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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토) 오투리조트 : 발왕산 대신 함백산, 최고의 선택
어쩌다보니 하루 걸러 스키장 당일치기를 반복중..전날에 이 소식을 전해듣고 무조건 오투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오투는 대한민국에서 6번째로 높은 함백산(1,572M) 동쪽 사면에 있는 스키장이다. 그리고 함백산에 눈 구경 하기 좋은 유명한 곳오투 가는 길에 조금만 산길로 돌아가면 만항재를 거칠 수 있다.역시나 눈꽃이 피어있는데이거 보고 오늘 오투도 엄청 이쁘겠구나 확신함.차로 먼저 코스탐방 해주고오투는 다른 스키장과 다르게 9시 30분 오픈이라시간이 많이 남아서 스키 신고 산책했다..오투가는 길.. 중간에 태백선수촌을 거침(서학로)이 길이 38번 국도 두문동재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 같음야생의 스키장 전기차 충전소;;차 빼려면 고생 좀 하겠다...스키하우스에서 시즌권 인증하고 타워콘도에서 스키를 시작대충 25분 부터는 패트롤들이 내려보내 주는 것 같다.3월에 잘 정설된 자연설이라니..이때까진 회전스키 보관왁싱 맡긴걸 후회했다.10시 곤돌라 운행 시작하자마자 오픈런리조트 정상으로 오니까 적설량 70cm가 체감될정도로 푹푹 빠짐그래도 슬로프는 말끔히 정설해뒀다눈 내리는 주중 내내 묵혔다가 정설하고 처음 오픈했는데3월에 용평 아닌 다른 스키장에서 이런 눈은 처음 밟아봄.정상 표지석 인증하듯이 스키 대신 세워봤다.담시즌엔 뒷꿈치 들리는거 타고싶다 ㅠㅠ헤드-해피도 딱 한번 타주고오투가 의외로 주말 곤돌라는 줄이 있는 편인데,오늘은 대기도 없고 슬로프 역시 사람이 없어서 행복했음.눈이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글로리3 초입함백산 정상 부근 눈꽃은 오늘 영업 종료까지 남아있었음.내일 날씨 좋고 기온도 높던데 10시 곤돌라 아땡을 추천합니다.파우더를 느낄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벽타기(?)오후 넘어가니 날이 좀 풀림.바닥은 조금 질척거리는 정도주말 1인 곤돌라 ㅋㅋ오투 곤돌라는 엄청 편하고 높고 넓어서용평처럼 등을 기대면 목이 굽지 않는다.직원분들도 정말 친절함헤드 슬로프협곡을 따라 내려가는 글로리3정말 보기힘든 날씨 좋을때 눈꽃볕이 강해서 바로 녹기 시작함 ㅠㅠ16시 곤돌라 막차타고 막런글로리3만 14번 탐이제 24/25 스키시즌 마지막 야간타러 간다..해질녘 함백산과 오투 정상오늘 같이 탄 스갤러님 덕분에 재미있었습니다!- dc official App
작성자 : 발왕산관광객고정닉
넷마블 게임박물관 다녀왔어요.
