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구르미엄마 이것도 보실??앱에서 작성

파비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5.03.12 01:05:56
조회 159 추천 0 댓글 16
														

2bbcde32e4c1219960bac1e75b83746f71e0e5ebdddd60791da16889a6152df37d360c5ba592fe8d383636296927ecad


완결 내고 썼던 에세이인데

십덕동아리 회지에 실으려고 썼던거임

4



창작에 관하여

0.

지난 9월,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이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 만화를 영상화한 영화 『룩 백』을 봤다. 난 미디어 믹스가 대개 실패한다고 믿는데, 이 영화는 꽤 잘 뽑혔다는 생각을 했다. 감독이 원작자의 미학을 꽤나 존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어 펀치』 시절부터 후지모토 타츠키의 작품 세계를 따라간 내게는 흡족한 일이었다. 만화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던 장면은 역시 후반부보단 초반부였다. 쿄모토가 죽고 나서 후지노가 그녀와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장면보다는, 후지노가 방에 틀어박혀 그림을 연습하는 장면이 마음에 더 와닿았다. 어째서 그랬을까.


1.

2024년, 내 두 번째 웹소설을 완결 냈다. 200화가 넘는, 책으로 환산하면 일고여덟 권 정도 분량의 장편이다. 2022년 1학기에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니, 기간으로 따지면 3년이 걸렸다. 그렇다고 3년 내내 글을 썼단 소리는 아니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22년 당시에는 반년 조금 안 되는 동안 소설을 집필하다가 펜을 꺾었고, 23년도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며, 24년에 이르러서야 여러 이유와 모종의 계기로 펜을 다시 집어 약 9개월 만에 글을 완성했다. 그러니까 사실 글에 충실히 집중했던 건 일 년에서 일 년 반 남짓한 시간이다. 그러나 3년이란 기간 한가운데 떡하니 박혀 있는 공백의 1년을 헛되이 보냈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 시절에 읽은 책과 거쳐 간 사유가 밑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2024년의 나는 결코 지금과 같은 형태의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후련함이나 성취감과는 별개로 사실 내 글을 남들 앞에 썩 자랑스럽게 내보이지는 못한다. 결국 웹소설이란 장르가 한국의 라노벨에 불과하다는 찝찝함도 있고, 남들이 자기 일기장을 볼 때 느끼는 창피와 같은 종류의 수치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에세이를 쓰고 있는 현시점을 기준으로 성적도 애매한 수준이다. 난 본작이 전작보다 모든 측면에서 뚜렷하게 우수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본작의 성적이 전작보다 낫긴 낫지만 안타깝게도 기대했던 만큼은 미치지 못했다.

이는 내가 웹소설의 주류 문법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핵심은 웹소설이 연재물이라는 것이고, 드라마든 웹툰이든 연재물의 미덕은 사람들이 다음 화를 보지 않고선 견딜 수 없게 유혹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웹소설 작가들은 흔히 자극적인 소재, 표지, 제목, 소개글 등을 사용해 이른바 ‘어그로’를 끄는 전략을 채택한다. 하지만 내 스타일은 포장지도, 내용물도 그런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다. 또 하나 변명하자면 플랫폼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나는 편당 결제가 아닌 정액제를 채택한 플랫폼에서 작품을 연재하는데, 이는 독자도 작가도 한 편 한 편과 그들이 이루는 전체의 충실함보다는 휙휙 넘길 수 있는 인스턴트한 도파민 분출에 치중한다는 의미다. 어설프게 비유하자면 나는 식당에서 팔 요리를 길거리 노점에서 팔고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손님도 적고 수익도 낮다(내 태도가 오만하게 비추어질 문장 같아서 부끄럽다. 수준의 차이를 뜻하는 게 아니라 수요의 형태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물론 순수하게 내 이야기꾼으로서의 실력이 달리는 까닭도 있을 것이다. 딱히 이것까지 변명할 생각은 없다. 이 에세이도 내 자기변호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니 내 소설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어쨌든 결과물과는 무관하게 3년이라는 기간을 걸쳐 하나의 작품을 새로이 완성하고 나니 감회가 새롭다. 이 에세이에서는 내가 여태껏 글을 쓰면서, 그리고 쓰고 나서 생각한 바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2.

