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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ㅇㄱ, 장문주의) 한국을 찾아온 최초의 폴란드인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2.07.28 21: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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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에는 미하일 얀코프스키 (Mikhail Ivanovich Yankovsky)라는 폴란드인이 있었다. 그의 가문은 폴란드 동부의 유서 깊은 명문가였다. 튜튼 기사단과 싸우다 다리를 잃은 그의 선조에게 폴란드 왕이 직접 하사했다는 가문 문장에는 파란 방패와 단검 한자루가 새겨져있었다. 이 단검은 노비나(Novina)라라고 불렸고 그의 가문의 상징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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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코프스키는 젊은 시절 러시아 농업대학에서 유학을 했다. 그러던 중 1863년, 폴란드에서 반러시아 봉기가 일어났다. 젊은 혈기의 얀코프스키는 친구들과 함께 봉기에 참여하여 러시아군의 군자금이 실린 마차를 강탈하려다 포로로 잡혔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분노하여 3만명이 넘는 폴란드인 정치범들을 시베리아의 동토로 유배 보냈다. 얀코프스키는 이들과 함께 걸어서 시베리아까지 가야했다. (당시엔 시베리아 철도가 없었다.) 러시아군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을 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므로 얀코프스키와 폴란드인들은 주변의 풀이나 새, 토끼 같은 짐승들을 잡아먹으며 버텼으며 이 시기를 통해 시베리아의 동식물과 생존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그는 정치범으로 광산에서 몇 년간 혹독한 중노동을 하며 복역한 끝에 1868년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차르는 폴란드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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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코프스키는 집에 가지 못할 바에 이 동네에서 잘 먹고 잘 살아보자며 바이칼호를 건너 계속 동쪽으로 나아갔다. 아무르강에 도착한 그는 나룻배를 얻어타고 하류로 내려가 러시아 극동영토의 최남단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했다.


그는 그 곳에서 금광 관리자로 몇 년을 일했으나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그는 연해주의 자연환경이 목장을 운영하기 좋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군총독을 찾아가서 황무지 개간을 신청했고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의 작은 반도를 임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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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반도는 야쿠트족말로 '시데미'라고 불렸다. 당시 연해주는 러시아의 땅이 된지 고작 10년밖에 되지 않은 신세계였다. 땅은 많고 개발은 안되어 있고 사람은 적었다. 이런 곳에서는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높았다. 이 일대는 호랑이와 표범, 불곰과 멧돼지등이 엄청 많이 살았고 도적떼도 출몰했다.


얀코프스키는 핀란드, 라트비아 등지에서 온 정치범 출신 친구들과 함께 과 함께 이 작은 섬을 개간하기로 했다. 다만 얀코프스키 본인은 금광 일의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아 조금 늦게 갔고, 친구들이 먼저가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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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코프스키는 금광일을 하는 틈틈히 목장을 만들어갔다. 그는 이웃나라인 청나라와 조선에서 사슴 뿔(녹용을 의미함.)을 약재로 쓴다는 사실을 알았고 현지 원주민들에게서 사슴들을 구매했다. 그리하여 얀코프스키는 섬에다가 사슴을 방목하여 키웠다. 그리고 녹용만 잘라서 중국인들에게 비싼 값에 팔았다. 녹용판매가 잘 되서 수입은 전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그만큼 목장을 운영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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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연해주에는 러시아인보다 국경을 건너 온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이 더 많았다. 특히 조선인들은 당시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척박한 연해주로 이주하여 땅을 일구며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도 다른민족은 엄두도 안내는 농사일을 직접 하는 조선인들을 암묵적으로 받아주었다. 얀코프스키의 목장에서도 조선인들이 여러 가족 일했다.