('진구지 사부로 프리즘 오브 아이즈' 中)[멀리서 본 넷마블 본사 건물.]치과 때문이지만 여튼 월요일이 연차인 김에 오늘 후딱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7km가 좀 넘는 거리라 간만에 몸도 움직일 겸 뛰어갔다 왔더니 편도 50분씩 걸렸어요... 체력이 완전히 송장이 됐으니 원, 조깅 자주 해야 될 듯. 살도 10kg정도는 빼버려야겠고. [박물관 입구, 3면 디스플레이 박물관 소개 영상]각설하고 박물관에 도착하면, 입장료(성인 10,000\)을 내고 디스플레이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도 안타까웠던 것이 멀미가 좀 나더군요... 3D멀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가끔 게임 하면서도 3D멀미를 겪는 걸 보면 균형, 방향감각과 시각 사이의 보정율이 나이들수록 점점 떨어지는 모양입니다. 디스플레이 내용 역시 별로 중요하진 않기 때문에, 저는 굳이 끝까지 보진 않고 바로 전시관으로 넘어갔습니다. 다른 관람객들 보니 아이들은 꽤 좋아하는 모양이에요.[전시관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고-전 게임기들.]들어서자마자 슬슬 레트로를 넘어 클래식이 되어가는 게임기들이 반겨줍니다. 개인적으로 사용해본 적은 없고, 게임 다큐멘터리에서나 봤었던 녀석들이네요. 아쉽게도 체험 가능한 공간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고전 기기라 기작이 단순할텐데, 레플리카라도 만들어서 만져보게 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그 후, 꽤 시대를 건너뛰어 바로 나오는 우리 추억 속 물건들. 재믹스 있는 친구 부러웠어요. 아케이드 스틱을 집에서 만지고 놀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확실히 70년대에 게임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긴 한 모양이에요. 바로 8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더군요. 제가 제일 많이 가지고 놀았던 기기는 여기 없네요. 당시 국내에서 자주 돌아다니던 짭패미컴 말이지요. 저 게임기 측면에 패드를 수납하는 시스템이 이상하게 신기해서 수백번을 꼈다 뺐다 반복하다가 헐거워졌던 기억이 납니다. 닌텐도 정품을 가진 친구도 있었지만 슈퍼스코프나 그 옆 빔건같은 주변기기를 가진 놈은 없었어요. 당시 오락실에서 건불릿을 참 좋아했어서 저런 거 가져보는게 꿈이었는데. 정작 돈이 생긴 지금은 별로 살 생각이 안 드는 게, 확실히 사람이 가지고 싶은 건 그 때 사야한단 말이죠. 메가드라이브는 꽤 흔했고, 저 마스터시스템은 묘하게 익숙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작동법을 알 것 같은 기분.[컴퓨터와 모니터 전시]위의 애플 컴퓨터는 77년 모델이라 제 기억에는 없어요. 애플에 대한 기억은 90년대 초-중반? 맥킨토시 컴퓨터 뿐이죠. 학교 전 직원한테 맥킨토시가 보급됐었는데, 윈도우를 쓰는 맥킨토시는 정품이 아니더랬나 뭔 문제가 있어가지고는 소란이 좀 생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확실하진 않아요. 아래는 드림캐스트 TV, 슈패미TV, 코모도어 등이네요. 부끄럽고 안타깝게도, 존재만 알 뿐 써본 적은 없습니다. 저 때 이미 성인이어서 자기 돈으로 사는 거 아니면 저렇게 대놓고 '나 오로지 게임을 위한 부속기기요!' 외치는 물건들을 어느 부모님이 사주시겠냐구...[다들 자주 본 놈들이구만]성검전설 2,3이야 말이 필요없지...만 저는 3만 리메이크로 해봤죠. 다만 당시에는 그런 실시간 액션 게임들이 턴제 게임보다 재밌게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평범한 퀄리티의 3D 캐주얼 액션게임으로 마주하는 감각과 당시에 탑뷰 도트 액션게임으로 마주하는 감각은 분명 다르긴 했을 거에요. 슈마알은 해봤으나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고, 요시아일랜드도 마찬가지. 저는 마리오에는 이상하게 정이 안 가더라구요. 그렇다고 파란 시체를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스토리 오브 도어와 라이트 크루세이더는 못 해본 게임. 와중에 저게 왜 '도어'야? '토르'아니야? 하고 찾아보니 원문은 '토아'랩니다. 어째서 'Thor'표기가 됐는지 꽤 상세하게 적혀있는 걸 보니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은 모양.알라딘보이와 세가 새턴은 원체 유명한 기기들이죠. 하지만 주위에 세가새턴을 가지고 있는 놈들은 거의 본 적 없어요. 세가쟝... 