어릴 적, 나는 코끼리를 만진 맹인들의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 있다. 내가 본 것은 어린이용 동화책으로 기억하는데,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열반경』이라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우화라고 한다. 와전된 부분이 많아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충 설명하자면 골자는 이렇다. 옛날에 인도의 왕이 맹인 여럿에게 코끼리의 서로 다른 부위를 만지게 하고, 각자 코끼리가 어떤 동물인지 설명해보라고 명한다. 가장 먼저 상아를 만진 맹인이 코끼리가 무와 같다고 말한다. 그다음 머리를 만진 맹인은 코끼리가 돌과 같다고 말한다. 귀를 만진 맹인은 부채 같다고, 다리를 만진 맹인은 절구통 같다고, 등을 만진 맹인은 들마루 같다고, 배를 만진 맹인은 큰 항아리 같다고, 꼬리를 만진 맹인은 동아줄 같다고 우겼다. 마지막으로 코를 만진 맹인은 모두가 틀렸다고, 코끼리가 뱀 같은 동물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우화를 아주 좋아한다. 진리에 관한 완벽한 메타포다. 맹인들이 만진 게 모두 다른 코끼리였나? 그렇지 않다. 이 상황을 현대적으로 바꿔보자. 친구 여러 명이 동물원에 가서 코끼리를 본다. 각자 코끼리 사진을 찍어 채팅방에서 자기가 찍은 사진을 공유한다. 누군가는 정면에서 코끼리의 머리를 찍었고, 누군가는 코끼리의 옆에서 몸통을 찍었고, 누군가는 뒤에서 코끼리의 엉덩이를 찍었다. 모든 사진이 다르지만, 그들이 본 모든 것은 동일한 코끼리다. 다만 각자가 서 있는 위치가 다르므로, 코끼리가 현상하는 각도가 다를 뿐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단어는 ‘위치’다. 진리에 관한 발언은 진리 자체보다도 발화자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표명한다.

과연 동화책에 실릴 법한 재미있고 교훈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로 무엇보다 재미있는 부분은 마지막에 있다. 맹인들이 서로 자기가 옳다며 우기는 광경을 보고, 왕이 크게 웃는다. 나는 이 아이러니에 그만 탄식하고 만다. 아, 오만하고 어리석은 왕이여. 너는 네가 눈을 두 개 가졌을 뿐인 장님임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천적 불구로 태어남을 몰랐단 말인가?


3.

하루는 유튜브 쇼츠를 보다가 아인슈타인 십자가에 관한 영상을 봤다. 천체의 중력 때문에 후방의 빛이 휘어져 보이는 중력 렌즈란 효과가 있는데, 은하 뒤에 놓인 퀘이사가 은하의 중력 때문에 십자가 형태로 4개로 보이는 것을 아인슈타인 십자가라고 한다. 영상에 따르면 살아생전 아인슈타인이 이론적으로 예측한 이 현상을 인류는 아인슈타인 사후 30년 후에야 관측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댓글에선 아인슈타인이 관측도 없이 머리만으로 현상을 예측했다며 대단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나는 그 댓글을 읽으며 신화와 과학의 관계를 떠올렸다.

나는 신화와 과학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정확히는 과학이 신화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이름을 갖추게 된 신화의 한 갈래라고 여긴다. 옛적, 고대인들은 자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도입해 세계를 설명했다. 그들이 신을 가정한 것과 세계를 이루는 사원소를 가정한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전자는 현상을 충분히 잘 설명하지 못했기에 쇠퇴했고, 후자는 원자론이란 형태로 변형되어 살아남았다. 그리고 틀린 학설이라는 카테고리로 여전히 과학책 속에서 살아남아 과학으로 분류된다. 과거 헤르메스주의자들이 금을 연성하고자 실험한 일이 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던가? 화학과 연금술의 구분은 살아남은 자와 살아남지 못한 자의 관계와 다름없다.

누군가는 이러한 주장이 틀렸다고, 신화는 합리적인 체계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학과 본질적으로 구분된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런데 함정은 거기에 있다. 합리 역시 하나의 신이자 종교라는 것. 내가 신화와 과학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할 때, 이것은 단순히 두 개념이 세계를 설명하는 가설 혹은 이론이라는 형식적 측면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여기서 짚고자 하는 것은 앎과 믿음의 관계다. 지식은 의심하지 않기로 합의한 믿음이다. 예컨대 사과 한 개를 집고 나서 한 개를 더 집으면, 우리는 손에 사과 두 개가 들려 있는 현상을 경험한다. 우리가 ‘1+1=2’가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우리가 ‘123+456=579’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사과 백이십삼 개와 사과 사백오십육 개를 세어서 사과 오백칠십구 개를 확인하지 않는다. 합리의 체계 속에서 뛰어논 결과가 여전히 합리의 영역에 속함을 의심하지 않기에 우리는 그것이 여전히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자기가 아무리 진리를 알고 있다 확신하더라도 그 근원을 쫓아 파헤치다 보면 결국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토대를 맞닥뜨린다. 인지의 원리가 그렇다. 언제나 가장 근원에서 기초하는 것은 결국 믿음이다. 사실이 세계관을 이룰 때, 이는 실상 믿음이 세계관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장님의 발언은 틀리지 않았다. 각자의 우주에서 코끼리는 부채고, 밧줄이고, 기둥이다.


4.