금광 계약기간이 끝나던 1879년, 얀코프스키는 마침내 인수인계까지 끝내고 러시아군 출신 동료 2명과 함께 작은 돛단배를 타고 목장이 있는 반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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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가 오기 바로 전 날 목장에 중국 마적떼가 들이닥쳤다. 이들은 홍호자(紅鬍賊)라고 불리는 이들로 만주에서 넘어왔다. 1870년대만 하더라도 연해주의 러시아군보다 마적들이 더 많던 시절이라서 마을 하나가 습격당해 통째로 증발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마적들은 모든 곳이 철저하게 약탈 했으며 이웃에 살던 핀란드인은 마누라와 아들을 잃었다. 목장에서 일하던 조선인들도 마적들에게 집과 가족을 잃었다. 분노한 얀코프스키는 가지고 있던 총을 조선인들에게 나눠주고 힘을 합쳐 마적들을 쫒아가 일부를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조선인들로 구성된 민병대를 조직하여 마적단과 주기적으로 교전을 벌이며 농장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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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상대해야할 적은 마적뿐만이 아니었다. 연해주는 시베리아 호랑이와 아무르 표범, 늑대, 스라소니 같은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첫 해 사슴 4마리를 호랑이에게 잃은 얀코프스키는 사냥을 다니며 직접 해수를 구제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얀코프스키는 조선인들이 총을 꽤나 잘 다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대부분 함경도에서 넘어온 이주민들로 포수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라서 맹수들의 습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얀코프스키는 평생 9마리의 호랑이를 비롯하여 수많은 맹수들을 잡았다.


나중에는 인근 마을에 호환이 생기면 무조건 얀코프스키를 찾아와 잡아줄 것을 부탁하는 정도였다. 그는 연해주뿐만 아니라 국경 너머 만주와 조선까지 드나들며 맹수를 잡았다.  그와 조선인들이 열심히 마적과 맹수를 몰아낸 덕분에 목장은 안정되었고 러시아 국경도 평화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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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코프스키는 무조건 조선인들 하고만 일했다. 중국인들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밤에는 마적으로도 활동하는데 비해 조선인들은 일도 열심히 하고 남들을 도적질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따라줬기 때문었다. 조선인들 역시 마적에게서 재산을 보호 받을 수 있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얀코프스키를 좋아했다.


한번은 얀코프스키 혼자 호랑이를 추적하던 도중 마적 1명에게 습격 당한 일이 있었다. 그 마적은 얀코프스키의 등 뒤에 숨어서 총을 쏘려했는데, 나뭇가지 밟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얀코프스키가 운 좋게 먼저 총을 쏴서 마적을 사살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마적은 꽤 악명 높은 마적단의 두목이었다. 그의 일화는 순식간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퍼졌다. 국경수비대도 하지 못한 걸 일개 개척민이 해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인들은 얀코프스키의 뒤통수에 눈이 달려서 마적을 볼 수 있었던 거라고 여겼다. 거기다 얀코프스키는 당시 극히 희귀했던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는데, 조선인들은 그걸 보고선 '저 양반은 저 시커먼걸 쓰고도 앞이 보이나보다'하며 눈이 네개 달린 인간으로 취급했다.  그리하여 얀코프스키는 조선인들에게 '네눈이(말그대로 눈이 네개 라는 뜻. 러시아어로는 НЭНУНИ'라고 부름.)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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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과 친해진 얀코프스키는 그들이 '인삼'이라고 하는 식물뿌리를 비싼 돈을 주고 사서 달여먹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시아인들이 인삼을 아주 귀하게 여기며 조선의 국책사업이 인삼농사라는 사실을 들었다. 얀코프스키는 조선인들을 통해 겨우 인삼씨를 구해와 목장 한편에 따로 심어 재배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 얀코프스키는 인삼재배에도 성공하여 이를 만주와 조선에 내다팔았다.


얀코프스키는 극동러시아 역사책에 인삼과 녹용을 재배한 최초의 러시아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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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꽤 많이 모은 얀코프스키는 목장에 말들을 들여와서 번식 시켰다. 그는 본래 종마를 키우는 목장을 운영하고 싶어했다. 이후 이르쿠츠크에서 서방산 종마들을 구해온 얀코프스키는 말들을 교배시켜 품종을 개량하여 러시아군에게 군마를 공급하는 군납계약까지 맺었다. 