빠칭코산업에선 행복하길.[오오, 부자들만의 게임기, 네오지오. 저희 동네엔 보유자 0명이었습니다. 네오지오는 에뮬레이터 이름 아니었냐구 wwww]패미컴, SNES, 드림캐스트, 네오지오, 피씨엔진... 정도를 제외하면 본 적 없는 놈들. 중간에 전시된 봄버맨 정도만 열심히 했었습니다. 당시에 다양한 뭘 즐긴 분들 부러워요. 와중에 애플-반다이 합작 게임기는 뭡니까. 애플 피핀이라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망했구만www[...여기까지 레트로 게임기. 아무튼 레트로 게임기.][그리고 레트로 게임기 옆에 갑자기 웬 오큘러스 리프트에 갤럭시탭이?]플스1은 아쉽지만 거의 기억에 없네요. 그 때쯤 진짜배기 힙스터 게이머들은 콘솔을 했고, 저같은 겉핥기들은 pc게임을 했습니다. 그래요, 물론 우리의 인생이 pc게임으로 나아갈 것이냐 콘솔 게임으로 나아갈 것이냐는 부모님께서 점지해주시는 것이지만... 최소한 진짜배기 오락기 그 자체의 구매를 놓고 부모님과의 빅딜을 진행할 만한 진성 씹덕 대인배들만이 콘솔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해서 저는 86시리즈에서 펜티엄으로 넘어가던 시절 pc를 하사받았고, 빠르게 블리자드에 영혼을 팔았었죠. 철권은... 오락실에서 철권2를 잡았던 게 아마 첫 경험일 듯. 1은 못 해봤을 거에요. 버추얼보이...는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전혀 본 적이 없고, 게임큐브는 당시 광고가 나왔던 게 기억나네요. 누군가는 가지고 있었겠죠. 2001년이면 이미 디아블로와 질펀하게 농사짓고 있었다구wwww 전혀 제 관심 밖이었습니다. 역시 아무튼 레트로게임기 플스2와 엑스박스. 여기서부터는 사실 안 만져본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우리가 주목해야 될 건 플스2의 대표작으로 디스가이아가 전시되어 있다는 거겠죠? 갓겜이긴 하죠. 그거 아십니까? 저는 시리즈 중 6편을 제일 좋아합니다.다음은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널 박스네요. 저 책자를 진짜 열심히 읽었습니다. 당시엔 저런 게 엄청 재밌었어요. 지금 읽어도 솔직히 재밌슴... 패키지를 구매하면 박스랑 저런 설정집 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뒤는 매직스테이션과 디아블로2네요. 와우는 체감상 한 세대 뒤의 게임이었죠. 01년? 02년?쯤 워크래프트가 나오면서 또 거기에 인생을 갈아버렸는데, 디아블로2-워크래프트3-스타크래프트 브루드워 삼신기에 인생 '중요한 시기'를 다 말아먹을 뻔 하다가 워3 다음 와우가 나와주는 바람에 흥미가 확 식어서 마지막 1년 정도는 그냥 공부만 했었거든요.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제 대학교가 좋아졌던 뭐를 했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와우 같은 게 워크래프트4의 자리를 쳐먹은 것임... 당연히 RTS후속작이 나왔어야지.마지막 오큘러스와 갤탭, 아이패드 같은 건 사용해본 적 없어요. 현장에서 도면 여럿 챙겨다니며 보기가 까다로워서 태블릿 하나를 구매할까 고민했지만, 일단 근 몇년간은 성능도 성에 차지 않고 파손위험이라던가 제공되는 기능 같은 게 확실히 편리할까 싶기도 하고 해서 굳이 구입을 안 했거든요. 이번 현장이 올해 끝나니 다음 현장에선 아마 구입할 듯. 근데 지금 돌아가는 꼬라지 보면 그대로 실직할지도...[소형 게임기들. 라쿠라쿠 미싱은 뭐임... 디지탈 재봉게임이라니. 할머니댁 재봉틀 만지면서 놀다가 손에 바늘 박혔던 기억은 있네요. 드럽게 아펐습니다.]추억의 게임보이와 닌텐도 DS에 대한 이야기는 뭐, 풀어놓자면 책을 한 권 써야겠죠. 특히 게임보이는 제가 없었습니다(...) 그 서러움 안 겪어보면 몰라요. 사촌형 친구가 가지고 있었는데 구경하고 싶다고 들이댔다가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모릅니다. 한이 맺혀서 지금 중고기기로 하나 사버릴까 싶었으나, 이젠 눈이 나빠져서 저 쬐그만 화면을 쳐다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더군요. 다마고치나 타이거 게임기들은 90년 후반~00년쯤 자주 가지고 놀았던 것 같습니다. 그 때 'I'm your little butterfly'라거나 'You are my sunshine', 클론의 '초련'등이 내장된 인형들을 뽑는 놀이가 성행하면서 인형 몇 개를 뽑으면 다마고치나 타이거게임기랑 바꿔주기도 했거든요. 타이거게임기 한 놈 잡으면 그 자리에서 주말 이틀 순삭이었죠. 이틀쯤 플레이하고 나면 질려서 버리고, 다음 타이거게임기를 뽑고... 멍청한 게임이지만 좋은 시절이었습니다.[니 노 쿠니 체험관]여기까지 크지 않은 전시관이 끝나고, 체험관이 시작됩니다. 