창세기의 인물 아브라함은 어느 날 신의 음성을 듣는다.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의 산에 올라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이 충격적인 지시를 들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을까? 그는 실제로 신이 명한 대로 한다. 나귀에 장작을 올리고, 아들과 두 종을 데리고 신이 명한 산으로 가서, 아들을 제단에 묶는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신의 뜻에 따라 기어이 아들을 칼로 잡으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행동을 막는다. 그리고 신은 시험에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고 그의 후손이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는 축복을 내린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당연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부분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여 신에게 공물로 올리려 한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아닌가? 아들 하나쯤이야 신에게 바칠 수 있을 만큼 그에게 이삭이 보잘것없는 존재였을까? 그렇지 않다. 이삭은 그가 99세란 나이에 부인 사라에게서 얻은 둘째 아들이었다. 첫째 아들은 몸종 하갈로부터 얻은 이스마엘인데, 사라의 미움을 산 모자가 광야로 쫓겨난 탓에 사실상 이삭이 그의 독자라고 할 수 있었다. 늘그막에 얻은 귀한 자식인데다 일찍이 신에게서 점지받은 예언의 아이인 터라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무척 아꼈노라고 전해진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했노란 사실을 알면 이야기는 더욱 미궁에 빠지게 된다. 사랑하는 아들을 잡아 바친다니, 아브라함이 미치광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흔히 공포 영화나 공포 게임 같은 창작물에서는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를 작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앙의 원흉으로 지목하며, 그들을 마구잡이로 사람 잡아 죽이는 살인마 따위로 그리고는 한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러한 캐릭터들의 원형이었을까? 그는 도덕과 윤리를 모르는 사이코패스였을까? 아니다. 아브라함이 신에게 아들을 바치는 행위를 떳떳하게 여기지 않았음이 성경에서 은연중에 드러난다. 창세기 22장 5절, 아브라함은 동행한 종들에게 여기서 나귀와 함께 기다리고 있으라고, 아들과 단둘이 예배를 드린 후 돌아오겠노라고 말한다. 분명 종들의 시선을 의식한 명령이었다. 22장 7절과 8절, 이삭이 그에게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냐고 묻자 아브라함은 신이 그를 위해 친히 준비하리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가 광신도인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두고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 『공포와 전율』에서 아브라함이 윤리를 넘어 신과의 절대적 관계로 비약했음을 예찬한다. 그가 ‘믿음의 도약’을 통해 ‘보편적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수행함으로써 진정한 신앙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무한한 자기 포기를 통해, ‘믿음의 기사’가 되었다는 것.

하지만 나는 키르케고르의 초점이 약간 어긋났다고 본다. 그의 신앙심이 너무나 큰 중력을 발휘하여 사유의 흐름을 핵심으로 이끌지 못했다. 핵심은 ‘신’에 있지 않다. ‘신에게’ 도약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도약’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위치의 건너뜀, 어쩌면 무한한 심연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위치를 향한 무지의 도약.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표현과 달리 이것은 무한한 자기 포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는 자기를 끝까지 밀고 나간 행위다. 아브라함은 윤리를 저버린 게 아니라 새로운 윤리를, 그가 옳다고 믿은 세계관을 선택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아브라함은 기존의 자기를 파괴함으로써 오히려 자기를 새로이 창조한다. 이를 아브라함이 신의 노예가 되었다던가 신에게 복속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을 수용한 것은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아니라 적극적인 받아들임이었다. 강압이 아닌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복종이었다. 키르케고르도 분명 이런 주체성을 포착한 것일 테지만, 그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선택보다 아브라함의 신앙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내게 아브라함의 신앙심은 상황에 앞서 주어진 하나의 전제일 뿐이다. 이 일화에서 내게 더 중요한 것은 ‘신이 아들보다 중요하다’는 코끼리가 아니라 코끼리를 보는 아브라함의 위치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다’는 행위 자체다. 칼을 아들의 목에 들이밀 때, 아브라함은 천사가 내려와 아들의 목숨을 구하리란 미래를 몰랐다. 신이 그의 행위에 기꺼워하며 축복을 내리리란 사실도 몰랐다. 그러므로 그가 아들을 바치는 행위는, 아브라함이 거기에 아들의 목숨 이상의 무게가 달렸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로써 ‘바친다’는 아들의 죽음과 신의 명령에 불복종이란 선택지를 저울에 올려 후자에 더 큰 무게를 부여하는 행위가 된다. 이삭의 번제는 아브라함의 신앙에 아들 이상의 가치를 창조한다. 따라서 ‘바친다’, 그 제의는 증명이며, 기원이다. 그 이후에 아브라함이 신에게 받은 축복은 털끝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5.

