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가 일본 영토에서 배제된 연합국 지도(왼쪽)와 이승만의 대마도 등 실지회복 의지 기
🔼1952년 설정한 이승만 라인(왼쪽)과 1999년 신한일 어업협정.
'이승만 라인 침입' 사건으로 일본어민 1명 사망, 어선 3,288척 나포, 억류선원 3,929명 + 벌금 부과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평화선) 설치
일본에 대마도 반환 요구를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소식에 격분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발효일이 1952년 4월 28일로 되어 있었는데 이 발효일이 지나고 나서 우물쭈물하면 국제적으로 일본영토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전폭적인 원조로 전쟁을 하고 있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약소국 중의 하나여서 국제적으로 협상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통 큰 배짱이며 미국의 속내를 잘 읽고 국제 상황 분석에 천재인 이승만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직전인 1952년 1월 18일 전격적으로 독도를 경계선 안에 넣는 해양주권 선을 아래 좌측과 같이 긋고 평화선이라 선언했다. 그리고 이 평화선 안에서 어업을 하려면 한국 정부에 허가를 받아야 하고 어기면 처벌을 한다고 강력하게 선언했다.
일본은 당황한 것은 물론이고 팔팔 뛰며 항의했다. 한국 전쟁을 함께 수행하던 미국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취소를 요구했다. 일본은 이승만 대통령이 인접국들과 협의 없이 단독 일방적으로 만든 선이라 하여 이승만 라인이라 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전쟁 휴전에 강력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자극하면 휴전 협상이 어려워 질 것으로 판단하고 모른 채하여 결국 한국 편을 들어 준 것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승만 라인'을 설정하지 않았으면 지금 독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월에는 평화선을 설정 선언했고 독도를 이 평화선 안에 넣어 한국 영토라고 세계에 선언하였다. 그 때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설정하지 않았으면 지금 독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승만 대통령이 독도를 포함한 영해를 '이승만 라인' 을 선포(1952년 1월18일)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대마도를 도둑질했던 수법으로 진작 독도를 먹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역사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많으나 일본이 1905년 1월 근거도 없이 내각회의 결정으로 시네마 현에 편입시켜 다케시마라 명명하고 일본 영토라고 억지 주장해 왔다.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국에 있는 2차 세계대전 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준비과정 중 작성된 아래 좌측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에서 배제되어 있다.
또한 1946년 연합군 최고사령부도 연합군 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77호를 통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했다. 그런데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해야 할 한국 영토에 제주도 등 4개 섬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는데 독도가 빠졌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에 3,000 개 이상의 섬이 있어 다 기록할 수 없어 대표적인 섬들의 이름만 명기한데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승만 평화선이 설정되지 않았다면 일본이 지배하였을 수도 있었다.
평화선 설정 이후 이승만 정부는 이 평화선 안에서 조업하는 일본어선은 물론 중국 어선들도 모두 나포하여 처벌했다. 이 평화선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5년 한일조약 체결로 철폐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설정과 선언이 없었다면 일본이 경비대를 독도에 보내 지배하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독도와 관련된 이승만 대통령의 공적을 잘 모르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일본의 '중간수역'(한-일공동관리수역, 그 안에 독도 위치) 설정안을 수용하여 1999년 1월 23일 제2차 한-일어업협정을 체결 발효시켰다. 1999년 신한-일어업협정은 울릉도를 한국의 EEZ 기점으로 삼아, 독도를 이질적인 '중간수역'에 넣었다. 결과적으로 수역상 독도를 울릉도에서 분리시켜 '부속도서론'을 훼손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EEZ는 자기영토를 기점(base point)으로 취하기 때문에 영토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 그 영토가 바로 "독도"인 것이다. 이 합의로 독도는 한일공동관리수역 안에 들어갔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도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선언은 물론 대마도 영토권 주장과 반환 요구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독도 한국령 표지석 건립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독도 등대
1954년 8월10일
"준비는 끝났는가. 등대에 불을 켜라."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현재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지어진 등대를 증축한 것이다.