얀코프스키는 이런 일련의 사업들이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얻었다. 농장이 제일 번성하기 시작한 1910년대에는 600마리의 말들과 2천마리의 사슴을 보유했다. 거기다 러시아 정부에게 과거 몰수 당했던 귀족작위도 돌려받았다. 폴란드에서 끌려온 정치범은 30년만에 극동의 농장재벌이 되어 인생역전을 이루어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얀코프스키는 블라디보스토크 사교계(쥐뿔만함)에서 영향력을 펼치고 싶어했다. 그는 공공사업이나 시설건축등에 큰 돈을 자주 기부했다. 오늘날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유서깊은 건물들 상당수는 그의 재정적 지원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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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이 안정되자 얀코프스키는 시베리아 부랴트족의 혼혈인 올가 루치니차나(Ольга Лукинична)와 결혼했다. 올가는 고아출신으로 귀족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다 그 집의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얀코프스키와 만났다. 얀코프스키는 귀족의 딸들보다 하녀인 올가에게 더 관심이 있었고 한달 뒤 다시 찾아와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아무래도 부모없이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조국을 떠나 만리타향에서 힘들게 살아온 자신의 과거와 겹쳐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올가는 힘든 목장생활에도 내색하지 않고 얀코프스키를 잘 내조했고 그들장남 유리 얀코프스키(Юрий Янковский)를 비롯 2남 4녀를 낳았다. 



연해주에서 유명인사가 된 얀코프스키는 이후 차르의 칙명을 받아 극동의 동식물들에 대해서 조사하게 됐다. 그는 1890년대 아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한반도 북부를 여행하며 여러가지 동식물들을 발견하였으며, 러시아 자연사학계에도 작은 족적을 남겼다. 덕분에 '얀코프스키'라는 학명이 붙은 동식물은 현재 20여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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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코프스키는 극동러시아에서 매우 큰 위세를 떨쳤다. 목장이 있는 시데미 반도에는 얀코프스키 가문의 저택이 있었다. 그는 저택의 꼭대기에다가 푸른 방패와 단검이 들어간 폴란드 시절 자신의 가문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걸어놓았다.


내부에는 거대한 연회장과 수십개의 방,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달려있었고 저택 내 모든 식기는 전부 은으로 된 걸 썼다. 거기다 그 당시 나온지 얼마 안 된 개인 자가용과 전용 전화선도 갖추었다. 조금 떨어진 해안가의 전용부두에는 스쿠너와 바지선이 여러척 정박해 있었다. 얀코프스키는 자신을 따르는 조선인들을 위한 별채도 따로 지어줬다. 그 크기는 저택에 비하면 작았지만 당시 조선의 초가집이나 러시아인들이 살던 작은 주택들에 비하면 훨씬 컸다. 그의 밑에서 일한 조선인들은 이후 돈을 모아 근처에 농장을 세우고 계속 대를 이어 얀코프스키 가문을 도우며 일하였다.


다만 저택의 외관은 망루와 총안구등, 성채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문에는 비상시 이중 쇠창살이 위에서 내려오도록 설치되어 있었고 모든 방의 창문은 내부에서 강철로 된 철문으로 덮을 수 있었다. 지하실에는 수개월을 먹을 수 있는 식량들과 한켠에는 포로를 가둬놓을 수 있는 감옥까지 있었다. 지하실의 숨겨진 문을 열면 반대편 해안까지 10분 안에 나갈 수 있는 작은 동굴도 만들어놨다.