이쯤 되면 내가 종교쟁이라서 자신의 종교와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이 글을 쓴 건가 싶겠지만, 아니다. 앞서 열심히 성경 이야기를 떠들었으나 놀랍게도 나는 무신론자다. 나는 인격신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과학적이라기보다는 부정신학적인 견해에서 근거한다). 사실 단순히 무신론자라고 단정 짓기도 복잡하다. 나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는 신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무신론자이지만, 비인격적 신의 존재는 알 수 없다고 믿는 점에서 불가지론자고, 스피노자처럼 신을 세계(자연)와 동일시하는 입장에는 꽤나 동의한다. 나는 결국 신이란 관념을 다른 형이상학적 용어들처럼 갖가지 의미가 덕지덕지 붙은 다의어로 이해하고, 그렇기에 신이란 관념이 발명되었다고 여기므로 몇몇 측면에서 신의 존재는 인정하고 논의할 수 있다. (실은 이 입장도 완벽하지는 않다. 고백하건대 나는 신에 대한 내 견해를 확신할 만큼 신학에 조예가 깊지 않다.)

마찬가지로 나는 영혼이 있다고 여기지만, 종교인들이 믿는 것과 같은 방식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내게 영혼은 실체가 아니다. 생전의 업보에 따라 천국에 들거나 지옥에 떨어지거나 환생하는 실체를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죽음은 단지 생명 활동의 정지일 뿐, 나는 종교에서 주장하는 사후세계나 초현실적인 정신체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게 영혼이란 무엇인가? 자아나 의식보다 본질적인 ‘나’. 누적된 경험과 기억으로 구성된 상징계. 개개인은 각자의 역사성으로 인해 고유한 영혼을 구축하며, 서로 다른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듯이 내가 생각하는 영혼은 종교적 관점에서의 영혼과 제법 다르다. 말하자면 나는 사전에서 ‘영혼’을 정의한 부분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한 것이다. 발견과 명명을 통해 나는 영혼을 발명했다. 영혼의 이런 정의는 인간의 개별성을 설명해준다. 우리는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산다는 점을. 무지와 고독은 인간 실존의 근원적 조건이다. 이 문장은 내게 난데없이 등대에 갇힌 상황으로 메타포 된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외따로이 서 있는 등대와 오갈 데 없이 감금된 등대지기. 검고 어두운 밤바다 건너편에서 희미한 불빛이 비쳐 오는데, 그 빛이 수평선 너머에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 있음을 짐작게 한다. 고독은 개별성에 관한 불안이므로 나는 내심 반가워하며 등댓불을 깜빡여 말을 건네려 한다. 문제는 내가 뜻하는 바를 어떻게 저쪽에 전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저쪽에서 전하는 바를 내가 무슨 수로 이해할 것인가이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방법은 등대의 조명을 깜빡이는 법뿐이기에 우리는 언어라는 합의에 이를 수 없다.

내가 사람 사이의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와 문화는 여러 사람 간에 공유되는 삶의 무대이므로 동일한 문화권의 사람은 자연스럽게 유사한 상징계를 발달시킨다. 인간이라는 종의 생물적 공통성과 상통하는 삶의 양식 등도 인간의 영혼을 비슷한 형상으로 빚어낸다. 따라서 사람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문제없이 사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의 의미란 그것이 내가 지닌 의미의 관계망 속에서, 세계관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이기에 동일하지 않은 영혼을 가진 우리는 분명 어디선가 코끼리에 관한 상이한 의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비교하지 않는 이상 수면 아래 숨어 있으므로 대개의 경우 드러나지 않고, 우리는 서로서로 이해한다는 착각 속에서 연극을 이어가다 어느 날 돌연 그 괴리로 인한 파국을 맞이한다. 종종 그 파국이 어쩌다 발생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말이다.


6.

후지모토 타츠키의 『룩 백』은 만화를 그리는 두 소녀, 후지노와 쿄모토에 관한 이야기다. 초등학생 4학년인 후지노는 학교 신문에 네 컷 만화를 연재하는 꼬마 만화가다. 만화로 인기를 얻고 자존감을 채우던 후지노에게 어느 날 쿄모토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한다. 프로 수준이라는 말을 듣는 쿄모토의 그림에 비하면 후지노의 실력은 너무나 평범하다. 쿄모토에게 자극받은 후지노는 즉시 그림 관련 서적을 구입해 그날부터 그림을 연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후지모토 타츠키는 열네 컷 동안 후지노가 비슷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지노는 독자에게 늘 등만 보이고 있지만, 후지노의 배경에선 세월이 흘러가고, 선생이 수업하고, 친구들이 떠들고, 가족들이 TV를 본다. 열네 컷 후, 후지노의 친구가 묻는다. “있지… 우리들 벌써 6학년이다? 내년이면 중학생이야. 중학교 가서도 그림 그리게?” 후지노에게 닥친 그 질문은 비단 후지노만의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창작자에게 한 번씩은 닥쳐오는 질문이다. 창작이 늘 즐겁기만 한 작업이 아닌 까닭이다.

