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자격증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자격증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잘 살았지만 못 살았다는 이서진 어린시절.jpg ㅇㅇ
- 싱글벙글 외국인들이 놀란 한국의 기술.jpg 수인갤러리
- [추억 회상] 기억남는 국내 이어폰 회사들을 알아보자 ㅇㅇ
- 싱글벙글 네이버 공모전 체인소맨 표절논란 ㅇㅇ
- 일본 초밥 장인집에서 계란초밥 만드는 과정 Patronus
- "장사 망하게 해주겠다" 구청 직원이 바닥에 술 버리고 적반하장 야갤러
- UFC 챔피언이 패배한 정찬성을 기다려준 이유...JPG ㅇㅇ
- 한동훈 “대통령실과 기 싸움 않겠다”.. 다음 주 출마 전망 정치마갤용계정
- 싱글벙글 개떡락한 NC 주식 근황.jpg ㅇㅇ
- 애가 들어서는 유명한 한의원 한갤러
- 싱글벙글 일본인이 분석한 "ㅋ" 운지노무스케
- 6월 14일 시황 우졍잉
-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이유 당돌
- 싱글벙글 자기의지로 4번 월북한 일본인 일리아스
- 싱글벙글 모닝지구촌 0614 모닝지구촌
최근 경복궁에서 청기와 대거 출토됨 ㄷㄷㄷ
https://youtu.be/F9cgOPVlMMA?si=KALCZcCOBSZvJbiU비교적 최근 소실된 청기와 건물 ‘창덕궁 경훈각’보기드문 2층 전각에 초호화 청기와를 올림구한말 화재로 소실창덕궁 비원과 어우러진 경훈각의 인공지능 복원상상도 (창덕궁 청기와 2층 전각 경훈각 상상 복원도)경훈각을 상상 복원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창덕궁 경복궁의 건축 양식과 청기와와 금박 장식을 학습시킨 결과) [경복궁 자미당]이 어디? 청기와 출토?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Ⅹ 심용환역사앤교육연구소 | [쪼개보기_답사] #심용환 #현재사는심용환 #경복궁 #자미당서울의 대표 관광지인 경복궁이 계속 발굴 중??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흥미로운 경복궁의 역사속으로!!! 2022년 경복궁 자미당 발굴조사에서는 어떤 흔적이 확인되었을까요? 흥미진진한 고고학 이야기와 조선초기 청기와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를 영상에서 만나볼까요?※본 영상은...youtu.be조선 전기에 대부분 주요 전각이 청기와였다는군..흥선대원군이 청기와로 재건하려 했는데청기와 한 장당 지금 돈으로 30만원 가량 돼서포기했다네..”청기와가 상상속의 산물이다.““일부 부분만 포인트로 썼을 것“라고 학계의 의견이 있었는데이번 경복궁 자미당 발굴 현장에서대규모 청기와 출토가 되면서..조선 전기 경복궁이 청기와라는게 확인됨..(경회루 근정전 이런것들이 전부..터콰이즈 블루 색상의 지붕이었다는것..)자미당 지하땅 파보면 아래 사진처럼마치 터키석 광산을 연상하게 할 정도임..ㄷㄷ만약 나머지 경복궁 전각들이 청기와로 복원된다면..상당히 화려할 것임..특히 청기와는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는 유적이라는점에서 독창적인 고려-조선전기 양식이라 할 수 있겠음.인공지능 컴퓨터로 복원한 조선 전기 청기와와부분적 금박 장식의지붕 상상 복원도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 (고종의 아버지)이 청기와 복원을 추진하면서 기술자들이 제시한 청기와 한 장 금액은8냥이었다고 하네 (당시 소 한마리당 20장 구워낼 수준)(청기와 가격 관련 자료: youtu.be/z_6-_IVdtvE?si=rzldC9sYhcQL3B82)단청이 조금더 돋보이는 터콰이즈 블루 색상의 청기와 장식터콰이즈 블루 색상의 기와와금색이 어우러진 지붕이 복원된다면..