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게 새로운 집착거리가 생겼다. 그때까지 여자에게 별 관심 없던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여름 휴가를 보내던 어느 때 우유를 짜고 있던 소녀와 짧은 조우가 있었다. 소녀가 히틀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도망치다 우유를 막 담아놓은 큰 우유통을 쓰러트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히틀러는 구스틀(히틀러의 친우)과 란트슈트라세를 산책하다 눈에 띄는 여자와 마주쳤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금발의 쪽찐 머리를 한 젊은 여성이었다. 히틀러는 흥분하여 친구의 손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알아둬. 난 지금 사랑에 빠졌어."

그녀의 이름은 슈테파니로 우어파르에 살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녀에겐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으나 "말 한 마디 하지 않더라도 모든 게 잘 될 것이다."라고 털어 놓았다. 히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의사소통은 눈빛 교환만으로 충분했다. 히틀러는 여기에 대해서도 부연했다. "이런 것들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내게 지금 있는 것이 그녀에게도 있다."

구스틀은 슈테파니와 그녀의 어머니 앞에 히틀러를 드러낼 것을 재촉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했다. 히틀러의 직업은 현재 학생 신분의 미술학도가 아닌 단순한 백수였다. 히틀러는 독일과 북유럽의 신화에 푹 빠져 있었고 이성과 관렪여 낭만적으로 기사도적인 관념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젊은 지크프리드를 평범하게 소개시켜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슈테파니는 히틀러의 존재를 계속 무시했고 히틀러는 그녀가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실제론 슈테파니는 히틀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을뿐이며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몰랐고 그녀는 곧 하급 장교와의 결혼을 약속한 상태였다.

히틀러는 낙담해 더는 이런 관계를 참아낼 수 없다고 맹세했다. 그는 다리에서 다뉴브 강에 뛰어들 것을 결심했다. 히틀러의 생각은 슈테파니와 동반자살 합의를 하고 반드시 그녀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구스틀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게 남길 말을 준비했고 그가 비극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도록 세밀한 계획도 짰다.

이 계획이 성공했다면 미술가의 앞날에 종지부를 찍었을 지도 모른다. 실패했다면 또 다른 고통이 따르겠으나 즐거웠던 환상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슈테파니의 건은 히틀러에게서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히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