물론 최초의 창작은 늘 즐거움에서 출발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작업은 재미있다. 재미있게 느끼지 않았다면 애초에 창작자가 탄생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창작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작품을 위해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소위 ‘창작의 고통’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즐거움은 특별한 감정이고, 특별함은 영속할 수 없는 법이기에 재미 또한 일시적이다. 머리를 도취시킨 환희가 가라앉고 나면 잡다한 번거로움만이 남는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창작자는 숨 막히는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렇게 수십 시간 걸려 완성한 그림을, 혹은 수년에 걸쳐 완성한 글을 감상자는 단 몇 초 만에, 단 몇 시간 만에 감상한다. 터무니없는 시간의 교환비다.

후지노 역시 이를 인지한다. 교실에 혼자 남아 기계적으로 펜을 움직이는 후지노에게, 그녀의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림 그리는 건 슬슬 졸업하는 편이 좋아…. 후지노 너, 우리랑 놀아 주지도 않고, 같이 있어도 그림 그리느라 얘기도 안 하잖아…. 게다가…. 중학교에서 그림 그리고 있으면… 다른 애들이 오타쿠라고 싫어할걸…?” 집에 돌아오자, 방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는 후지노에게 언니가 이렇게 말한다. “엄마랑 아빠가 말씀을 안 하실 뿐이지, 너 엄청 걱정하셔.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고 시험 성적은 처참하니까.” 사람에게 시간은 일종의 재화이기도 한 까닭에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저버린 성적과 교우 관계는 그녀를 흔들리게 하는 기회비용이 된다. 그리하여 후지노는 결국 만화 그리기를 관둔다. 친구에게 건네는 “야, 오늘 말이야. 학교 끝나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지 않을래?”라는 대사 이후 후지노가 친구와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하교하고, 언니와 가라테 도장에 다니고, 가족과 단란하게 TV를 시청하는 컷은 그녀가 그림을 위해 포기했던 모든 것들이다.

3년간 글을 쓰면서, 내게도 마찬가지로 경제성이 문제가 되었다. 글쓰기가 즐겁기만 한 과정이 아니라면, 글을 완성하는 일이 고통을 감수할 만한 적절한 보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경험상 이 질문의 답은 부정적이었다. 금전적 보상? 내가 1년에 걸쳐 완성한 전작은 내게 최저 시급에 해당하는 금액도 벌어오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 내가 업계의 유행을 따라 말초적 재미를 추구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창작의 본질을 황금이나 도파민에 두었다면 다른 작가들과 동일한 전략을 택했을 터다. 내가 글을 완성한 이후의 결과에 글쓰기의 목적을 두지 않았다면, 나는 나의 글에, 창작에, 예술에 무엇을 기대하며 괴로움을 감수했는가?


7.

한때 나는 예술이 불멸로 이르는 길이라고 여겼다. 아킬레우스가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것은 명성을 통한 불멸에 이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이 믿음이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보라. 결국 명성을 통해 전래하는 것은 단편적이고 왜곡되기 쉬운 이미지일 뿐, 개인은 자기가 아닌 그 이미지가 남들의 혓바닥에서 놀아나는 꼴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술을 통해 변화를 일으킨다는 욕망이 창작의 원동력인가? 예술은 세계와 타자에 내 힘을 투사하고자 하는 욕망의 수단인가? 어느 정도는 맞다. 하지만 이 역시 창작의 본질은 아니다. 힘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영역이다. 왜냐하면 그 논리에 따르면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작품에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프란츠 카프카의 유언집행인인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작품을 모두 불태웠다면, 『성』과 『소송』과 『실종자』는 무가치한 작품이 되는가?

이 질문은 ‘가치’의 정의를 무엇이라 여기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것이다(앞서 말한 세계관과 위치에 관한 또 하나의 예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카프카의 유언에서 답을 찾겠다. 내가 카프카는 아니므로 당사자의 의도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자기 작품을 불태우고자 한 카프카의 결정을 이렇게 이해한다. 자신의 사후에 작품이 존속하는지 여부는 창작의 가치와 무관하다는 것. 창작의 가치는 작품 자체보다도 내가 그 작품을 창조하길 원했으며, 그것을 행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 카프카는 이미 다 이루었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원고를 불사르길 바란 것이 아닐까?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등대지기가 불을 밝히는 일. 예술은 틀림없이 소통의 한 가지 형식이다.


8.

인간 실존의 또 다른 근본적 조건은 무력감, 즉 한계 지어짐의 인식이다. 흔히 신을 전지전능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대척점에 선 인간의 본질이 유한한 앎과 유한한 능력이란 점을 함의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치면 흔히 신에게 나의 적을 없애달라, 횡액을 끝내달라고 기도하고 심지어는 아무런 고난이 없는 시절조차도 돈 많이 벌게 해 달라, 잘 먹고 잘살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지적했다시피 기도의 기능은 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이 이를 훌륭히 반영한다. “주여, 제게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기도의 본질은 신이란 힘을 멋대로 휘두르려는 시도가 아니라, 신이란 거울에 비추어 자신을 반추하고 결단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인 내게도 기도는 유효하다. 기도는 탄원이 아닌 기원이다. 동양권에서 새해나 칠월 칠석 같은 명절 때 하늘로 풍등을 날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늘은 무심하므로 풍등에 담은 마음은 하늘을 움직일 수 없다. 다만 풍등을 날리고 나면, 날리기 전과 달라진 개개인이 남는다. 그렇다, ‘도약’이다.