한국 고유의 건축 양식으로 될 가능성 예상된다.일부에선 이국적 색상이 중국 같다고 하지만중국에선 출토되는 청기와 양식이 없다는군(명나라가 썼다고는 하지만.. 구체적 현존하는 역사 유적은 없는듯..)한국은 단 하나 : 창덕궁 선정전과각종 회화 그리고 최근 발견된경복궁 자미당 청기와로 인해한국의 심볼적 동양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게됨..인공지능 컴퓨터로 복원한조선 전기의 경복궁의 예상 상상도(청기와와 금박 세부 장식 등..)궁중 숭불도 아래 그림은 조선 전기 궁궐을 묘사한 그림이라 하는데 일부 전각이 청기와로 돼있는걸 확인함•궁중 숭불도 • 석가 출가도의 경우조선 전기 경복궁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라고 주장돼왔으나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는데이번 경복궁 자미당 지하에서 발견된대규모 터키석 색상의 청기와 발굴로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이 청기와로 된게확인됨..창덕궁에 있었던 2층 청기와 건물 (동궐도) 아래는 최근 호암 미술관에서전시중인 석가 출가도 (조선 전기 경복궁을 묘사했다고함.. 자세히 보면 전각별로 청기와의 종류가 다양하고(터콰이즈블루색 • 울트라마린 블루) , 금박인지 금 으로 토용등 디테일한 금 장식이 있음)[석가 출가도 15세기 조선 ] 쾰른에서 발견된 해당 회화는 조선 전기의 것으로일부 학자들 사이에서‘조선 전기 경복궁의 모습이다’ 주장돼왔지만상상의 산물이다 라고 (욕먹기도…)그러나 최근경복궁 지하에서 대규모 청기와 유적이발견되면서 증명되기 시작 중..이미지 자료: 유튜브 링크 하단 첨부함**6월 16일 까지호암 미술관에서 석가 출가도공개한다고 하니.. 관심있으면 꼭 가보시길..**마치 터키석 광산을 방불케하는경복궁 자미당 복원 현장 (출처: 유튜브 링크)https://youtu.be/WMB0qS6sDL0?si=JPsm7RSHeZnVewjW 창덕궁의 청와대창덕궁에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숨가쁘게 돌아가던 조선판 청와대가 있었다.ㅇ 창덕궁 궐내각사 특별관람 ㅇ · 2016년 11월 금~일 14시 · 신청 및 안내 http://cdg.go.kr문화유산채널 http://k-heritage.tv한국문화재재단 http://chf.or.kryoutu.behttps://youtu.be/hGF3o1EOvaw?si=xnd-jC5YuZOjAF5S 임금님이 집무하던 궁궐 전각을 장식한 청기와 용머리 토수 - 2020년 11월 큐레이터 추천 왕실 유물[ 2020년 11월 큐레이터 추천 왕실 유물 ]임금님이 집무하던 궁궐 전각을 장식한 청기와 용머리 토수.전시장소 : 2F 조선의 궁궐실#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전시 #청기와용머리토수 #청기와 #용머리 #토수 #정부혁신국립고궁박물관 누리집 : https://www.gogung....youtu.behttps://youtu.be/F9cgOPVlMMA?si=VdbKmbwQU-CnV6Sr [경복궁 자미당]이 어디? 청기와 출토?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Ⅹ 심용환역사앤교육연구소 | [쪼개보기_답사] #심용환 #현재사는심용환 #경복궁 #자미당서울의 대표 관광지인 경복궁이 계속 발굴 중??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흥미로운 경복궁의 역사속으로!!! 2022년 경복궁 자미당 발굴조사에서는 어떤 흔적이 확인되었을까요? 흥미진진한 고고학 이야기와 조선초기 청기와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를 영상에서 만나볼까요?※본 영상은...youtu.be- dc official App
작성자 : ㅇㅇ고정닉
흥선대원군은 과연 전통건축의 구세주인가?