이는 얀코프스키가 과거 마적의 습격을 겪은 뒤 이에 대비하여 설계한 것이다. 사실 1890년대쯤 되면 연해주 국경의 치안이 강화되어 마적의 습격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으나, 얀코프스키는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런 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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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코프스키의 가족들은 멀리 떨어지지 않고 모두 같이 모여 살았다.  그는 아들 유리를 미국 텍사스의 농장으로 유학보내 전문경영인으로 키웠다. 미국 쪽과 커넥션이 생기자 미국산 종마들을 들여와서 품종개량을 할 수 있었다. 유리는 아버지의 농장을 물려 받아 더 크게 키웠고 아들 발레리와 아르세니를 낳았다. 이들 모두 할아버지를 닮아 사냥에 소질이 있었다. 나중에는 나이 든 얀코프스키 대신 아들과 손자들이 대를 이어 맹수사냥을 다녔다. 조선인들은 얀코프스키의 아들들을 '아들 네눈이, 손자 네눈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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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는 새끼때 잡아와서 기른 애완표범 '삼손'이 항상 문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이 녀석은 특히 얀코프스키의 부인 올가를 잘 따랐다. 

가는 가끔씩 삼손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여 시내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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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코프스키는 말년에 극심한 폐렴에 걸렸다. 포시예트 시 병원의 의사는 그에게 따뜻한 곳에서 쉬라는 조언을 했다. 목장경영을 장남 유리에게 맡긴 얀코프스키는 러시아 남부 소치로 요양을 갔고 1912년 그 곳에서 사망했다.  현재도 프리모르스키 크라이에는 연해주를 개척한 공로로 러시아 정부가 세운 그의 동상이 존재한다.


장남이었던 유리 얀코프스키(Юрий Янковский)는 1912년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장을 이어갔고 1000마리의 사슴과 600마리의 말들을 기르는 대지주가 되었다. 그 역시 아버지만큼 사냥에 소질이 있어서 한반도와 만주를 돌아다니며 매우 많은 맹수들을 사냥했다. 하지만 이렇게 잘 나가던 얀코프스키 가문에도 시련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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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터졌다. 근본도 없는 빨갱이 새끼들이 나라를 뒤엎고 차르를 죽여버렸다. 백군과 적군으로 나뉜 러시아인들의 내전은 곧 극동까지 도달했다. 대대로 제정 러시아군에게 군마를 팔아 온 얀코프스키 가문은 당연히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백군을 후원했다. 하지만 1922년 적군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장악하게 되자 얀코프스키 일가는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는 부르주아지'라며 탄압의 대상에 올랐다. 가장이 된 유리 얀코프스키는 또 다른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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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어느날 새벽, 얀코프스키 일가는 그 동안 일궈온 목장과  농장, 저택등 재산을 모두 버리고 바지선에 말 60마리와 가족들, 그리고 조선인 일꾼들만을 태운 뒤 일본제국령 조선으로 망명했다. 오랜 세월 걸쳐 드나들었고 나름 조선의 문화와 사정에도 밝았던 이들에게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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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코프스키 일가는 함경북도 청진(당시 이름으로 '새신')에 상륙하였다. 뜻밖의 망명이었지만 조선 총독부는 얀코프스키 일가를 받아주었다. 안 그래도 당시 원산에는 3만명이 넘는 러시아 피난민들이 적군을 피해 도망쳐와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상하이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지만 얀코프스키 일가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에서 살기로 했다. 