체험은 핸드폰 똥겜 니 노 쿠니. 니노쿠니 시리즈는 1밖엔 건질 게 없죠. 그래도 1이 인생에서 제일 사랑스러웠던 게임 중 하나였으니, 레벨파이브 상 혹시 시리즈 다음 작품 계획은 없는 데스우...[게임도서 체험관에 진열된 책들. 게이머즈 잡지, 온플레이어 잡지 시리즈와 '게임 중독 처방전' 등이 눈에 띄네요.]다음은 게이밍 도서 체험관입니다. 읽고 싶은 책들을 가져가서 게이밍 독서를 하거나, 옆에서 게이밍 십자말풀이를 하는 등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있었죠. 근데 게이밍 독서를 하기엔 주변에 마련된 게이밍 독서환경이 워낙 별로여서, 솔직히 오랫동안 앉아 뭐를 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공간디자인이 전심전력을 다 해서 빨리 나가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아요. 박물관 내에서 제일 혹평할수밖엔 없는 부분.[키워드별 국산게임 전시장.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나, 토막, 창세기전, 악튜러스 등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게임 다수 진열.]마지막 전시공간은 좀 많이 아쉽습니다. 일단 지금 와서 전시할만한 국산 게임들이 굉장히 적은데다 전시의 규모도 너무 작고, 키워드별로 겹쳐서 언급되는 게임도 너무 많았어요. 솔직히, 전시품목 확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냥 나열한 다음 대충 키워드를 입힌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아마 유리장이 6~8개쯤 있었던 공간으로 기억합니다. 박물관 오픈을 꽤 성급하게 진행한 것일까요?[아케이드 무료체험장. 여기가 마지막 공간입니다. 전경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다른 관람객 분들이 나올까봐 못 찍었어요.]마지막 공간인 아케이드 무료체험장. 우리 아버지들께서 즐기셨을 알카노이드, 퐁 같은 아주 옛날 게임부터 마계촌, 스노우브라더스, 더블드래곤 등 8~90년 오락실세대 게임들까지 전시되어 있지만 그다지 다양하지는 못해요. msx컴퓨터 등을 사용, 아마 12인치인 듯한 CRT모니터로 소닉, 마리오, 스타크래프트 등의 아무튼 레트로 게임들을 즐겨볼 수 있는 공간도 있었네요. 하지만 역시 공간 자체가 워낙 작고, 몇 가지 고전기기들은 사진에 나와있듯 플레이가 불가능한 상태의 단순 전시품이며, '한 판 하고 나면 비키세요'같은 문구가 적혀 있어 진득하게 게임을 즐기거나 할 곳은 아닙니다. 물론 박물관에 줄창 앉아서 게임이나 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이건 좀 너무 겉핥기 아닐까 싶네요. 대부분의 게임을 이미 해 본 입장에선 어차피 집에서 느긋하게 콜라 한 잔 빨아먹으며 플레이하는 게 더 편하고 좋으니까 상관 없다지만, 가족 단위 관람객이(특히 겜씹덕 아버지와 그 아들) 와서 아들에게 무언가를 큐레이팅할 수 있는 공간이 맞을까요? 저는 아닌 것 같아요.[출구와 같이 있는, 박물관 기념품 샵.]기념품 샵은... 빵점입니다. 게임의 역사와 레트로 게임들의 체험 등을 전시한 박물관에서 기념품은 넷마블 게임 굿즈? 어불성설이죠. 누가 이딴 걸 사려고 기념품 가게에 들르겠습니까. 기획자는 경질당해도 할 말 없다고 봐요. 혹은 넷마블 내에 엄청나게 무능한 양반이 있어서 이런 식으로 밀어붙였다던가. '그래도 명색이 넷마블 게임박물관인데 우리 회사 이름 하나 박아야지 않겠냐' 같은 식으로요. 저는 그래도 박물관 하나를 돌면 기념품 한 개 정도는 구매하는 편인데, 책갈피라도 하나 있으면 사올랬더니 없더군요. 총평이에요.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었습니다.'전반적인 전시품목의 수량이 부족하고, 더 많은 수량을 확보할래도 넷마블 본사 빌딩 3층의 일부 공간만 사용하는 초소형 박물관이라 일단 규모부터가 너무 애매해요. 심지어 건물 내에 또 다른 박물관이 있는 모양이던데, 관람료 장사도 아니고 이러면 곤란하죠. 충분한 규모를 확보해야 관람객이 방문할 이유가 생길 겁니다. 다음은 물품의 다양성이 문제였죠. 그냥 큰 레트로샵만 가도 여기보단 잘 되어있을지도 몰라요. 물론 레트로샵에서 테니스 포 투 같은 클래식 게임을 볼 수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기기별로, 혹은 회사별로 어떤 드라마를 넣어서 전시공간을 더 풍부하게 채워야 하지 않을까요?체험공간들도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누가 봐도 관람객이 시간을 오래 보낼 법한 도서체험공간과 아케이드 게임 체험관을 만들어 놓은 주제에, 회전율 높인다고 하는 짓이 '관람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빨리 내보내기'인가요? 