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쇼와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선언과 함께, 지난 5년간 수도없이 많은 인명을 앗아갔던 제 2차세계대전이 종전된다.
하지만 항복 선언 이후에도 몇몇 지역에선 전투가 계속되었는데...
그러나, 대부분 그저 개인 또는 소규모 집단의 적에대한 앙금으로 인한 것이었고, 그에따라 대규모 전투는 더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단 한곳 빼고
시무슈 섬 (점수도)이라는 좆만한 섬에서, 종전 선언이 된지 3일이나 지난 1945년 8월 18일, 소련군과 일본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발생한다.
당시 시무슈 섬의 일본군은 항복 선언과 함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무장해제 중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시무슈 섬 앞의 소련군 함선들에게서 무장해제 중인 일본군에게 대규모 포격이 가해진다.
일본군의 선제공격은 없었다.
그와 동시에 8월 18일 새벽, 소련군의 상륙이 시작된다.
일본군은 비록 무장해제 중이었지만, 3일밖에 되지 않았기에 당장 전투 태세로 돌입할 수 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갑자기 자신들을 느닷없이 죽이려드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노
즉각 일본군도 자신들의 포로 반격을 개시함으로써, 전쟁이 끝난지 3일이나 지난 시점에서 비극의 전주곡이 울리기 시작한다.
일본군의 반격은 성공적이었다.
소련군은 상륙에 성공하기는 했으나,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는다.
시무슈 섬의 일본군은 언제나 당하기만 하는 그런 일본군과는 거리가 꽤 있었다.
일본은 미군(소련군이 아님)이 태평양을 건너 일본의 동쪽으로 공격해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에따라 일본의 최동단이던 시무슈 섬에 중국, 태평양 전선에서 전쟁 경험을 쌓은 베테랑 병사들을 배치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시무슈 섬은 전쟁 내내 전투가 벌어진 적이 없던터라, 탄약과 장비 모두 부족함없이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소련군은 마치 '죽으러 오는 것'만 같았다.
병력 수 자체는 소련군 8800명, 일본군 8500명으로 소련군이 근소 우위에 있었으나,
우리가 전투의 일반 원칙, 즉 공격자가 수비자에 비해서 3:1의 수적 우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려한다면
요새에서 방어중인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은 무모함, 그 자체였다.
특히 일본군 전차가 난입하여 소련군을 도륙하는데도, 소련군은 보병 대전차 전술로만 대응하였다.
그야말로 어색할 정도로 역할이 뒤바뀌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다.
전쟁의 향방은 전장 밖에서 결정되었다.
대본영이 모든 일본군에 대한 관대한 항복을 얻기 위해서 노력할 동안, 시무슈 섬의 일본군의 분전은 모든 과정을 망칠 위험이 있었다.
히로히토 일왕의 명령에 의거하여, 시무슈 섬의 일본군에게 모든 전투 행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8월 18일 정오, 10명 남짓으로 구성된 일본군 협상 사절단이 소련군에게 접근하였지만,
소련군은 이 백기를 들고오는 협상 사절단에게 발포한다
그후 전투는 8월 21일이 되어서야 끝났고,
이 기간동안 일본군 1018명, 소련군 1567명이 사망했다.
물론 이정도 전사수를 뛰어넘는 초 대규모 전투는 2차세계대전 내내 수도없이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쟁이 끝난지 3일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정도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소련군은 전쟁이 끝난지 3일이나 되었는데도 무장해제중인 일본군에게 공격을 하였으며,
또 왜 이렇게까지 어이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일까?
사실, 단순히 군사 사절단만을 파견해서 종전 협상만 하면 아무런 희생없이 섬을 차지 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는 스탈린이 조국의 아들들의 피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이 쿠릴 열도를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전장에서의 소련군의 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이로인해 희생된 것은 불쌍하고도 애꿎은 젊은이 수천명이었으며
현재는 그저 이렇게 녹이 슨 흔적만이 그때의 참상을 말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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