1948년 건국과 동시에 "대마도를 반환하라"고 수십차례 요구했던 이승만. 김일성의 6.25남침으로 물거품 되자 일본이 탐내는 독도에 등대를 건설하고 점등식을 준비해 왔던 이승만의 빅카드 였다. 한일관계 회복을 밀어붙이는 미국에게 보란듯이 미국 방문 중에 '독도는 한국땅' 임을 선포하는 '깜짝 외교 쇼' 를 벌였던 것이다. 국토방위는 전쟁만으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통치자의 의지와 국민의 애국심이 등대불로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승만은 독도의 등대점등식을 왜 하필 방미 기간에 하라고 지시했던가.
미국은 냉전시대가 본격화되자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 한국과 일본을 화해시켜야만 했다. 이승만은 그러나 독립운동과 건국준비 때부터 줄곧 미국의 '좌우합작' 압력 등을 거부해온 불굴의 지도자가 아닌가. 게다가 전쟁중에도 일본을 집중 지원하는 미국이 싫었다. 전쟁물자 공급을 도맡은 일본은 패전 10년도 안되어 일약 떼부자가 되다니. 그것도 한국을 강점했던 범죄자가 한국전쟁을 이용해 경제부흥을 이루었다.
“겁쟁이들이 하나님이 다 차려준 밥상을 걷어찼다. 한반도 통일전쟁은 이제부터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한반도에서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는 현명치 못한 사람들의 휴전으로 헛되고 말았습니다. 세계의 자유인들이 살 길은 오지 하나, 그것은 ‘악의 힘’에 유화적이거나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중국을 다시 찾지 못하면, 자유세계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바보같은 휴전은 이제 끝내야 합니다. 친구들이어, 공산주의를 감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 마시오. 치명적인 바이러스입니다. 퇴치 투쟁에 나서야만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내 주장이 강경합니까?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누구든지 유화적이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끔직한 세력입니다. 자,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궐기합시다!”
- 한국대통령 최초로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 공항도착 인삿말과 미국 양원합동 의회 연설문
🔼독도 국제사법재판소 'ICJ'에 독도 문제를 제소할 것 제의 한국 거부
1954년 9월, 독도 문제가 국제사법 제소 대상이 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1962년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비밀문서
(당시 한국이 UN 미가입국)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종종 언급되는 '실효적 지배'라는 것은 독도를 우리의 땅으로 인정할 만한 다양한 행위들이 평화롭게 지속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국제재판에서 거론되는 'Critical Date(결정적 기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국제재판상의 기일에 대하여 일본은 지난 1952년 1월 18일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언'에 대하여 일본이 최초로 이의를 제기했던 1월 28일이 'Critical Date(결정적 기인)'라고 하면서 그 이후 행해진 우리나라의 각종 독도 개발행위는 법적 효력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입장이나 주장이 올바르고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효적 지배라는 용어 앞에서 우리는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즉, 독도에서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준비가 중요하다.
노무현 독도 연설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한국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랙전쟁과 학살, 40년간에 걸친 수탈과 고문, 투옥, 강제징용, 심지어 위안부까지
동원했던 그 범죄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배타적 경제수역 때문이라며
"독도를 분쟁지역화 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견해가 없지는 않으나,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확립을 상징하는 문제 입니다. 공개적으로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라고 조용한 대응이 아닌 공개적 대응을 공식적으로표명했다.
"물리적인 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고,
세계여론과 일본 국민에게 일본 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끊임없이 고발해 나갈것" 이라고 강조하며
"일본 정부가 잘못을 바로잡을 때까지
국가적 역량과 외교적 자원을 모두 동원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고 밝혔다.
"우리는 일본에게 더이상 새로운 사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행위로 한국의 주권과 국민적 자존심을 모욕하는 행위를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진실과 인류사회의 양심 앞에 솔직하고 겸허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라고 노 前대통령은 일본의 도발에 엄중하게 경고했다.