이건 아니죠.마지막으로 기념품 샵. 때려치고 레트로 관련물품을 들여오거나, 아니 최소한 넷마블도 고전 유명게임들 많잖아요. 카르마온라인, 트릭스터, 노바1492, 각종 캐주얼게임들 등등, 박물관 컨셉을 향수적으로 잡았으면 그에 맞는 물품을 넣었어야죠. 총 관람시간은 1시간 남짓. 솔직하게 그 이상 붙어있을 이유는 없는 곳이었어요. 방문은... 추천하진 않아요. 그래도 방문한다면 아이들에게 큐레이터 역할을 맡아주는 등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 같은 늙은이가 혼자 갈 이유는 정말로 없고.전반적으로 혹평이라, 기대하신 분께는 죄송합니다. 상기했듯, 저는 월요일 연차에요. 이제 박물관 후기까지 썼으니 겜 하러 가야지.안녕! 즐겜!
작성자 : ㅇㅇ고정닉
Handley Page Bomber: 전략폭격기의 시초
[시리즈] 영국 전략폭격기 개발사 · 영국 전략폭격기의 역사: 꽤나 긴 서론 영국군은 자국의 수도가 미개한 독일놈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폭격당했단 사실에 분개했고, 어떻게든 독일의 수도에 불벼락을 내리기 위해 전쟁 초기부터 독일군의 고타 중폭격기와 같은 전략폭격기의 개발을 헨들리 페이지에 지시했다. 헨들리 페이지, 1909년 6월 17일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불과 21세에 한 전기회사의 수석 설계자로 진급한 영국 항공기 산업의 선구자이자 영국 폭격기의 아버지, 프레드릭 헨들리 페이지에 의해 설립된 이 항공기 제조사는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최초의 비행기 제조사였고, 여성을 공장에 채용한 최초의 회사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2차대전 당시 B-17과 아브로 랭커스터에게 인지도로는 밀렸지만 총 6,176대가 생산되어 82,733번의 작전에 동원, 22만톤의 폭탄을 투하하며 미군의 B-24 리버레이터처럼(생긴것도 닮았다) 영국군에게 든든한 중폭격기로써 활약한 헨들리 페이지 헬리팩스를 만들었고, 냉전기 SLBM이 개발되기 전까지 영국군의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핵투발 전력이었고, 이후 핵투발 능력을 제거당하고 공중급유기로 개조되었지만 포클랜드 전쟁에서 지원기로 활약한 V-폭격기, 헨들리 페이지 빅터를 개발해냈으며영국의 항공산업을 파멸로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1957년 국방백서에 강경하게 저항하여 (항공기 회사들간의 통폐합 조치를 강제했다) 영국 정부로부터 탄압받아 모든 일감이 끊기고 자금마저 바닥나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헨들리 페이지 최후의 비행기, 제트스트림을 완성시킨 후 1970년에 61년의 역사를 끝으로 청산당한 낭만있는 기업이었다. 여튼, 이런 핸들리 페이지가 1915년에 개발한 비행기가 영국군 최초의 중폭격기, 헨들리 페이지다. Type o라고도 불리는 이 거대한 중폭격기는 개발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항공기였다 전장 19.16m, 전폭은 무려 30.48m에 달했는데, F-15가 전장 19.44m임을 감안한다면 딱 가변익 F-15 정도의 사이즈였다. 물론 폭장량은 10배 넘게 차이났지만.... 그래도 1차대전 당시 나온 폭격기치고는 작전반경 또한 1100km으로 엄청나게 길어서 영국 본토에서 이륙해 베를린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고, 폭장량도 무려 2000파운드(910kg)에 달했다. 장착된 2개의 롤스로이스 이글 엔진은 각각 250마력의 충분한 출력을 제공했고, 덕분에 헨들리 페이지는 6톤이라는 무..거운? 무게에도 불구하고 최대 150km/h까지 가속이 가능했다. 심지어 개량형인 헨들리 페이지 O/400이 되면 엔진이 360마력을 내는 롤스로이스 이글 VIII로 교체되어 최대 160km/h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데, 독일군이 운용하던 고타 폭격기의 최종 개량형인 고타 GV의 최대속도가 고작 140km 언저리였으니 헨들리 페이지는 상대적으로 쉽게 적 전투기들의 공격을 회피하고 도주할 수 있었다. 당시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대부분의 동체는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졌고, 엔진의 토크를 상쇄하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휘어지는 4엽 목재 프로펠러를 장착했다. (사진에 따라서 2엽 프로펠러를 장착한 기종도 있다) 엔진부를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장갑판이 유선형의 엔진 나셀(연결부)과 엔진에 설치되었다. 