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3년 전 앞서 성남으로 올라간 아버지를 따라 나머지 가족도 모두 상경했다. 1976년 2월이었다.
당시 성남은 서울의 빈민가와 판자촌 철거로 떠밀린 주민들이 모여 살던 도시였다. 우리 가족은 화전민의 소개집에서 성남 상대원동 꼭대기 월세집으로 옮겨갔다.
이사할 때 내 손에 들린 짐은 책가방이 아니라 철제 군용 탄통이었다. 탄통 안에는 몽키스패너와 펜치, 니퍼가 담겨 있었다.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한 도구와 부품들이었다. 당시 나는 자전거 수리에는 도가 터 있었다.
자전거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사람 힘만으로도 굴러가는 그 얇고 둥근 두 개의 바퀴라니... 페달을 밟으면 세상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어쨌든 내 출신성분은 공구로 가득했던 그날의 이삿짐만 보아도 분명했다. 시쳇말로 흙수저도 못되는 무수저. 당시 중학교도 못 다닐 정도의 집은 흔치 않았지만 우리집 형편은 그랬다. 더 이상 학교 다닐 일은 없었다.
열세 살, 월세집 뒷골목 주택에서 목걸이를 만드는 가내공장에 취직했다. 연탄화덕을 두고 빙 둘러앉아 염산을 묻힌 목걸이 재료를 연탄불 위에서 끓는 납그릇에 담가 납땜하는 일이었다.
종일 연탄가스와 기화된 납증기를 마셔야 했는데, 그러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속옷이 흠뻑 젖었다. 늘 머리가 띵하고 어질어질했는데,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유해물질인지 알지 못했다.
월급은 3천원. 쌀 한 가마니 값이 조금 안 됐다.
얼마 후엔 월급 만 원을 준다는 두 번째 목걸이 공장으로 옮겼다. 맞은편 창곡동으로 약 3~4킬로미터를 걸어 출퇴근 했는데 작업환경은 더 나빴다. 하지만 만 원이 어딘가!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해 밤 9시까지 하루 12시간을 일했다. 일이 밀리면 더 늦기도 했다. 퇴근길 9시 25분이면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던 ‘내 마음은 호수요’로 시작하는 가곡이 지금도 귀에 들린다.
점심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고 집에 와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파김치가 되어 귀가하면 엄마가 밥상을 내왔다. 엄마는 밥그릇에 얼굴을 묻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힘들었던가? 나는 자기연민에 빠질 틈이 없었다. 시장통 공중화장실을 청소하고, 휴지를 팔고 소변 10원, 대변 20원 이용료를 받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더 아팠다.
맞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던 엄마는 그런 일을 했다. 엄마는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끼니도 화장실 앞에서 때웠다. 집에서는 시멘트 포대를 털어 봉투를 접어 팔았다. 그런 엄마가 가여웠고 그런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안달했다.
열악하다는 말도 사치스럽던 공장, 장시간의 노동, 내 마음 아픈 구석이던 엄마와 동생들. 그 시절의 풍경과 그 구석구석의 냄새는 내 뼈에 새겨져 있다. 그런 건 세월이 흐른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잊히지 않는 아니 기억하려 애쓰는 삶의 경험 때문에 가진 게 없는 이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가혹할 수 있는지 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수많은 누군가의 사연을 들으면 한없이 조급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덜 가진 사람, 사회적 약자에게 우리사회는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런 이들을 아끼고 보살피는 공동체여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글이나 헬조선이 아닌 행복한 보금자리일 수 있다.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 하고 있는 일 모두 그 연장선에 있다. 그 일들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어서 치열할 수밖에 없고 포기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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