요즘 글을 거의 안쓰고 있는데, 경복궁 관련해서 말들이 많길래 경복궁을 중건한 인물인 흥선대원군에 대해 말해보려 함.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흥선대원군에 대해 별 악감정이 없으며 오히려 그가 시행한 여러 개혁정책들은 꽤나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함. 하지만 그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큰 실수를 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으로 인해 고종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되었음. [광화문과 북악산] 다만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오로지 문화재와 건축에 국한된 부분이지 이것으로 흥선대원군에 대한 비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님. 역사에 가정은 없기에 그가 집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문화재들이 지금 남아 있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음. 다만, 흥선대원군에 대해 경복궁을 중건했다는 사실만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함. [안동 호계서원, 산청 덕천서원, 안동 묵계서원, 밀양 칠탄서원. 사진 : 문화재청]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서원철폐령이었음. 서원은 조선시대에 지방권력을 틀어쥐고 갖은 횡포를 부리고 있어 지방 관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놔두고 있었음. 특히나 세도정치기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백성들의 삶이 극도로 궁핍해져 가고 있던 상황에, 서원의 악행은 묵과할 수 없던 부분이었음.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47개소의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훼철시킴. 정책적 측면을 떠나 문화재적 가치로만 접근하자면,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에서 서원은 궁궐 다음으로 권위 있는 건축물이었고, 또한 그 수도 많았기에 당시에 1000개소가 넘던 서원을 극소수만 남기고 모조리 없앴다는 것은 조선 건축의 한 뿌리가 사라진 것과도 같음. 훼철 이후 여러 서원들이 재건되었는데, 그 면모를 살펴보면 입지나 배치가 훌륭한 곳들이 많아 대원군에 정책에는 수긍하면서도 50년만 더 버티지 하는 생각도 들긴 함. 특히나 한국전쟁 중 서울 근교의 우저서원, 파산서원, 사충서원 등 남아있던 47곳 중에서도 소실된 것이 많은 점은 더욱 안타까움. [경복궁 흥례문]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복궁임. 경복궁은 1592년 소실된 이후 몇몇 왕들이 찾기는 했으나 270년간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음. 반대로 말하자면 조선 초기 궁궐의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었음을 뜻함. 조선 초기는 경복궁-창덕궁 양궁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태종의 경우에는 창덕궁에서 주로 머물렀으나 세종 등의 경우에는 경복궁을 선호하였음. 따라서 경복궁에는 조선 초기, 특히 세종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음. 세종조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많은 과학적 성과들의 흔적이 1865년까지 경복궁에 남아 있었는데, 옥루, 앙부일구 등이 설치되어 있던 흠경각과 일영대, 천문관측을 하는 장소였던 간의대 등이 남아 있었음. 그러나 경복궁 공사가 시작되며 이것들은 모조리 헐리고 말았음. 이를테면 간의대 옥석의 경우에는 근정전 뜰의 품계석으로 쓰였음. 또한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가 "(전략) 우리 나라에서 제일 웅장한 건축인데 지금껏 우뚝 솟아 있어 마치 영광전과 흡사하다."고 하였으며 같은 기록에서 경복궁 터를 다녀온 호조판서 심이지가 보루각 터를 둘러보았으며 흠경각은 들보와 서까래가 썩었다고 했는데, 이는 1794년의 기록임. 이 흠경각은 광해군 때인 1613년 재건한 것인데, 당시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임. 다만 효종조 잠시 언급되었다가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던 것 같음. 물론 정조 때에도 이미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던 것 같지만, 중건 시점이 이로부터 70년 뒤이니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있음. [경복궁 경회루] 흔히 조선 초기 경회루에 대해서는 돌기둥에 용 조각이 있었음에 주목함. 성종조에 조각된 이 돌기둥은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다가, 중건 시점에는 48개 중 3개만 서 있고 나머지는 무너져 있었다고 함. 