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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 이한솔

만남의광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12.28 03: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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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 이한솔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재미없고 선택지도 별로 없는 이번 대선
진보정당에게는 새로운 매력을 어필할 기회
조력자와 주인공의 역할을 바꿔보는 사고가 필요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초등학교 다닐 때 썼던 일기보다도 못한 생각이라 부끄럽지만, 처음 기고를 요청받았을 때부터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나는 10년 전 소수정당을 응원해달라며 후원금을 소액 받아 갔던 친구가 지금 진보당에 소속되어 있기에 이 당이 그 당인지를 아는 수준의 문외한이기 때문에, ‘한국사회와 진보당에 바란다’의 주제에서 멋지게 논할 위치가 되지 않는다. 연재의 특성상 다른 필자들이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줄 것이기에, 그냥 담백하게 ‘순한맛 재미’를 밀어보고자 한다.

코로나 등의 재난으로 인해 취약계층의 삶은 더욱 궁지에 몰리고 불평등의 격차는 날로 심해지는데, 고작 재미나 찾고 있으니 비참한 감정이 크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더라도 이번 대선은 기대감이 하나도 생기지 않는다. 촛불을 통해 정권도 교체했지만, 정치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호하고 바꿔내는 역할을 전혀 해내지 못했다. 유력 대선 후보들은 정책선거보다는 비호감도로 경쟁하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지난 5년 동안 못했던 일을 갑자기 해낼 리도 없다. 원인을 찾자면 거대양당에 있겠지만, 정치에 대한 불신은 소수정당에게도 여파가 미칠 수밖에 없다. 불신이 너무나 깊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의 눈길이라도 되돌려놓는 작업이 필요한데, 마지노선에서 찾을 수 있는 타협점이 재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재미’는 깔깔거리면서 웃을 수 있는 개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도 재미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서사가 매력적인지가 중요할 것이고, 미장센이 중요할 수도 있고, 진부하지 않은 신선함에 매혹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재미의 시장에서도 자극적인 콘텐츠가 주류가 되고 있지만, 매운맛에 지쳐 순한맛을 찾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자면, 정치, 특히 이번 대선은 너무나 재미가 없다. 일단 선택지가 별로 없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미장센부터 별로이다. 주요 대선 후보들이 현충원 참배하는 사진을 보고 있자면, 젠더 밸런스가 붕괴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물학적 나이도 전반적으로 올드하다. 원칙이니 소년공이니 정치의 서사는 나름대로 갖췄지만, 배우의 연기력과 대사가 형편없어서 스토리가 아까울 지경이다. 세계관은 마블 유니버스로 설정해두고, 막장 드라마의 연기와 대본을 첨가한 느낌이랄까. 신선함은 진작에 실종되었다. (그래서 90년대 드라마 <모래시계> 검사 이미지의 정치인이 잘나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재미의 요소가 다채롭지 못하니 자극적이고 원초직인 재미를 추구하는 정치인이 이슈를 휩쓸기도 했다. 결국 인터넷 정치 커뮤니티에 빠져 있거나 일상이 무료한 회사 정규직 부장님 정도에서 정치의 재미가 마감되었다. 자극적인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대선인 것이다.

유권자들이 정치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재미 요소를 채워줄 필요가 있다. 혹자처럼 ‘에펨코리아’ 등의 인터넷 커뮤니티의 단어와 문화를 답습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갤럽’이 10월 첫 주에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20대 여성 무당층의 비율은 50%를 육박할만큼, 현재의 자극적인 콘텐츠에 지쳐버린 사람들이 많다. 엽기 떡볶이가 유행을 탔다고 해서,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사람들을 갑자기 엽떡을 먹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역설적이지만 소수정당 및 진보정당에게는 이번 대선이 새로운 매력을 어필할 기회가 주어진 것 같기도 하다.

“앞길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단지 부정적일 뿐이라면 그나마 대비라도 하죠. 엄청 불안하고 막막한데 아예 앞이 안 보이면, 아무 생각도 안 들고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 있어요. 솔직히 돈 벌어서 아이패드 사고 기어코 카페 가서 커피 마시는 것도, 아예 앞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선택하는 것 같아요.”

연초에 <허락되지 않은 내일>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전국 각지의 청년들을 인터뷰하며 청년 세대 내 불평등의 현장을 담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어떤 청년의 이야기가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YOLO’를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맥락은 불평등에 가까웠고, 인터뷰의 끝은 묘하게 ‘즐기는 삶’으로 수렴되었다.

80년대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는 어떤 분위기였는지 잘 모르겠다. 장례식장에서 건배를 하지 않듯이, 당시에는 시국이 시국인지라 재밌는 정치를 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21년의 유권자를 만나는 과정에서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내일은 허락되지 않은 듯해도, 오늘 충분히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불평등을 해결하고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대원칙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엄근진’(‘엄격하다’, ‘근엄하다’, ‘진지하다’)의 이미지 말고도 참신하고 즐길 거리가 있는 정치가 오히려 진부하지 않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서사를 갖춘 보통 시민의 목소리를 통해 진정성 있는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이 진보정당의 매력이었다. 2030 여성, 비정규직∙프리랜서∙산재 위험∙피해 노동자, 자가소유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세입자 등 말해지지 않은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 너무 어둡거나 무겁지는 않게,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선거를 기획해나갔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매력적인 요소를 극대화하는 정치의 미장센까지도 멋지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솔직히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잘 안다. 진지한 사람이 갑자기 재밌어지기도 어렵고, 풍자라는게 그냥 말하는 것보다 난이도가 몇 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에서도 매일 같이 노력하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긴 기획이 손에 꼽는다. 그럼에도 가능성은 분명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에너지 넘치고 톡톡 튀는 기획력을 가진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이 진보정당에도 정말 많이 활동 중이다. 캠프 내에서 적당히 아이디어 던지고 디자인 맡기고 머릿수 채우라는 수준을 넘어서, 이들에게 확실한 권한을 주는 것도 방법이겠다. 대선이라는 짧고도 굵은 판에서, 기성의 조직력과 자원이 새로운 플레이어와 만난다면 충분한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지난 시기의 조력자와 주인공의 역할을 바꿔보는 사고가 우선 필요한 것이다.

훈수 두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선택할 사람이 없는 선거나 더 싫은 사람을 떨어뜨리기 위한 선거보다, 궁금하고 호감이 가고 다음 회차가 기대되는 선거를 진보정당에서라도 만들어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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