또한, 적기의 공격으로부터 폭격기를 방어하기 위해 7.7mm를 사용하는 루이스 경기관총 포탑들이 동체 앞에 2개, 뒤쪽에 2개, 동체 하부에 1개 위치했고, 기관총 사수를 보호하기 위해 장갑판이 덧대어졌다. 이렇게 독일군이 운용하던 고타 폭격기들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던 헨들리 페이지였지만, 정작 고타 폭격기들이 영국의 영공을 유린하며 수도 런던에 비행선들과 함께 무차별 폭격을 가해 원래 색스코버그'고타' 왕조였던 영국의 왕실을 윈저 왕조로 개명시켜버리는 업적작을 할때 헨들리 페이지는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종전을 맞았다... 1915년에 초도비행이 이뤄졌을 정도로 (고타는 1916년)개발속도 자체는 빨랐지만 2번째 비행에서 설계결함으로 인해 항공기가 89km/h 이상으로 가속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3번째 비행에서는 과도하게 무거운 에일러론과 엘리베이터 때문에 기체의 밸런스 자체가 엉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켄트 주에 위치한 이스트처치 비행장에서 실시된 전속력 시험에서는 110km/h에 도달하자마자 꼬리 부분이 격렬하게 진동함과 동시에 기골 자체가 뒤틀려 동체 구조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보강재를 설치해 봤으나 그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밀폐된 조종석을 개폐식으로 바꾸고 진동을 억제하기 위해 방향타의 크기를 줄인 뒤, 대부분의 장갑판을 제거한 2번째 시제기를 만들었지만 검사결과 130km/h 정도의 고속에서는 여전히 꼬리 진동 문제가 있음이 밝혀졌다. 결국 꼬리 진동 문제는 동체를 전면적으로 재설계하고 기골을 보강한 3번째 프로토타입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해결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한 4번째 프로토타입이 1916년 후반에 Handley Page O/100이란 제식명칭으로 영국 해군항공대 예하의 제 5 폭격비행단에 배치되었다. 고타 G.lV의 배치가 1917년 3월이었으니 배치 자체는 더 빨랐는데...왜 활약이 없지? 물론 진짜 활약이 없던건 아니었다. 1917년 4월 23일에 독일군 구축함 1척을 폭탄으로 공격하여 손상시킨 것을 시작으로 8월 16/17일에는 14대의 O/100이 출격하여 벨기에 서플랑드르에 위치한 토르하우트 기차역에 9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1917년 9월에는 요크셔에 배치된 O/100들이 티스 강 어귀에서 U보트 초계임무를 수행하며 11척의 U보트를 폭탄과 기관총으로 공격했지만 단 1척도 침몰시키지 못했다..... 이후 서부전선 말고 처칠이 갈리폴리로 시원하게 말아먹은 다르다넬스 전역에선 그래도 밦값을 좀 했는데, 오스만 제국군에 대한 야간 폭격을 감행했고 TE.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 그거 맞다)가 지휘하는 반(反)오스만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보급품도 수송했다. 헨들리 페이지 폭격기들이 전진배치된 그리스의 렘노스 섬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서 불과 35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는데, 1917년 7월 10일, 이스탄불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한 헨들리 페이지 편대들은 이스탄불 상공에 도착하자마자 240m 상공에서 51kg 폭탄 8발을 투하하여 정박해 있던 몰트케급 전투순양함 SMS 괴벤을 공격하고 오스만 제국의 S138급 어뢰정 야디가르이 밀렛을 격침시킴과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전쟁청 건물에 폭탄 두 발을 투하한 뒤 기지로 복귀했다. 이후에 터키쪽 전선에서는 딱히 별다른 전투 없이 지중해에서 U보트 초계나 돌다가 전쟁이 끝났다. 애초에 전체적인 활약이 비교적 적었던 이유가 초기형인 O/100형이 고작 40기 남짓 생산되어서 뭐 어디다가 써먹기에는 곤란한 수량이기도 했고... 