중건 시점에서 용 조각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돌기둥들이 화재로 상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서 계체석으로 썼다고 적혀 있음. 아마도 경회루 기단의 돌들이 검게 변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돌기둥들을 깎아 재사용한 것으로 보임. 물론 불에 탔다고 하더라도 조각은 분명 남아 있었을 것임.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다른 용도로 재사용되었기에 그 모습을 알 길이 없음. 현재의 돌기둥들은 삼청동과 송계별업 등지에서 새로 떼어 와 제작한 것들임. 가끔 가다 용 조각은 오래되서 지워진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보임. 한편, 경복궁을 재건하던 당시 근정전과 경회루의 기단과 월대는 다시 제작되었음. 당시 기록을 보면 외형은 약간 손상이 있었으나 돌을 뜯어내니 안쪽은 물이 스민 흔적이 없이 완벽했다고 함. 기단 안쪽을 채우던 돌들은 그대로 사용했다고는 하나 월대와 기단은 새롭게 조성한 것으로, 조선 전기의 흔적이 아님. [경희궁 흥화문과 숭정전. 사진 : e뮤지엄]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손실은 바로 경희궁임. 경희궁은 비록 직전 왕들인 헌종-철종조(1834-1864)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헌종 이전의 순조를 비롯하여 인조, 숙종, 영조 등 많은 임금들이 애용하던 궁궐이었음. 지금은 터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과 경희궁 두 궁궐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남아있었다면 큰 역사적 가치를 가졌을 것임.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하며 부재를 충당하기 위해 경희궁이 헐리게 되었음. 따라서 경희궁은 위 사진과 같이 5개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사라졌음. 막상 헐고 나니 상한 목재가 많아 대부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함. 경희궁은 이후 망국 이전까지 이따금 군사를 사열하는 등의 장소로 쓰이다가 망국 이후 남은 건물들은 모조리 팔려나가고 그 터에는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음. 숭정전은 일본 사찰에 팔렸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고, 정문인 흥화문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신사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쓰이다가 해방 이후 그 자리에 들어선 신라호텔의 정문으로도 오래 서 있었음. 흥화문은 1988년이 되어서야 경희궁으로 되돌아왔으나, 옛 터에 구세군 건물이 들어서 있어 원래 자리는 되찾지 못했음. 참고로 박석 갖고도 시끄러운 거 같은데, 내 추정으로는 임란 이전까지는 박석이 없었을 것으로 보임. 현재 경복궁 내에서 박석이 사용된 장소는 근정전 앞마당뿐임. 그런데 영건일기에 따르면 경희궁과 안현(안국동고개. 현재 광화문에서 안국역으로 넘어가는 길)에 깔려 있던 박석들을 싸그리 철거해서 들고 왔고, 그것도 모자라 강화에서 새로 떼어 왔다고 함. 애초에 박석은 바닥에 까는 돌이니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한들 굳이 철거한 후 다시 깔 필요는 없어 보임. 중건 이후 고종은 30년도 안되는 경복궁 생활 동안 멀쩡한 침전 놔두고 구석에 들어가서 살다가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은 이후 또 다시 폐허가 되었음. 군주의 위상을 세우겠다고 엄포한 고종은 또 다시 궁궐 공사를 시작했고, 여기에 더불어 평양의 풍경궁이나 안동별궁을 비롯해 각종 토목공사를 벌였음. 경운궁은 완공된 지 1년만에 전소되어 중층 중화전 건물을 단층으로 재건하는 촌극을 벌였고, 풍경궁은 완공도 못 한 상태에서 일본군이 러일전쟁 중 점거하여 돈낭비로 그쳤음. 언젠가 고종의 토목공사 욕심에 대하여 제대로 다루게 된다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음. 어쨌든 이번 글에서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역사를 벌인 흥선대원군에 대해 알아보았음.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경복궁이 없는 서울을 상상하기 어려움. 그러나 그것만으로 대원군을 찬양하는 것은 동전의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이 아닐 수 없음. 더군다나 그 역사적 맥락으로 살펴봤을 때, 경복궁 중건은 결과적으로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끈 시발점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경복궁이 갖는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19세기 조선에 그대로 대입하여 흥선대원군을 평가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임. - dc official App
작성자 : BABO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