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왕의 황혼당(黄昏堂) - 제3화
스즈키 아이가 남기고 간 축축하고 차가운 절망의 잔향은 황혼당의 어둠 속에 며칠 동안이나 감돌았다. 그녀의 두려움과 불안은 내 안의 여왕에게 훌륭한 양분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이의 몸에 달라붙어 있다는 오치우미 곶(落海岬)의 기운, 그리고 그녀가 건네주었던 오마모리(お守り)에 깃들어 있던 깊고 오래된 원념. 그것은 단순한 여고생의 저주를 넘어선, 훨씬 근원적인 어둠의 편린이었다.
‘흥미롭지 않느냐, 아가씨. 저 곶에 잠든 것은 꽤나 오래 묵은 슬픔인 듯하구나. 저런 강한 원념은 귀한 힘이 되지.’ 여왕의 목소리가 뇌리에 속삭였다. 그녀는 내가 직접 나서서 그 원념을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흡수하기를 바라는 듯했다.
나 역시 그 기운이 신경 쓰였다. 아이에게서 흘러나온 절망만으로는 여왕을 온전히 부활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더 강하고, 더 농밀한 어둠이 필요했다. 오치우미 곶의 '우는 여자'. 그 전설인지 실화인지 모를 이야기에 직접 부딪혀 볼 필요가 있었다. 스즈키 아이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혹은 여왕의 영향력이 나를 재촉했다.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오치우미 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스러지고, 항구의 소음마저 잦아들 무렵, 나는 황혼당의 문을 나섰다. 밤공기는 비가 갠 뒤끝이라 차갑고 습했다. 나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아무도 없는 부둣가 근처의 낡은 창고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심호흡을 했다. 내 안의 어둠, 여왕의 힘을 해방시킬 시간이었다.
"…나의 이름 아래, 밤의 장막을 두르니."
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내 안의 이질적인 힘이 들끓기 시작했다. 발밑의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내 몸을 감쌌다. 낡은 교복은 어둠 속에서 해체되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칠흑처럼 검고 차가운 감촉의 옷이 나타났다. 복잡한 레이스와 리본으로 장식되었지만, 어딘가 찢어지고 해진 듯한, 음울하면서도 기묘한 아름다움을 지닌 드레스였다. 등 뒤에서는 검은 그림자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접히기를 반복했고, 눈동자는 차가운 달빛을 머금은 듯 희미한 자줏빛으로 빛났다. 머리카락은 밤의 장막처럼 더 길고 검게 변해 바람에 흩날렸다.
이것이 나의 또 다른 모습. '어둠의 마법소녀(Dark Magical Girl)'. 혹은 여왕의 그림자를 두른 존재. 온몸에 차가운 힘이 넘실거렸고, 감각은 몇 배나 예민해졌다. 밤의 공기 중에 떠도는 희미한 기운들,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들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특히, 스즈키 아이와 부적 주머니에 남아있던 그 축축하고 슬픈 기운의 흔적이 마치 길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걷지 않았다. 그림자 속으로 몸을 녹여 순식간에 이동했다. 오치우미 시의 불빛은 빠르게 멀어졌고, 거센 파도 소리와 함께 바다 내음이 짙어졌다. 오치우미 곶이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곶의 풍경은 황량하고 스산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는 검은 파도가 쉴 새 없이 부딪혀 흰 거품을 만들어냈고, 을씨년스러운 바람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스즈키 아이가 말했던 작은 사당은 절벽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버려진 듯, 지붕은 내려앉고 기둥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당 자체가 아니었다. 그 주변, 특히 절벽 가장자리에 응축된 기운이 문제였다. 축축하고, 차갑고, 슬픔과 원망이 뒤섞인 기운. 마치 수많은 눈물이 마르지 않고 고여 웅덩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천천히 절벽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기운은 더욱 강해졌고, 희미한 흐느낌 소리 같은 것이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예민해진 감각으로 기운의 근원지를 더듬었다. 절벽 아래, 파도가 부딪히는 검은 바위 근처에서 가장 강한 반응이 느껴졌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림자 날개가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하강 속도를 늦췄다. 검은 바위 위에 내려서자,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와 함께 압도적인 슬픔과 원망이 나를 덮쳤다. 마치 얼음물 속에 빠진 듯한 감각.
"흐윽... 흐으윽..."
