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의 작가 "토베 얀손"은 1914년생으로, 무민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인《무민 가족과 대홍수》가 출간된 건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그리고 1년 후인 1946년, 무민 시리즈 두번째 작품《무민, 혜성이 다가온다》가 출간되었는데, 작중에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모두 동굴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서로를 꼭 부여잡은 채 동굴 지붕에 놓인 욕조 속으로 운석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중략)
온 바위산이 흔들렸고 온 땅이 진동했으며 혜성의 겁먹은 울부짖음이나 지구의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꼭 부여잡은 채 가만히 있었다. 바깥에는 부서져 버린 산과 조각나 버린 들판의 메아리가 요동치고 있었다. 시간은 무시무시하게 천천히 흘렀고 모두 각자의 고독 속에 빠져 있었다."
《혜성이 다가온다》는 어느 날 지구로 혜성이 날아오기 시작하고 무민이 혜성을 막을 방법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다.
하지만 모험의 과정에서 알아낸 거라곤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정확한 시간 뿐. 혜성을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무민은 새로 사귄 친구들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혜성이 충돌하길 기다리며 위의 묘사가 나온다.
혜성은 무시무시한 존재다. 혜성이 다가오자 무민이 사는 지구의 많은 것이 파괴되어갔다. 처음에 무민 마마의 정원, 그 다음엔 숲, 그리고 바다.
사라진 숲과 바다 위에 남은 건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오물뿐. 골짜기의 이웃들은 두려움에 기약 없는 피난을 떠나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혜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혜성이 상징하는 것은 다름아닌 전쟁, 특히나 2차대전의 미사일이다.
동굴 속에 숨은 무민 가족은 방공호에 모인 민간인들이며, 파괴된 자연과 피난가는 이웃들도 전쟁의 참상에 대한 은유이다.
무민의 작가토베 얀손은 2차 세계대전의 기간 동안 이 모든 걸 겪었다. 전쟁 당시에 느꼈던 불안과 공포를 작품에 녹여낸 것이다.
토베 얀손의 전기를 다룬 책 <토베 얀손, 일과 사랑>을 읽으면 좀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작중 전쟁 중의 춤과 노래에 대한 이런 구절이 있다.
"슬픔과 음울함을 물리치기 위해 모든 이가 내일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열광적으로 먹고 마시며 노는 사교모임이 여기저기서 열렸다. 전쟁중임에도 사람들은 춤을 추고 싶어했고, 토베는 원래부터 춤추는 걸 좋아했다.
(중략)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음은 종종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이어졌다. 모두 걸낌없이 마시고 미치광이처럼 춤을 췄고, 입씨름하며 웃어댔다. 전쟁이 가져온 불안감과 술기운이 뒤섞여 사람들이 고삐 풀린 채 감정을 터뜨리는 모습에서 토베는 절박함을 보았다."
이때의 경험 또한 반영된 장면이《혜성이 다가온다》에 나오는데, 바로 무민 일행이 춤을 추는 장면이다.
긴 여행과 혜성이 망쳐놓은 기후에 지친 무민 일행은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무도장에서 파티를 벌였다.
요정, 작은 동물들, 바이올린 키는 귀뚜라미 등. 그들은 오로지 춤추고 노래하는 것에만 집중하며 즐거워한다. 혜성이 몰고 올 재앙은 애써 신경쓰지 않으며. 마치 토베 얀손과 친구들이 미사일의 공포를 잊고자 춤을 춘것처럼.
이때가 혜성이 오기 불과 사흘 전이었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해서 혜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혜성이 가까워질수록 그 빛은 점점 강렬해져갔고, 그럴 수록 지구가 멸망한다, 막연했던 불안함은 고향 땅이 파괴될수록 강해졌다.
무민 일행이 한계에 다다른건 바닷가에 당도했을 때였다. 혜성 때문에 바다는 사라져 있었고 무민은 이제 그 불안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을 직시해야만 했다. 망연자실한 무민 일행에서 가장 절망한 건 다름아닌 "스너프킨"이었다.
하지만 스너프킨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아 소리쳤다.
"다 사라져 버렸어!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웠는데! 이제 배도 못 타고, 수영도 못 하고, 커다란 물고기도 못 봐! 집채만 한 폭풍도, 투명한 얼음덩이도 없어! 달빛 비치는 바다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니! 바닷가도 바닷가라고 부를 수가 없어. 이젠 아무것도 아니야!"
스너프킨.
무욕의 가치를 주장하며 언제나 걱정없이 살아가는 방랑자 소년.
《혜성이 다가온다》에서 처음 등장하여 무민의 친구가 된 스너프킨의 역할은 언제나 무민의 고민을 달래주는 것, 성급한 스니프를 진정시키는 것처럼 어른스러운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침착하고 유유자적한 스너프킨이 주저앉아 절망하는 모습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꽤나 충격을 줘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절망한 스너프킨을 달래준 건
"무민은 황량한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빛나는 불덩어리가 다가오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지구가 얼마나 두려워할지 생각했다. 또 무민은 자신이 세상 모두를, 숲과 바다와 비와 바람과 햇빛과 풀과 이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리고 그 모든 것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라져버린 바다의 밑바닥에서 야영하며 무민은 생각했다.
고향에서 보낸 일상들. 호수에서 낚시를 하고 바닷가에서 수영하고 숲을 돌아다니는 나날과, 사랑하는 부모님이 해주는 맛있는 식사와 즐거운 이야기. 아무 걱정 없이 잠들 수 있는 아늑한 침대,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소중한 친구.
파괴되어가는 자연과 피난 가는 이웃들을 바라보며 무민은 일상의 소중함을 상기했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말이다.
일상의 붕괴, 혜성이 의미하는 본질적인 상징은 그것이다. 전쟁은 일상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 모든 끔찍한 상황에 잠 못 이룬 무민은
엄마라면 어떻게든 해줄 거라며 막연한, 너무 막연해서 덧없기까지 한 희망을 품었다.
전쟁 속의 어린 아이가 가진 무력함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바다를 사랑해서 무민 이야기에 바다 얘기를 많이 넣은 토베 얀손. 그 바다가 사라졌다는 내용은 여러 생각을 들게 한다.)
《무민, 혜성이 다가온다》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혜성은 지구에 충돌하기 직전 변덕을 부려 우주로 돌아가, 다시는 지구에 찾아오지 않았다. 혜성이 사라지자 그것이 몰고왔던 재앙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숲과 바다는 원래 모습을 되찾고, 피난 갔던 동물들도 골짜기로 돌아왔다. 이후에 나오는 무민의 이야기에서 혜성의 위협은 그런 게 있었냐는듯 다시는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폭격당한 도시는 끔찍한 잔해로 변모했다.
전쟁에 나간 많은 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만 끝나면 모든 게 평화로웠던 전쟁 전으로 마법처럼 돌아가리라 모두가 믿었지만, 전쟁의 참상은 오래토록 그들의 삶을 따라다녔다.
전쟁의 참상 속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랬다. 위치적인 의미만의 고향이 아니라, 평화롭고 말끔한 기억 속의 그곳으로.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건 무너져버린 일상의 결과 뿐이었다.
무민에서 혜성이 사라지자 그로 인했던 재앙이 원상복구되는 결말은 토베 얀손이,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간절히 바랬던 소망을 반영한 게 아니었을까.
혜성이 사라진 세상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무민 가족.《무민, 혜성이 다가온다》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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