하지만 당연히 정착은 쉽지 않았다. 이들은 처음 1년동안 거리에서 자신들의 소지품을 팔거나 잡역부로 일하고 경마장에서 기수로 뛰는 등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들의 마지막 재산이나 다름없었던 60마리의 종마들은  한반도의 토질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전부 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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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얀코프스키는 좌절하지 않고 만주 하얼빈으로 갔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가 동청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세운 도시로 러시아의 조차지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여기선 내전을 피해 도망쳐 온 20만명의 러시아인들이 디아스포라를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 당연히 러시아인들이 세운 학교, 은행, 신문사가 즐비했다. 그는 가지고 있던 귀금속들을 전부 처분하여 종잣돈을 만들었고 현지 러시아인 은행가에게 거액의 대출을 신청했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담보도 없는 피난민 신세였지만, 과거 아버지가 쌓아놓은 그 명성과 신용이 익히 알려져 있었터라 은행장은 그 신용을 믿고 돈을 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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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얀코프스키는 대출금으로 청진 남쪽의 온천지대를 매입했다. 그리고 고향을 본딴 새로운 목장을 세웠다. 이들은 목장에서 말과 사슴, 기타 각종 동물들을 키웠으며, 다챠(별장)을 여러개 건설하여 일종의 리조트로 만들었다. 이 리조트의 고객들은 만주와 상하이, 일본등 각지에 있는 러시아인들이었다. 유리 얀코프스키는 망명 러시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하얼빈과 상하이, 톈진등의 일간지에 리조트를 홍보하는 광고를 냈다. 청진의 자연환경은 연해주와 비슷했지만 훨씬 온화했고 (여기는 겨울에도 바다가 안 얼어붙는다.)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러시아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만 했다.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여름이 되면 청진의 얀코프스키 농장으로 와서 휴가를 보냈다. 나중에는 청진의 해안가에도 매입하여 러시아인들이 놀 수 있는 해수욕장을 세웠다. 러시아인들은 이 해변을 ‘루코모리에’(Луркоморье, 작은 만)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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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얀코프스키는 이 농장의 이름을 노비나(Novina)라고 지었다. 이는 아버지인 미하일 얀코프스키가 들려주었던 가문의 전설과 단검에 대한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노비나라는 단어 자체는 폴란드어로 '새로운 곳'이라는 의미도 있다. 


비록 폴란드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폴란드말도 거의 못했지만, 얀코프스키 일가는 자신들이 폴란드에서 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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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나는 나라를 잃은 백계 러시아인들에게 작은 실락원이 되어주었다


돌문으로 된 노비나의 정문에는 조선말로 '사나운 개가 있으니 조심하시오'라는 팻말이 박혀있었다. 그 문을 열면 과연 사납게 생긴 저먼 셰퍼드 한마리가 방문객들에게 뛰어와 재롱을 부렸다. 


푸른 한국의 산야와 황금빛 모래사장을 앞뒤로 낀 그곳에는 홀란드 암소와 점박이 사슴, 사냥개들이 뛰놀았다. 70명에 달하는 한국인 하인들과 중국인 요리사들이 모든 수발을 들어줬으며 여름이 되면 테이블에는 항상 야생화 꽃다발이 꽃혔고 밤에는 해변에서 거대한 캠프파이어를 했다. 주말이 되면 오전에 정교회 성당에서 기도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노비나 컵'이라고 명명된 체육대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극장도 있어서 러시아인들이 연극을 공연하거나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겨울이 되면 사우나에서 몸을 덮히고 발가벗은 채 얼음 물로 뛰어드는 러시아인들의 모습은 조선인들에게 매우 신기하게 보였다. 


청진의 조선인들은 얀코프스키 일가를 '야오시키, 양코스키, 혹은 양씨'라고 불렀다. 문제는 백인들은 죄다 똑같아 보여서 얀코프스키가 아닌 백인들에게도 야코시키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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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스라소니 한마리가 있었다. 유리 얀코프스키는 이 녀석이 새끼일 때 직접 잡아와서 '크시'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마치 털바퀴 고양이처럼 키웠다. 아마 과거 아버지 미하일 얀코프스키가 키웠던 표범 '삼손'을 벤치마킹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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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면 리조트는 문을 닫았지만 유럽과 미주에서 온 사냥꾼들이 찾아왔다. 얀코프스키 일가의 사냥실력은 일본인들에게도 꽤나 유명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조선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고 한반도 북부의 맹수들의 개체수를 통제 할 겸 매년 사냥허가를 내주었다. 유리 얀코프스키는 이를 이용해 일종의 사파리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유럽과 북미의 사냥꾼들을 고객으로 초대했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세상에서 가장 큰 시베리아 호랑이와 표범, 그리고 유라시아 불곰이 섞여 사는 '사냥의 낙원'이었다. 이들은 개마고원과 만주 일대를 누비며 사냥투어를 다녔다. 