9.

보이저 1호는 인류가 만든 물건 중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 탐사선이다. 목성과 토성을 관측하고자 발사된 이 탐사선은 가능한 한 전력을 아끼기 위해 각종 장비를 작동 중지시키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광활한 우주 공간을 유영하고 있다.

이 탐사선은 골든 레코드라는 LP 판이 실린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에게 전할 인류의 메시지를 담아둔 음반이다. 지구의 여러 소리, 55가지 언어의 인사말, 몇 편의 시 등이 담겨 있다고 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의 편지도 실려 있다는데, 편지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면 이렇다.

This is a present from a small, distant world, a token of our sounds, our science, our images, our music, our thoughts and our feelings. We are attempting to survive our time so we may live into yours.

외계인에게 쓴 편지라니, 어찌나 가상한가? 또한 어찌나 순진한가? 우스운 이야기다. 일국의 지도자가, 그것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이 존재조차 증명되지 않은 가상의 생물에게 진지하게 편지를 쓰고 있는 꼴을 상상하면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이 우주 어딘가에 인류 외의 지적 생명체가 실존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우습기는 매한가지다. 골든 레코드에 실린 메시지가 외계 문명에 전해지는 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반 백년도 넘기지 못하는 수명으로 외우주까지 여행을 견딜 수 있는가는 고사하고, 보이저호가 외계 행성에 도착하기 전에 지구나 인류가 멸망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혹은 보이저호가 외계 행성의 대기권에서 불타 소멸할 수도, 오지에 처박혀 우주로부터 온 쓰레기로 남을지도 모른다. 나는 편지가 전송되길 실패하는 무수한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천운이 따라 이 모든 경우를 피해 가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유리병 편지가 성공적으로 수신자의 손에 들어간들, 과연 그 수신자가 편지의 내용을 이해할 수나 있을까? 편지를 수신한 외계인이 편지에 실린 본래 의미를 해석해낼 수는 있냐는 말이다. 우주적 법칙에 기반한 설명서를 동봉했다고는 하지만, 인류와 전혀 다른 사회를, 문화를, 역사성을, 상징계를, 영혼을 가진 타자가 인류의 문법을 이해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하늘에서 떨어진 황금빛 원판을 주운 외계인은 구석기 시대의 유인원에 불과할 수도, 눈이나 귀란 감각 기관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그로 인해 정신의 구조 자체가 인류와 상이할 수도 있다. 인류와 다른 상징체계를 가진 외계 종족이 골든 레코드에 수록된 보들레르의 시를 공격적인 의사 표명으로, 예컨대 전쟁 선포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10.

고독이 야기하는 불안은 실존의 불안이다. 나의 ‘위치’ 근처에 다른 이가 없기에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 내가 작년 회지에 실은 에세이에서 지음의 존재를 갈망한 것도 결국 이런 고독의 해소를 원한 것이었다.

어쩌면 예술이 이를 가능케 해주리라 기대한 적이 있다. 몇 년간 글을 쓰면서 글쓰기는 영혼을 찍어내는 행위란 걸 느꼈다. 이는 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모든 창작에는 창작자의 영혼이 담긴다. 도장을 찍거나 프린트하듯 영혼 전체를 복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품에 창작자의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는 의미다. 코끼리를 밧줄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코끼리가 기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예술이 곧 소통의 한 형식일 때 작품은 소통의 매개체요, 영혼의 메시지가 되므로 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이미 무덤에 안장된 과거의 수없는 시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을 떠올리곤 했다. 아, 얼마나 유치한 망상인가. 환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니 죽은 자는 죽은 자일 뿐, 내가 떠올린 건 결국 작품이란 단편을 통해 본 작가의 이미지에 불과함을, 나의 감상은 상호적인 관계가 아니라 일방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앞서 설명했듯 나는 온전한 이해란 이해하려는 자의 지능이나 의욕을 떠나 처음부터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외계인은 타자의 한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이 소통 형식임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의사소통이라는 자체가 근본적으로 아무리 애쓴들 완전한 이해를 수반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해란 맥락 가운데서 의미의 위치를 결정하는 일이고 따라서 완전한 이해는 동일한 영혼을 전제로 요구하기에 등대지기는 결코 바다 건너편의 등대지기와 지음일 수 없다. 제한적 앎을 성취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타자와 완벽한 동일자가 될 수 없다.