개량형인 O/400이 500대 넘게 찍혀나와서 서부전선에 본격적으로 배치되기 시작하는 1918년 6월즈음이 되면 영국군은 최대 40기의 헨들리 페이지를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독일군의 참호나 주요 산업시설, 탄약고, 비행장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지만 1918년 11월에 전쟁이 끝나버렸다500대가 넘는 헨들리 페이지들은 대부분이 스크랩되었지만, 극소수의 기체들은 민간용으로 개조되어 여객기로 운항되었다. 총 25기의 헨들리 페이지가 여객기로 개조되었는데, 이중 2기는 VIP 수송용으로 개조된 이후 은색 도장을 두르고 Great Britain 과 Silver Star라는 별명을 얻었다. 25기중 6기의 항공기는 O/7이란 이름으로 중화민국 정부에 판매되었고, 1920년 5월부터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베이징과 톈진을 오가며 항공우편과 승객을 수송했다. 여담으로 이 폭격기 기반 여객기는 가지고 있는 특이한 기록이 있었는데, 1925년에 개봉한 The Lost World라는 무성영화가 1925년 4월 런던에서 파리로 가는 O/10에서 상영되었고, 이는 최초의 기내 영화로 기록되었다. 이후 헨들리 페이지는 O/7, O/10 및 O/11 (헨들리 페이지 O/400의 여객기 파생형)을 기반으로 헨들리 페이지 W.8을 개발했는데, 12명을 태울 수 있는 밀폐된 객실과 오픈된 조종석을 갖춘 이 항공기는 기내 화장실을 설치한 최초의 여객기이기도 했다. 뭐 나중에 공중급유기로 개조되기도 했고 여튼, 이게 중요한게 아니라 헨들리 페이지 폭격기의 후계기를 알아보자면, 헨들리 페이지 O/100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헨들리 페이지 V/1500은 기존에 운용하던 폭격기보다 독일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전략폭격기를 원하는 영국 공군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1917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었다.V/1500은 O/400과 비슷한 크기의 동체를 가졌고 똑같이 목재와 직물 소재로 만들어진데다가 주익 길이도 별로 차이나지 않았지만(8m가 길어졌다) 더 거대한 4엽 프로펠러를 가지고 있었고, 익면적이 2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원판인 O/400보다 2배 더 무거워졌다. 폭장량은 3.4톤으로 전작보다 6배가량 증가했고, 최대상승한도도 1km가량 증가했다. O/100/400이나 V/1500 모두 장착한 총기는 7.7mm를 사용하는 빅커스 경기관총으로 동일했으나, 기관총좌의 갯수 자체는 5개에서 3개로 줄어들었고 그 대신 동체 최후미에 기관총탑을 새로 만들었다. 양쪽 주익에는 O/400에도 사용되었던 롤스로이스 이글 VIII 엔진 2개가 장착되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롤스로이스 엔진 말고도 500마력짜리 갤러웨이 애틀란틱 엔진이나 450마력짜리 레이피어 라이언같은 엔진도 장착이 가능했다. 각각 375마력을 내는 4개의 엔진들은 푸시-풀 방식 (앞/뒤쪽에 각각 프로펠러를 가지고 있는 형식)으로 구동되어서 166km까지 가속이 가능했고 비행시간 또한 전작인 O/400보다 2배 가까이 증가해 14시간 이상 비행이 가능했다.그리고 현대의 함재기들처럼 격납고 내부의 공간확보를 위해 주날개를 접을 수 있었다. 이렇게 전작이었던 헨들리 페이지 O형 폭격기보다 모든 면에서 한체급 더 커지고 진일보해 영국군 내부에서 '슈퍼 헨들리'라고 불렸던 헨들리 페이지 V/1500이었으나...... 개발년도를 자세히 살펴본 군붕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애초에 개발 자체가 전쟁 후반기인 1917년에 시작되어 초도비행은 1918년 5월 22일에 이뤄졌고, V/1500이 영국군에 배치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려서 1918년 10월 말이 되어서야 노퍽에 위치한 제 166폭격비행대가 3대의 V/1500을 수령받았다. 문제는 여기서 영국군의 높으신 분들이 '그냥 전쟁 끝나가는데 폭격하지 말죠?'라고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11월 7일까지 166폭격대 대원들은 임무에 대한 명령을 받지 못한채 그냥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8일, 166폭격대에게 베를린을 폭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았는데,먼저 노퍽에 위치한 버캄 뉴턴(Bircham Newton)기지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베를린을 폭격한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11월 3일에 항복했기에 프라하로 비행하여 연료와 폭탄을 보급받고, 기지로 귀환하는 도중 뒤셀도르프를 폭격할 계획이었다. 