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시간쯤 잤을까? 고등학교 친구들이 나오는 생생한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깼어.
두통은 더 심해져서 머리가 깨지는 듯이 울리는데..캐나다 처자는 고롱고롱 콧소리를 내며 나름 잘 자더군.
머리는 아프고 잠은 들고 싶으나...잠시 깜빡 졸다가 이내 숨이 차서 깨곤 하더군.

긴긴 시간이 지나 마침내 새벽이 왔어.
캐나다 처자가 주섬주섬 챙겨서 출발을 준비하더군. 밖에 날씨가 아주 좋다나?
두통으로 못 갈 것 같다고 이야기하니 걱정을 해주며 다이아목스약을 주고 물을 많이 많이 마시라고 충고를 해 주더군.

약을 먹으니 어느정도 용기가 생겼어.
포기할 생각이었다가 마음을 바꿔 처자의 뒤를 따라 ABC를 향했지. 물이 떨어지면 흐르는 개울물을 받아 마시며...
뒤에는 마차푸차레가, 앞에는 안나푸르나 사우스가 햇빛을 받아 점점 빛나고 있었지.

가끔 힘든 여행을 하다 문득 아름다운 경치와 마주치면...
이를테면 희운각에서 중청으로 오르는 계단길에서 숨을 고르려 잠시 돌아섰을때 갑자기 설악이 한눈에 들어오면..
위대하고 장엄한 자연 앞에서 나는 얼마나 티끌같은 존재인지를 절감하는 쓸쓸함 비슷한 감정에 빠져본 적이 있으신가?

7000미터의 눈덮힌 고봉들 사이에 서면 당연히 그런 감동앞에서 조금은 겸허해지는 느낌을 경험할 거라 짐작했었어.
그런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정작 ABC에 서니 별 감흥없는 풍경에 지나지 않았어.
주변에 즐겁게 경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사치스런 감정에 몰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까?

남덕유에서 시작된 종주가 끝나가는 막바지 향적봉에서...
힘은 다 빠지고 발바닥에는 불이 나는 마지막 성취의 순간에...
곤돌라에서 내린 수많은 인파를 만나면서 그동안 느껴오던 어떤 감정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그런 경우처럼?

아니면 두통으로 컨디션이 엉망이었거나...내가 너무 쉽게 올라왔거나..그런 이유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어쨌던 산에 대한 미련이 없어지니 오래 머무를 이유도 없었어.
후딱 3000미터 밑으로 내려가서 고산증에서나 벗어나자는 생각밖에...
히말라야이었던가? 도반이었던가? 아뭏던 그까지 내려와 롯지의 구석진 방을 얻어 이른 저녁을 먹고 잠을 청했어.


사진/ 올라가던 길에 보인 안나푸르나/ 뒤돌아본 마차푸차레/ ABC에서 안나푸르나/안나푸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