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9월 9일 북한정권에서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에 임명됐다. 김원봉은 북한에서 국가검열상이 된 뒤로 남한을 향해 지속적인 테러·파괴·유격전 수행 공작 활동을 벌였다. 그 수행은 본인이 결성한 인민공화당을 통해 이루어졌다.
인민공화당은 김원봉이 조선민족혁명당 조직을 재건한 조직이었다. 1946년 3월 16일 밀양극장에서는 500여 명이 참석하여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족혁명당 지부 결성식이 열렸고 1947년 5월 11일에는 민족혁명당 대전지부당부 결성대회가 열렸고, 6월 1·2일 개최된 민족혁명당 제10차 전당대표대회에서는 당명을 인민공화당으로 변경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평양에 있던 김원봉은은 남한 내의 당 조직으로부터 당 사업을 보고받는 한편 당 활동 지침을 일일이 내려보냈다. 예를 들면 1949년 6월 15일에는 부산시 초량동 이기우의 자택에서 인민공화당 경남도당 조직을 재조직하고 6월 18일에는 도당에서 일반 정세, 조직광작 현황, 투쟁상황, 선전공작 상황, 재정공작 상황 등의 경남도당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여 인민공화당 중앙당으로 발송했다. 7월 19일에는 중앙당에서 경남도위에 하달하는 지령문을 내렸다.
인민공화당원 이만식은 1948년 6월 경남도당 간부 김진달과 신남근, 구중복, 문관홍, 안수열과 함께 상경하여 17일 개성에 도착해서 송악산을 거쳐 월북하여 같은 달 28일 평양을 경우, 강동정치학원에 입학한 뒤 철학, 조선역사, 소련혁명사, 신민주주의 정치기구, 해방 후의 조선 등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그런 뒤 1948년 10월 20일 경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졸업한 이튿날인 21일 이만식은 평양에서 있던 인민공화당 사무소에서 당수인 김원봉을 만났다. 김원봉은 이들에게 (1)당의 핵심이 될 것 (2)당 재건운동을 전개할 것 (3) 청년으로서 당 사업에 열렬히 투쟁할 것 (4)대한민국정부를 파괴 전복시키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도록 투쟁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후 이만식은 남파되어 후일 인민공화당 경남도당 책임자를 맡았다.
당 활동이 활발하였던 경남지역에서는 남한 정부를 상대로 군사적인 무장투쟁까지 전개되었다. 1949년 7월 19일 인민공화당 중앙당에서 경상남도위원회에 하달한 지령문에서는 이만식을 유격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있으며 1949년 7월 30일 C지구에서 경남도당에 보낸 보고서에는 35명으로 야산대원을 조직했다. 또 당이 독자적으로 유격대 조직을 시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로당이 전개하고 있던 군사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염인호, 1993, 384~386쪽.)
북한 정규군이 6.25 남침을 하기 직전, 김원봉은 1950년 5월 20일 조선중앙방송국 라디오를 통해 인민공화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동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적의 선거기관과 선거장소를 파괴 습격하며 선거를 거부함으로써 선거를 완전히 파탄시키라! 인민유격대의 무장투쟁을 백방으로 원호하며 광범한 농민봉기를 일층 맹렬히 전개 하라! 이 승만 매국역도들을 타도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방책을 우리들 자신 의 손으로 실시하라! …… 조국의 영예와 당의 영예를 위하여 자기의 피와 생명을 아끼지 말고 원쑤들을 소탕하는 길에 용감히 전진하라!”.(김광운, 2019, 285)
등 북한에서 그저 고위직만 쳐하거나 민사작전만 한 게 아니라 본인이 밀양에서 창당한 당을 평양에서 지시를 내려 조종하거나 북한에서 훈련시킨 뒤 다시 남파하여 대한민국에서 지속적인 군사공격과 테러를 일삼았다.
주작같지?
사실 학계에선 90년대부터 상식이었다.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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