그 명성 덕분에 조선 총독부의 어느 관료는 얀코프스키 일가에게 김일성을 잡아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요청을 받았던 얀코프스키 일가는 "우린 네발 달린 짐승.만 잡는다." 며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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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들어서 얀코프스키 일가는 할아버지 대와 맞먹는 부와 명성을 되찾았다. 당시에는 극히 희귀했던 쉐보레 승용차도 몰고 다녔다. 아이들의 교육도 하얼빈의 러시아인 가정교사를 초청하여 가르쳤다. 


첫째 아들 발레리 얀코프스키(Валерия Янковского)는 평양으로 유학가서 삼림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사냥에 소질이 있어서 자주 맹수사냥을 다녔다.

 

(이 시절 평양은 경성과 비슷할 정도로 잘 살았으며 일제의 전쟁물자 생산지로 공업화와 도시경제가 매우 잘 되어있었음. 그래서 망명 러시아인들은 평양으로 자식들을 유학보내 공부 시킴.) 


둘째 아들 아르세니 얀코프스키아르세니 얀코프스키 (Арсений Янковского)는 공부에는 관심없는 한량이었으나 카메라(당시 매우 비쌌음)로 사진 찍는 것을 즐겼다. 발레리와 아르세니 모두 한국어와 일본어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막내아들 유리 얀코프스키(아버지와 이름이 같음.)도 있지만 이 사람은 기록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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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쯤이 되면 조선 전역에 함경도 어딘가에 산다는 노서아인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풍문이 퍼졌다.



"그들은 거대한 나무 한그루 위에 높은 성을 짓고 산다. 성에는 높이 솟아난 탑이 있으며, 사냥꾼 '양코스키'와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양코스키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는데, 어째 그의 마음에 드는 듬직한 사윗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양코스키는 북쪽 동토(冬土)에 사는 무시무시한 용을 데릴사위로 딸과 결혼 시켰다. 양코스키 가족은 항상 호랑이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와 보드카만을 마시며 산다. 일본인들은 이 무시무시한 노서아인 가족을 쫒아내기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이 조선 땅에 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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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코프스키 일가는 식민지 조선의 지배계층인 일본인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그저 행정적 일이 필요할 때만 관청에 가는 수준이었다. 노비나에는 가끔씩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구경을 왔을 뿐, 일본인들도 얀코프스키 일가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얀코프스키 일가는 조선인들과는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그들은 대를 이어 조선인들과 우호적관계를 유지했고, 가족 모두가 러시아어만큼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주말에 연극을 공연하거나 영화를 상영할 땐 수많은 조선인들이 노비나에 놀러와서 함께 구경했다고 한다. 얀코프스키 일가는 3명의 조선인 고아들을 입양하여 직접 키우기도 했다. 


얀코프스키 일가의 회고록에는 공통적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이들이 느끼기에 조선인들은 러시아인처럼 허례허식이 없고 인간적인데다 솔직한 면이 있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제 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조선인들 역시 관대하고 공정한데다 일본인들보다 더 인간적인 얀코프스키 일가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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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조선일보 기자인 김기림은 노비나를 찾아 이곳에 대한 기행록을 써서 신문에 실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는 이 밝고 이국적인 전통으로 가득한 산자락이 알 수없는 망향의 한과 '센티멘탈한' 감성으로 젖어있다고 적었다. 그가 보기엔 러시아인들의 이런 모습이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였던 것이다.