문제는 정비 도중에 폭격기의 엔진에 문제가 생겨서 모든 엔진을 교체해야만 했고, 다음 날(10일)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최종적인 출격은 11월 11일에야 이루어졌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10시 59분, 3대의 V/1500이 일제히 활주로를 이륙하려던 찰나, 흥분한 지상 승무원들이 일제히 달려나와 그들을 막아섰다. 1차대전이 끝나버린 것이다. 1차대전이 끝남에 따라 계획된 210대의 V/1500 중 고작 40대만이 완성되긴 했지만, V/1500은 계속해서 운용되었다. 1919년, 이 거대한 폭격기에게 한가지 중요한 임무가 영국 공군사령부로부터 하달되었는데, 이는 바로 강대국들의 무덤,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서 폭격이나 뛰고오란 것이었다. 영국은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어난 그레이트 게임 (Great Game)에서 아프간은 꽤나 중요한 요충지였고 1839년부터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자기 입맛에 맞는 왕을 샤로 즉위시킨 뒤, 이에 반발하여 1878년에 일어난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승리하며 아프간을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렸지만? 탈붕이들...아니 아프간인들은 좆까라고 응수하며 영국에 대한 '지하드'를 선언,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한다.1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타격을 받은 영국군+ 상대적으로 본토에 비해 2선급의 부대가 배치되는 식민지 주둔군의 특성상 아프간군은 초반에 영국군을 가둬놓고 줘패기 시작했으나, 전열을 가다듬고 WWE가 아닌 UFC를 시작한 영국군의 반격과 아프가니스탄군 사이의 내부 분열로 인해 오히려 아프간군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뭐 지금도 통일이 안되는데 1900년대에 아프간에 통일이라는 개념이 있을리 없어서.... 아프간군은 군대라기보단 여러 부족들의 민병대를 규합한 연합부대의 성격에 가까웠기에 분열이 매우 극심했다. 하지만 영국도 이 거지같은 땅에다가 계속 전비를 쏟아붓다가는 60년 뒤의 어느 패권국처럼 나라가 통째로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V/1500을 아슬라마바드에서 약 100km, 아프간의 수도였던 카불에서는 260km가량 떨어진 리샬푸르(Risalpur)에 배치시킨 뒤 빠르게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카불 폭격을 명령했다.1919년 5월 25일, 리살푸르에서 출격한 V/1500은 카불에 도착한 직후 51kg 폭탄 4개와 10kg 폭탄 16개를 왕궁에 투하했다.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자국의 왕궁이 폭격당했다는 사실에 꽤나 크게 동요했고, 무엇보다도 그...왕의 하렘에 속해있는 여자들이 공포에 질려 거리로 달려나가는 바람에 엄청난 소란이 발생했다. 이로부터 며칠 후,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왕이었던 아마눌라 칸은 영국한테 자신은 평화를 사랑한다며 협상을 요청함과 동시에 전쟁은 1달만에 끝났다. 이 전쟁의 결과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아프간은 독립을 쟁취했다.이후 V/1500은 매우 야심차게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을 시도했으나 이는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이후 별다른 활약 없이 군에서 퇴역하여 미국과 캐나다에서 항공우편을 수송하다 스크랩되었다. 뭐 얘도 세계기록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1919년 10월 9일에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가는 최초의 항공 우편물을 수송한 비행기가 바로 헨들리 페이지 V/1500이었다. 분량 문제로 다음편에 계속....
작성자 : 우희힝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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