라인홀드 니부어가 기도했듯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조건이 유한과 고독임을 잊어선 안 된다. 보상을 기대해서도, 환상에 젖어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기다려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전공과 일말의 관련도 없는 글쓰기에, 몇 년이란 시간을 박아넣어 최저시급은 벌어낼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활자를 싸지르기에 열중한 데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11.

사실 지미 카터 대통령도 편지를 쓰면서 자기가 쓰는 글이 실제로 외계인에게 닿으리라 믿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 순진해 빠진 작자는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보이저호에 골든 레코드를 집어넣은 나사의 연구원들은 세기의 지성들이 모인 집단이지, 존재조차 불확실한 외계인과 소통하겠다는 일념으로 8억 6500만 달러의 예산이 걸린 프로젝트에 장난을 칠 철없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우주선을 발사하는 데는 나사 하나조차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던가? 1986년, 미국의 두 번째 우주왕복선인 챌린저호는 열 번째 임무에서 발사 73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한다. 그로 인해 왕복선에 탑승하고 있던 일곱 명의 대원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사고의 원인은 고체 로켓 부스터에 사용된 작디작은 고무 패킹 하나였다. 이렇듯 우주선을 발사하는 일은 고작 부품 하나로 인해 성패가 좌우될 수 있는 섬세하고 까다로운 작업이지, 가볍고 장난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금껏 우주선이나 인공위성을 발사하다가 사소한 잘못 하나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난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물론 골든 레코드가 로켓 발사에 핵심적인 부품은 아니므로 골든 레코드의 유무가 고체 로켓 부스터의 고무 패킹만 한 존재감을 발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골든 레코드를 탐사선에 탑재하는 일이 사고의 가능성이 높이면 높였지, 더 낮추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사 골든 레코드가 사고를 일으킬 공산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골든 레코드의 임무가 달성될 확률은 극히 0에 수렴하므로 골든 레코드의 존재는 잘해야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탐사선에 넣을 필요가 없던, 기껏해야 무의미하거나 위험 요소나 될 골든 레코드를 구태여 보이저호에 집어넣었다. 나보다 똑똑한 그들이 정말 골든 레코드가 외계인에게 전해지리라 믿었을 리는 없으므로, 나는 그들이 이런 위험과 비효율을 무릅쓴 이유를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골든 레코드를 실은 보이저호는 곧 인류가 영원으로 쏘아 올린 풍등이라는 것.


12.

다시 『룩 백』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성인으로 자라 만화가가 된 후지노는 쿄모토를 비극적인 사건으로 잃고 절망에 빠진다. 텅 빈 쿄모토의 집에서 우연히 (초현실적인 연출로 인해 출처가 불분명한) 네 컷 만화를 보고, 자기가 왜 만화를 그리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녀는 이렇게 독백한다. 사실 만화 그리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나도 안 즐겁고, 귀찮기만 하고, 만화는 직접 그리는 게 아니라 읽기만 하는 편이 낫다고. 하지만 왜 만화를 그리냐는 질문 앞에서, 『룩 백』은 쿄모토가 후지노의 원고를 읽으며 기뻐하는 컷으로 답한다. 눈물을 흘린 후지노는 자신의 작업실로 돌아가고, 홀로 다시 펜을 집어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가녀린 어깨의 윤곽 안에 고독과 고통을 힘껏 눌러 담은 듯한 그녀의 뒷모습에서, 나는 문득 아브라함의 모습을 겹쳐본다.

내가 외계인의 실존 여부를 알지 못하듯 성경의 인물 아브라함이 실존 인물이며 이삭을 바친 사건이 실제 사건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나는 언젠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인류사의 단편을 머릿속에서 재현해본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신에게서 아들을 바치란 충격적인 명을 받은 아브라함. 노인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야 하는 상황이 기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이 아들을 불태울 장작을 팰 때, 산 밑에 나귀와 종들을 대기시킬 때, 곧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할 이와 모리아 산을 오르며 그의 질문에 답할 때, 아흔아홉의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하디귀한 아들을 제단에 결박하고 칼을 들이밀 때, 그는 틀림없이 모든 순간 지극한 슬픔과 가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그리 행했을 것이다.

그 ‘바친다’ 이후의 결과는 순전한 우연에 지나지 않기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 내 세상에서 아브라함의 번제를 막는 손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사가 오지 않은 제단에서 노인은 한낱 고깃덩이가 된 아들을 불태우며 운다. 그 눈물이야말로 자신의 믿음을, 자신의 세계관을, 자신의 영혼을 향한 찬미다. 아마 내가 글을 쓴 의미도 이와 같다.


13.