1940년대 들어서는 2차대전의 영향으로 인해 얀코프스키 일가의 리조트에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기존의 사슴목장과 맹수사냥에 의한 수입이 훨씬 늘었기 때문에 오히려 재정적으로는 전보다 더 안정되었다. 아들 발레리도 이 시기에 독일계 여성인 일마 아에르와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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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2차대전도 막을 내렸다. 해방이 된 한반도에는 서방세계의 취재진들이 들어왔다. 전설적인 호랑이 사냥꾼의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노비나를 찾았다. 이미 1930년대 노비나를 다녀갔던 유명한 사냥꾼들의 입소문을 타고 머나먼 극동에서 독고다이로 맹수를 사냥한다는 얀코프스키 일가에 대한 이야기는 서방에서도 유명해졌다. 그는 1944년에 하얼빈의 러시아계 출판사에서 '호랑이 사냥 반세기'라는 자서전을 써서 낼 정도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1945년 10월호에 얀코프스키 가문의 이야기가 실렸을 정도다. (21세기 현재도 서방권에서 '얀코프스키'의 이름은 사냥꾼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곧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했다. 공산주의를 싫어했던 유리 얀코프스키와 달리 발레리와 아르세니는 소련군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둘은 유창한 한국어 실력 덕분에 소련군 방첩대에 입대하여 한국어 통역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런 환상도 잠시, 1947년 소련 당국은 얀코프스키 일가를 체포했다. 죄명은  그들이 조국을 배신한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이유였다.




유리 얀코프스키는 1947년 굴라그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남은 일생을 청소부로 살았고 자서전을 작성하다가 1956년 석방되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가 작성한 원고들은 결국 발레리와 아르세니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수용소의 간수들이 태워버렸다고 한다.


장남 발레리 얀코프스키 역시 굴라그로 끌려갔다. 아내였던 일마는 발레리의 아들을 낳았지만 생계가 막막해지자 결국 한반도를 떠나 독일로 돌아가서 재혼했다. 발레리는 좌절했지만 기어코 굴라그에서 탈출하고야 말았으며 스탈린 사후 해빙기가 찾아오자 마가단 지역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제정러시아 시절 시인의 시구를 읽은 죄로 끌려왔던 여자와 결혼하였다.


차남 아르세니 얀코프스키는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탈출했다. CIA 소속 정보원으로 잠깐 활동한 그는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옮겨갔고 이후 다시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정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사슴농장을 운영하여 녹용을 채취하고 판매하며 살았다.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되자 발레리는 미국으로 와서 아르세니를 찾았고 둘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만났으며 형보다 빠른 1997년에 사망했다. 


막내아들 유리 얀코프스키는 1970년대 중앙아시아를 떠돌며 살다 죽었다고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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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흘러 차남 발레리는 80년대가 되어서야 고향 땅인 연해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과거 자신 집안의 땅이었던 시데미 반도에 정착하진 못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위성도시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회고록과 가문의 일대기를 작성하면 여생을 보냈다. 


발레리가 살아생전 구술한 저서들은 귀중한 역사적 증거물이 됐다. 얀코프스키 일가의 연대기는 2009년 러시아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는 죽기 몇 년 전 한국 취재진들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유창한 함경도 사투리의 한국어를 구사했으며 '살아생전 다시 한번 한반도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국적이었으므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단 한번도 청진을 찾아가지 않았다. 발레리는 2010년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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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폴란드인에서 러시아인, 그리고 조선국적의 3대 130년이 넘는 세월에 걸친 얀코프스키 가문의 일대기는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하지만 청진 사람들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몇십년간 짧게 살다 간 노서아인들을 잊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1980년대에 얀코프스키 일가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소련에서 조사단이 왔었다. 그들은 루코모리에라고 불렸던 해변가에서 얀코프스키 일가를 기억하는 한 백발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옛날에 이 주변에 당신들처럼 생긴 하얀 사람들이 살았소. 그 시절 이 곳이 얼마나 활기찼는지 모르오. 그 때가 참 행복 했었소."










출처: 군사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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