상의 주민이 타지로 유출되던 도시가 2015년부터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19년부터는 전입자가 전출자 수를 뛰어넘기 시작. 기록상으로 무려 37년만에 벌어진 유래없는 사태. 심지어 전입자의 8할이 활발히 경제활동을 하는 2~30대 청년층이고, 이주상담 문의도 계속해서 들어오는 상황. 뭐 대기업 공장이라도 유치했나 싶어서 살펴보면 산업구조 자체는 바뀐게 전혀 없음. 최근 몇년간 바뀐게 있다면... 2015년부터 애니메이션 러브라이브 선샤인의 배경지가 되었다는 것 대충 이해했겠지만 이 현상은 작품을 파던 팬들이 아예 누마즈에 살겠다고 오기 시작한 것인데 성지순례로 방문하던 팬들이 아예 집을 옮겨 이주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는 것임. 물론 사는곳을 옮긴다는게 팬심만 가지고 되는게 아니니까 이주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치는 장점도 분명히 존재함 집값, 월세도 대도시에 비해 저렴하고 정말 쌩시골은 아니라 쇼핑, 문화생활등도 어느정돈 즐길 수 있음 대중교통도 잘 갖춰져 있고 자연경관과 먹거리도 풍부. 무엇보다 러브라이브 선샤인으로 가득한 성지이자 고향에 산다는 것...... 팬으로써 더할나위 없어보이는...데... 단점은 대도시에 비하면 역시 인프라가 부족하고, 취업처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 기존의 지역사회에 외부인 입장에서 끼어들게 된다는 점도 이주자에게는 부담으로 작용. 친구도 가족도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먹고살려고 구르는게 보통 멘탈로 되는 일이 아님. 그리고 성지에 산다는 것이 돌아와선 단점이 되어버림. 아무래도 계속 살다보면, 거리에 무감각해지고 관광도 잘 안하게 되는 '일상화'의 문제가 있음. 영덕산다고 매일 대게먹는거 아니고, 울산 포항 사람들이 모두 새해 해돋이를 꼬박꼬박 챙기지는 않듯이, 비슷한 현상이 성지순례와 덕질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 그래도... 최애들이 사랑하는 이 장소에서 지내고 싶다...!는 마음 그런 누마즈 생활을 꿈꾸는 청년들을 위해 나타난 것이 있으니 이미 누마즈에 이주한 팬들이 직접 모여서 이주를 희망한다는 사람들에게 생활의 장단점과 경험담을 공유해주는 것. 주최자도 팬, 참가자도 팬인 지자체와 아무 상관 없는 모임이였지만... 여기에 참석하며 눈독을 들이던 누마즈 시장님에 의해 공식적인 행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시에서 공식적으로 열어본 이주상담회는 자리가 없어서 못 가는 인기 행사가 되었음 그야말로 단점도 감수하면서까지 누마즈에 살고싶다, 이주했다는 팬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상황 럽샤인 시리즈가 9년차를 돌파하며 유입이 감소한 편임에도 이럴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작품에 대한 애정'을 '마을에 대한 애정'으로 변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점 럽샤인 작중에서 그려지는 누마즈는 늘 따뜻한 이웃들이 맞이해주는 고향과 같은 존재고 팬들이 가본 현실의 누마즈 또한 덕후들에게 정답게 대해주는 친근한 곳이기 때문에 누마즈에 방문하게된 팬들이 마을에 호감을 갖고선 살고싶다고 생각하게 만듬. 결국 사람 맘 움직이는게 하는건 좋았던 기억들이란걸 보여주는 사례 덤으로 올해 통계에서는 시즈오카 현에서 시즈오카 시를 누르고 타도시에서의 이주자 수 2위에 등극 1위인 하마마츠시가 공업도시로써 압도적인 유입이 있는걸 고려하면 사실상 1등 수준
작성자 : ㅇㅇ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