바로 앞에서,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검은 바위 위에 한 여자가 등을 보인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바닷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온몸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소복처럼 보이는 흰 옷 역시 축축하게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는 검은 머리카락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스즈키 아이가 꿈에서 보았던 '검은 머리카락 그림자'의 본체임이 틀림없었다.
‘찾았구나, 아가씨. 저것이 바로 수많은 세월 동안 이 곶에 묶여 있던 원령이다. 느껴지는가? 저 깊은 절망과 원한이!’ 여왕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내가 다가서는 기척을 느꼈는지,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젖은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이로 드러난 눈은 텅 빈 채 깊은 슬픔과 증오로 번들거렸다.
「...왔구나. 또 나를 괴롭히러...」
목소리는 물에 잠긴 듯 갈라지고 불분명했지만, 그 안에 담긴 원망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녀는 나를 자신을 이곳에 묶어둔 존재, 혹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누군가와 혼동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널 괴롭히러 온 게 아니야." 나는 차갑게 말했다. "네 이야기를 들으러 왔지. 그리고... 끝내주러."
「끝내줘?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는데! 나를 배신하고, 버리고, 이 차가운 바다에 던져 넣은 그놈처럼, 너도 똑같아! 모두 나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야!」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며 비명처럼 변해갔다. 주변의 검은 머리카락 아지랑이가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나를 향해 쇄도했다.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 닿는 순간 영혼까지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원념의 실체였다.
나는 팔을 휘둘러 그림자 장막을 펼쳤다. 검은 머리카락들은 장막에 부딪혀 힘없이 스러졌지만, 곧바로 더 많은 수가 몰려왔다. 여자는 울부짖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인간 여성의 형상이 아니었다. 온몸이 검은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기괴한 형상으로 변해가며, 주변의 바닷물까지 검게 물들이는 듯했다.
「죽어! 죽어버려! 모두 다 이 바다 밑바닥에서 나와 함께 고통받아!」
이것이 이른바 '정화'가 필요한 상황인가.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힘은 빛의 그것과는 달랐다. 나는 이 원념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흡수해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어울리는 방식.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에서 짙은 어둠이 소용돌이치며 작은 블랙홀처럼 공간을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네 슬픔, 네 원망, 네 절망... 전부 내가 받아주지."
내 의지에 반응하듯, 손바닥의 어둠이 강렬하게 원령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카락 형상의 원령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주변의 파도가 더욱 거세지고, 바람이 비명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여왕에게서 받은 나의 힘은 그녀의 오랜 원념보다 더 근원적인 어둠에 닿아 있었다.
「안 돼... 안 돼! 나의 고통을... 나의 슬픔을 가져가지 마!」
원령의 비명은 처절했지만,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그녀를 이루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들이 실처럼 풀려나며 내 손바닥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해체되어 나에게 흡수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기억과 감정들이 파편처럼 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사랑했던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이 곶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여자의 슬픔. 오랜 세월 동안 홀로 바닷속에 갇혀 사람들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쌓아 올린 지독한 고독과 증오.
모든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기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그녀의 절망이 내 안의 공허를 채우고, 여왕의 존재를 더욱 강하게 살찌우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격렬했던 저항이 잦아들고, 원령의 형체는 완전히 사라졌다. 내 손바닥의 어둠도 스르르 흩어졌다. 주변을 감돌던 살을 에는 듯한 한기와 압도적인 슬픔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는 여전했지만, 더 이상 그 안에 원망 섞인 흐느낌은 들리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방식대로의 '정화'. 원념의 완전한 흡수이자 소멸.
‘훌륭하다, 아가씨!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어. 저 정도의 절망이라면 나를 되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여왕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온몸에 새로운 힘이 차오르는 감각과 함께, 방금 흡수한 원령의 기억에서 비롯된 깊은 피로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스즈키 아이를 괴롭히던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절망을, 그리고 원령의 절망을 양분 삼아 더욱 강해졌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절망을 수집해야 할까. 그리고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겨 황혼당으로 돌아왔다. 변신을 해제하자 다시 평범한 소녀, 사토 미사키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내 안의 어둠은 이전보다 훨씬 깊고 무거워져 있었다.
다락방 창문 너머로 오치우미 시의 야경이 보였다. 저 불빛들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슬픔과 절망이 숨겨져 있을까. 나는 조용히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의 여왕을 위한 제물을. 그리고 언젠가 마주하게 될, 별빛의 소녀들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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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별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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