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군이 1차 침공 당시 헝가리의 주력군을 격파한 모히 전투)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이 헝가리/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내친김에 서유럽까지 쳐들어가려 하다가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말머리를 돌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많은 사람들은 거기서 몽골과 유럽의 전쟁이 끝난줄 알고 있지만....
사실 몽골은 그 이후에도 유럽의 문을 창검으로 꾸준히 두드렸다.
그리고 그런 몽골을 막아내는건 유럽의 관문인 헝가리와 폴란드의 역할이었다.
(몽골의 침공 당시 헝가리의 국왕, 벨라4세)
몽골의 1차 침공은 헝가리에 끔찍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전국민의 20% 이상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끌려갔고 국토의 절반 이상이 황폐화되었다.
헝가리 국왕 벨라4세는 패전의 이유를 곱씹었고 이후 수십년 동안 몽골의 침략을 대비하고 국력을 회복시키는데 전념했다. 벨라4세가 내린 결론은 서유럽의 군사기술을 모방하자는 것이었다.
벨라 4세는 서유럽을 본따 수십개의 석조 성채들을 나라 곳곳에 건설했다. 그리고 몽골군에게 효과적인 위력을 보였던 기사와 석궁병을 대거 양산했다.
국내외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됐지만 왕은 개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몽골군이 다시 돌아올거라는걸 본능적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벨라 4세가 죽은뒤 15년후, 몽골의 1차 침공으로부터 40년이 흐른 1285년.
수만명의 몽골 대군이 헝가리 2차 침공을 개시했다.
허나 몽골군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했다.
사방에서 몽골군을 맞이한 것은 돌로 지어진 난공불락의 요새들, 잘 훈련된 기사들과 석궁병들이었다.
몽골군은 수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병력만을 소모할 뿐 격렬히 저항하는 요새들은 함락되지 않았다. 몽골군은 홧김에 주변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요새를 포위하려는 전술을 펼쳤으나 헝가리군은 곳곳에서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을 펼치는 식으로 대항했고 요충지의 요새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전투마다 몽골군은 소규모 패전을 거듭했고 피해는 점점 누적되었다.
벨라 4세의 개혁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전황 때문에 피로와 혼란이 몽골군을 잠식하고, 그것이 턱밑까지 차오를 무렵, 헝가리군은 몽골군 본대를 급습했고
과거 모히에서 벌어진 전투와는 반대로 야전에서 몽골군은 처참하게 도륙당했다.
패배를 당한 몽골군은 헝가리에서 퇴각을 결심했으나
사방에서 매복하고 있던 헝가리의 추격군이 달려들었고, 간신히 귀국했을 무렵, 수만이 넘던 몽골의 군사는 거의 다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잡혀 전멸한 뒤였다.
분노한 몽골군은 2년뒤 다시 대군을 모아 이번에는 폴란드를 침공하지만
폴란드 역시 헝가리처럼 서유럽의 발전된 군사기술을 받아들여 대대적인 준비를 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폴란드가 몽골을 격퇴한 경험이 있는 헝가리에 원군까지 요청하자
몽골군은 헝가리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전철을 폴란드에서 또다시 밟으며 대군을 잃고 패퇴한다.
두 차례의 주요한 군사적 패배는 몽골의 침략의지와 능력을 완전히 꺾어버렸고
이후 몽골이 유럽 전역을 노리고 대군을 일으키는 일은 두번 다시 없었다.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에 서있는 벨라 4세의 동상)
오늘날 헝가리 국민들은 벨라 4세를 "헝가리를 재건한 제2의 국부"로 추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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