아시나요?
"영국과 노르웨이 간의 어업권 분쟁, 태국과 카보디아 간의 쁘리야 비히어 사원 분쟁의 사례에서 보듯 국제사법 재판소는 침묵과 무대응을 묵인이라고 인정해 계속 도발을 일삼은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독도 가려진 한반도기..IOC와 OCA의 독도 표기 반대
2월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독도가 없는 한반도기가 사용됐다. 당시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는 "IOC가 독도가 표시된 한반도기를 '정치적 행위'로 보고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당시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평가전에서 독도가 들어간 한반도기가 사용되자 일본이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에서도 한반도기에 독도가 가리워 졌다. 아시안게임을 주관하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남북한은 OCA에 독도를 넣은 한반도기 사용을 요구했으나 OCA는 이를 거부했다. OCA는 남북한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기준을 준용해야 한다고 강조해 독도 표기 한반도기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정부는 일본의 독도 국제 문제 공론화에 힘을 실어주는건가. 왜 당연한 우리것에 대해 목소리 내지도 못하고 우리였던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걸까 궁금할뿐이다.
IOC와 OCA가 독도 표기를 정치적 행위가 아닌 것으로 판단해 독도가 들어간 한반도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기 독도 사용에 대해 단 한마디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독도에 한국령 표지석 건립하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이승만과 정말 비교되는 문재인의 독도 관련 행보.
대한제국 시절 이승만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하지만 문재인은 북한 시계까지 일본 동경기준 시계로 돌려 놓았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대마도가 우리 땅임을 아시나요?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예속되었는데 언제부터 왜인이 살게되었는지 모르겠다..(동지여지승람)
.대마도주는 동번으로 청하면서 우리나라에 신하로서 섬겼으며...(조선실록)
.대마도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 되었던바...(세종실록)
.... 실제로 대마도가 오래 전 우리 땅이었다는 기록은 사료에 많이 등장합니다.
고려말 박위 장군이 노략질을 일삼자 대마도를 토벌했습니다. 조선 초기에도 이종무가 다시 한번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조선 1557년에도 1860년에도 대마도가 경상도에 속한 우리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어리석은 정책이었던 국경선 일대의 섬을 비워둔다는 ‘공도(空島) 정책’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고 파벌정치에 빠져있던 조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영토가 정식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일본이 선포한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때입니다. 대마도는 1868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거쳐 1872년 나가사키 현에 편입되었다.
대마도는 맑은 날이면 부산에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다. 부산에서 남쪽으로 고작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본토인 후쿠오카에서는 그 세 배에 가까운 13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거리로 보면 분명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었어야 할 대마도가 일본 영토라니? 관리를 파견하고 백성을 이주하여 확실한 영토로 만들지 못한 선조들과 일제강점기에서 광복을 찾은 후 행한 우리 지도자들의 무능이 원망스럽다.
정광태 노래 "독도는 우리땅"..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일본땅 독도는 우리땅.. 이 노래 가사도 뜯어 고쳐야 해. 일본의 영토로 일본이 선포한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때입니다.
일본이 대마도를 불법점거 중이고 국제법상 대마도는 한국땅.
대한민국 영토 대마도를 찾아오자!!
대마도, 독도는 우리땅. 우리는 대한민국인 (feat 배재대)
투키디데스의 관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500년 전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역사를 둘러싼 논란을 이렇게 적었다. “서로 다른 목격자들은 같은 사건에 대해 다른 진술을 내놓았다. 이들은 어느 한쪽이나 상대편을 편들기도 했고, 그렇지 않으면 불완전한 기억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 역사를 공유한 이웃 나라 간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한 것을 보면 투키디데스의 관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라쇼몽 효과 (Rashomon Effect)
동일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으로 해석하면서 본질 자체를 다르게 인식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골라 ‘취사선택’한다는 의미로도 쓰는데, 그래서 현재의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재구성하는 기억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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