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은 향수에 기반한다. 그 시절의 불편했던 요소들은 보정된 기억 속에서 재조립되고 단순화되어 게임을 즐겼던 추억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즐겼던 게임을 다시 플레이해보려고 하는 플레이어들은 종종 놀라울 정도로 불편하고 빡빡한 난이도에 놀라며 이런 말을 내뱉는다. '내가 이걸 어떻게 했지?'
백영웅전은 사람들이 좋아하던 그 시절의 게임을 있는 그대로 가져온 게임이다. 하지만 어떤 부분을 사람들이 좋아했고, 어떤 부분을 싫어했는지에 대한 고찰은 없다. 그냥 그 시절의 게임은 이랬으니까.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아무 생각없는 밸런싱으로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뿜어내고 있다.
1. 미흡한 전투 시스템
백영웅전에서 가장 문제삼을 만한 부분은 전투 시스템이다. 제법 그럴듯하게 보이는 이 화면 속에선 편의성도, 직관성도 결여되어 있다. 우선 전투 순서를 보자 맨 위를 보면 턴 순서가 어떤 식으로 돌아오는 지 알 수 있는데 노아, 미오, 량, 힐디, 세이, 가오 순으로 전투 순서가 정해져있다. 그렇다면 내가 전투 커맨드를 입력하는 순서도 저 전투 순서에 맞춰져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이 게임은 내 턴 순서와 상관없이 무조건 오른쪽 옆에 있는 순서인 가오, 세이, 미오, 량, 노아, 힐디 순으로 공격방식을 정한다. 턴제 전투의 기본은 상대 공격에 대처하고, 빠르게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전략성에 기반하는데, 이 게임은 플레이어의 전략적인 행동을 최대한 방해하고 헷갈리게 만드는 방식으로 턴 순서를 배정하고 있다.
전투 시스템의 무성의함은 보스전에서도 잘 드러난다.
(스샷 못찍음.. ㅈㅅ)
튜토리얼 보스전에서는 플레이어들 앞에 돌판이 깔려서 이를 통해 상대 패턴을 피할 수 있는 기믹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가운데 있는 애들에게는 돌판이 없어서 패턴을 피할 수 없는데. 보스가 돌판을 이용해서 피해야 하는 강력한 패턴을 가운데에 쏜다. 막을 방도를 다 만들어주던가, 아니면 빔을 피할 수 있는 애들에게 쏴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왜 개발진들은 6명 중에 4명에게만 피할 수 있는 돌판을 할당해주고, 보스가 돌판이 없는 애들에게 강력한 공격을 쓰는 경우의 수를 상정한 것일까?
2. 이해할 수 없는 밸런싱과 설계
이 게임에는 대형영웅이라는 기믹이 존재한다. 대형영웅이란, 최대 6명을 넣을 수 있는 파티에서 혼자 2명 자리를 차지하는 영웅이다. 만일 이런 영웅을 설계했다면 당연히 대형 영웅만의 어떤 스텟적인 이점이 있거나 특출난 장점이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고, 대형영웅의 첫번째 자리는 이런 대형영웅의 직관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가 차지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가장 처음 획득할 수 있는 대형영웅인 유메는 놀랍게도 전열을 상정한 캐릭터(공격이 근거리면, 후열에선 공격 못함)면서 탱킹 스킬이 특출난 것도 아니며 스텟이 다른 캐릭터들보다 우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열, 후열 어디에 있어도 혼자 2명 분의 자리를 차지하며 그러면서 성능은 실질적으로 1명과 다른 부분이 없기 때문에, 잠깐 쓰다보면 이 캐릭터를 어디에 써야 하는 지 의문이 들게 된다. 위의 스샷에서 유메의 체력이 163으로 나와있는데, 저 체력도 체력을 15% 증가시켜주는 체력의 룬을 낀 상태며 실질 체력은 140대다. 왜일까. 혹시 30레벨을 넘기면 엄청나게 강해지는 그런 기믹일까?
이 게임에는 룬이라는 장비가 있다. 스텟을 올려주거나 플레이어가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등 다양한 이점을 가진 장비며, 캐릭터마다 특정 레벨에 룬이 한 칸씩 열려서 룬 특성에 맞춰 캐릭터를 강화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룬의 효과가 힘 5% 증가 같은 단순한 효과가 대부분이라 내가 커스터마이징해서 캐릭터가 강해진다는 느낌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내가 던전에서 레벨업을 해서 새로운 룬 슬롯이 열린다고 해도 마을에서만 룬슬롯이 변경 가능하기 때문에 캐릭터가 강해진다는 걸 즉각적으로 체감하기 힘들다.
또한 룬특성 자체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룬 렌즈로 사용할 수 있는 공격마법의 효율이 좋지 않은 편이며, 스텟 룬 같은 경우 캐릭터 강화에 별영향을 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성장 스텟이 좋은 캐릭터와 안좋은 캐릭터의 격차가 상당히 심한 편이다.
대체 왜 마을에서만 변경이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이 룬은 왜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것일까?
외주작인 백영웅전 라이징에서는 그 자리에서 변경이 가능했는데, 본인들이 외주작만 못하다는 것을 그렇게 알리고 싶었던 걸까?
3. 끔찍한 수준의 가방
이 게임의 가방은 끔찍하다. 소비 아이템과 장비템이 전부 한 가방을 쓰기 때문에 보기 난잡한데다가 보유 제한도 있어서 한 번에 아이템을 30개 이상 들고 다닐 수 없다. 물약의 갯수를 제한하는 것이야 일종의 난이도 조절 요소로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동일 룬의 한도를 1로 고정 시켜놔서 룬 3개를 먹으면 30칸의 창고 중 3칸이 차는 이 끔찍한 설계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가득찬 룬을 창고에 넣으면, 룬 변경 창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룬으로 뜨지 않는다. 따라서 룬 변경을 하려면 창고에 가서 내가 원하는 룬을 다시 꺼내야 하는 무의미한 노동이 반복되며, 혹시 내가 먹고 까먹은 룬이 있는 건 아닐까 반복해서 찾아보기 까지 해야 한다
물론 이런 식의 창고와 인벤토리는 고전 게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불편한 설계지만, 그 시절의 게임들도 후속작이 되면 다른 기능은 몰라도 인벤토리 기능만큼은 어떻게든 편의성을 챙겨서 나왔다. 인벤토리 한 칸에 템 하나씩 차지하는 설계는 모험을 중시하고 동선이 긴 jrpg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단 사실을 깨달은거다. 하지만 백영웅전은 그 시대의 불편한 감성이 정답이라는 것처럼 모든 면에서 구시대의 흐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 답습에는 고찰이 없다. 요즘 시대에 고전의 감성을 전달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을 고쳐야 할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거다. 마치 그 시절의 감성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늙은이의 아집과 퇴락한 감각만이 게임을 지배하고 있다. JRPG를 입문하기 위해 이 게임을 사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며, 차라리 진짜 고전 RPG 게임을 사서 진짜 그 시절의 감성을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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