나는 불 꺼진 보이저호가 별들의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원본 첨부파일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매니저들에게 가장 잘할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5/03/10 - -
7350787 자야하는데 [1] 기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4 0
7350786 알고리즘이 계속 어두운 세상을 보라고 부추기네 변불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26 0
7350785 나 사랑에 빠진거 같다 [9] 쌍니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58 0
7350784 긴가민가어딘가아리까리 써릿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19 0
7350783 존스 이 사람 진짜 로판회로돌아가네. [7] 수구사응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71 0
7350782 미소녀에게 구원받은 남캐나 보고싶네 [6] 어사일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43 0
7350781 미혼모 여주(한살짜리 딸이 있음, 18세)가 부자남자한테 취집하는 [14] 은의세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96 0
7350778 그리고 뭣보다 역사의종언이 문제가 아니라 [5] ‘파타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90 0
7350776 닭장무당 나오는데 이새끼 저주술 쓰네? 그림먼저본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5 0
7350775 아니 씨발 님들 잠이 안와@!! YAMAT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18 0
7350774 진짜눈을부릅떳네 [5] 남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78 2
7350773 취향에 너무 딱맞는 떡인지를 만나니까 너무 무섭네 [4] 쌍니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55 0
7350772 윾돌이 진짜 윾빈치 코드 넘 음습하고 깊어서 말이 안나온다 [1] 저지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3 0
7350771 내 십만년전 수렵두뇌는 디지털에서도 사냥을 갈구한다 ome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22 0
7350770 인피니트뭐시기하니까생각났는데 화생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48 0
7350768 지구에서 초능력대전하는데 지구멸망급운석소환술 익히면 어따씀 [1] Embri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5 0
7350767 이리 미스릴왓슴 ㅋ [4] 안이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40 0
7350766 난 리얼돌VR미소녀섹스발전교 믿을건데? 수구사응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27 0
7350765 약간 이런 거 좋군 [5] 그림먼저본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56 0
7350764 아니 초기로켓단 ㅈㄴ 냉혹하네 ㅋㅋ 화생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43 0
7350762 그게 돈이 될까? [1] Embri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27 0
7350761 주의 만찬식은 음력 니산월 14일 저녁이죠 [7] Dd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61 0
7350760 인터넷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진짜 그 사람의 본성일까? [3] 변불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44 0
7350759 종교는 엠브리오교 믿으셈 [3] Embri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3 0
7350758 나루토 재주행 하는데 ㄹㅇ 자부자 하쿠 안 따먹음? [9] SHIRAYUKI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55 0
7350757 님드라 당근에서 무선청소기살건데 [8] 라니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41 0
7350756 종교 도저히 시발 못믿겠다. 그렇지만 시도 하고싶다면 불교도 괜찮음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23 0
7350755 바둑계 << ㄹㅇ 상성 한 번 잡히면 존나 무시무시하네 [7] 진짜비숍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73 0
7350754 덕성팸이 ts 빙의 미소녀가 미혼모돼서 육아하는거 [16] 수구사응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58 0
7350753 하아 띠띠야 [2] 기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0 0
7350752 솔직히 내가 종교를 적잖이 깔보기는 하지만 [6] ㆁ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54 0
7350751 젠장붉은꽃보다붉게살아나다오 화생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11 0
7350750 아니 생각해보셈 남 못 구하게 하려고 [11] ‘파타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109 0
7350749 길티크라운은. 카미 애니인데. 너구리위식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23 0
7350748 종교를가질수잇는성향 자체가 긍정적트레잇오지는거같음. [1] 저지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42 0
7350745 네웹 보고있었는데 갑자기 여캐 두명이서 보비는거 머노 [5] 상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44 0
7350744 근디 덴드로는 능력분류법이 좋단 말이지...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1 0
7350743 존스는 그런 눈치 안 보던데? [6] ㅇㅇ(121.145) 03.12 54 0
7350742 기독교중에 jms출신들 있다는거 ome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2 0
7350741 근데 귀령 이거 고증 잘못된 거 있음 [6] 그림먼저본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65 0
7350740 블루피리어드 트릴리온게임 메달리스트 같은 클라스 만화 추천 좀 [4] 진짜비숍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6 0
7350737 공격력 3000짜리 티폰만큼 슬픈 게 어딨을까 [4] ‘파타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77 1
7350736 ㅅㅂ 이정도로 예쁘고 돈도 많으면 집안일은 니가 해야지 [3] 그림먼저본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59 0
7350735 고유결계나 영역전개 참백도 해방어같은건 누가지어주는거임 [16] 어사일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89 0
7350734 엔젤비트 vs 길티크라운 하나 본다고 하면 님들은 뭐 봄?? [2] 진짜비숍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6 0
7350733 종교는 그냥 남탓할 수 있어서 좋은게 아닌건지 [3] 기러기러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45 0
7350732 16시간뒤에출근이라고 [3] 저지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0 0
7350731 요즘 세계는 전체로서 차거나 이지러진다는 말을 [6] 은의세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63 0
7350730 질렸어 [1] Embri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2 0
7350727 ㅅㅂ 보이밋걸도 있구나 이거 그림먼저본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12 31 0
뉴스 故김새론에 ‘7억 내용증명’?…김수현 측 “기존 입장 달라진 것 없어” [공식] 디시트렌드 03.12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