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잇달아 벌어지는 군 내 사망사건들, 그리고 이에 대해 책임질 생각이 없는 정치군인과 "군인은 죽으라면 죽는것"이란 말을 진심으로 추종하는 구태의연한 과거의 짐덩이 군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국민 대다수의 혈압을 올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채 상병 사건이 크게 문제되었을 무렵 유승민이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유능한 군인이 아니라 권력에 빌붙는 정치군인들이 출세하기 때문"이란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글을 보니 미국의 한 장군이 생각났다. 화려한 퍼포먼스와 쇼맨십으로 국민들에게 정열적인 열광을 불러 일으키고, 정치권에서도 함부로 건들 수 없었던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군인, 더글라스 맥아더말이다.
사실 인천상륙작전과 통쾌한 반격만 기억하는 대다수에게 맥아더가 정치군인이라는 설명을 하면 놀라는 경우가 많다.
실제 맥아더에 대해 미국의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한 어록이 있다.
"맥아더는 우리 미국 최고의 장군이자 최악의 정치인이다"
그렇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했던 시기에 장군으로서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발을 깊숙히 담갔을 뿐더러 심각한 결함 또한 많았던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남북전쟁의 영웅인 아서 맥아더를 닮았는지 쇼맨십과 통솔력이 대단했다. 1차 대전 때 그는 사단 참모로 근무했음에도 직접 권총을 들고 쏘아대며 최선두에서 돌진했다. 참호전이 고착화되어 조금만 머리를 내밀어도 저격과 기관총 세례, 독가스 포격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이후 그의 커리어는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최연소 장군 타이틀은 당연하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장교들에게 현대적인 교리를 교육시킬 수 있도록 개혁했다. 그는 이 시기까지 진정 미국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명예를 중시하며 모범을 보이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질 준비가 되어있던 그는 점점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1932년 대공황의 여파로 모두가 힘들어할 때, 1차 대전 참전용사들은 정부가 퇴역 군인에게 지급하는 수당을 당장 지급해달라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대부분 퇴역군인이었고 소수의 사회운동가들이 섞여있었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맥아더는 이들을 전부 공산당의 선동에 놀아난 폭도로 여기고 탱크와 최루탄을 들이밀었다.
결국 5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부상당하며 사태는 끝났다. 맥아더는 ‘신속한 진압으로 미국을 빨갱이로부터 구한 참군인’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다음해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스벨트와 군비 감축 문제를 두고 맞서다가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군의 고문으로 좌천된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남방작전을 개시한 일본은 필리핀으로 쳐들어왔다. 미국 정부는 방위 계획을 세울 때 루손섬 남부의 방어하기 편리한 바탄반도로 전 부대를 철수하여 지연전을 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여기서 실책을 저질렀다. 정부를 무시하고 모든 병력을 루손섬 북부 해안지대에 넓게 흩뿌려 놓은 것이다. 당연히 병력이 한 군데 집중되지 못해 방어 효율이 극도로 낮아졌고 일본군은 손쉽게 루손섬을 휘저었다.
결국 맥아더는 원래 계획인 바탄반도 방어로 돌아갔다. 그는 거기서 뾰족한 해결책을 내지 못하고 루스벨트의 명령에 따라 호주로 혼자 퇴각했다. 1932년 참전용사 학살이 있었지만 그래도 명성이 높던 맥아더가 포로로 잡히거나 죽으면 사기가 떨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평범한 장군이었다면 여기서 커리어가 끝났겠지만 맥아더는 절치부심하며 이 말을 남겼다.
"I Shall Return(난 돌아올 것이다)"
2년 뒤 맥아더는 정말 약속을 지켰다. 호주로 급히 퇴각한 뒤 호주군을 지휘하여 뉴기니섬의 일본군을 방어하고, 또 소탕하며 나름대로 자신의 능력이 죽지 않았음을 과시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켜야 했던 맥아더는 대만 진공을 주장하던 다른 장군들을 만류하고 필리핀 탈환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록 엄청난 출혈을 입긴 했지만 필리핀 탈환에 성공하며 그의 주가는 치솟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항복을 선언하며 그는 일본에 설치된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사령관이 되었다. ‘푸른 눈의 쇼군’ 맥아더는 전쟁 개시에 분명한 책임과 죄가 있었던 천황이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선량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기소하지 않았다. 그는 천황을 인간일 뿐이라며 격하했으면서도 그를 남겨둔 대가로 일본 통치에 있어 수월함을 보장받았다.
입장에 따라서 맥아더의 이러한 행동이 ‘천황무오론’이라는 신화를 일본에서 더욱 강화시켜 전후 일본이 제대로된 반성을 하지 않는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그에게 있어 마지막 영광이자 전설적인 위업이었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대한민국을 이 작전 한 방으로 구원해낸 맥아더는 신적인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대응이 문제였다. 중공 측에서 ‘38선을 미군이 넘어오면 개입하겠다’고 경고했음에도 그는 무시했다. 중공의 이러한 주장은 허풍에 가깝고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1950년 겨울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무질서하게 후퇴했고, 1951년 1월 4일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중공의 위협을 제대로 듣지 않고 무제한적인 낙관에 빠져있던 맥아더는 이 책임을 져야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후 휴전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던 트루먼과 충돌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 트루먼에게 대항했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공화당 의원 조셉 윌리엄 마틴 주니어의 입을 빌려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을 비난했다.
이제까지 빛나는 명성과 대중적 인기, 사람을 끌어당기는 쇼맨십으로 거대한 추종자들을 몰고 다녔던 맥아더는 정계 인사들에게 대단히 버거운 존재였다. 2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루스벨트조차 맥아더를 싫어하면서도 그를 완전히 내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할 정도로 강성이었던 트루먼은 그냥 그를 해임했다. 지지율이 곤두박질 치는 것을 감내해야 했지만 재선을 포기한 트루먼에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서 해임했다. 그는 개새끼였지만 개새끼였다고 해임한 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장군들 중 3/4은 감옥에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그렇게 말 많던 군생활을 마무리했다. 루스벨트의 말마따나 최고의 군인으로서 한편으론 든든함을 가져다주면서도 최악의 정치가로서 사사건건 통수권자에 반항하여 정치인들의 혈압을 올린 맥아더는 미국 역사상 가장 양면적인 군인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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