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프로 생활의 시작과 끝을 ‘한화맨’으로 마무리한 윤규진. 선수 생활하는 동안 야구선수 정민철과 마무리 투수 구대성이 롤모델이었다고 말한다.(사진=이영미)>
한화 이글스의 윤규진은 선발, 중간, 마무리를 가리지 않은 전천후 투수였다. 한때 150km/h 안팎의 강속구를 뿌리며 메이저리그 스카우트의 시선을 사로잡은 적도 있었지만 거듭된 부상과 두 차례의 수술(2006년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 2015년 어깨 관절경 수술)로 인해 구속이 떨어지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마치 한화의 상징인 불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가 재가 돼 사라지는 듯 윤규진이 한화와 함께 한 18년의 시간들은 명과 암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인터뷰에서의 윤규진은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던 2015년이 가장 빛이 났던 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대성불패’ 구대성과 같은 멋진 클로저를 꿈꾸며 야구했다고 말하는 그는 15시즌 통산 418경기에 등판 814이닝 42승 43패 30세이브 37홀드 평균자책점 5.04 탈삼진 665개를 기록했다. 11월 23일 대전에서 윤규진을 만났다.
시즌 종료 후 한화 이글스가 대거 선수단을 정리했는데 윤규진 선수는 바로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이전에 이미 은퇴를 결심했다는 의미이겠죠.
“올시즌을 돌아보면 은퇴 과정 자체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어요. 줄곧 서산에 있었으니까요. 1군에서 던진 게 2경기 밖에 안됐어요. 2군에서 시즌을 마무리하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 야구를 그만 둘 수도 있겠다고, 선수 생활을 더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죠.”
시즌 초 한화와 1+1의 조건으로 FA 계약을 맺었지만 옵션을 사용하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네요.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는 몸 상태가 아주 좋았어요. 구속도 작년보다 더 나왔거든요. 기대를 갖고 시즌을 준비했는데 개막전 엔트리에 빠지게 됐고, 서산 생활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마음이 약해지더라고요. 더욱이 시즌 중 팀 내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자가격리를 하고, 다시 몸을 만들고 준비하는 상황들이 여의치 않았어요. 후배들은 모두 140km/h 후반대 공을 던지고 있는데 저는 구속이 안 나오더라고요. 제가 후배들보다 나은 점은 경험 밖에 없었어요. 다른 선배들처럼 멋있게 은퇴식도 갖고, 자신이 언제 그만두는지를 알고 시즌을 치렀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팀 사정을 고려했을 때 제가 욕심 부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한화가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동고동락했던 선수들이 팀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 같아요.
“그중에서 (안)영명이한테는 전화도 못했어요. kt wiz로 가게 돼 정말 잘됐지만 처음에는 말도 못 꺼내겠더라고요.”
아직까지도 통화 못한 거예요?
“해야죠. 새로운 팀에 갔으니까 잘 됐다고 축하 전화를 해야 하는데 제 마음이 정리가 안 된 상태라 선뜻 전화하지 못했어요.”
2003년 2차 2라운드 전체 13순위로 한화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때 입단 동기가 천안 북일고 출신의 전체 1차 1번 안영명 선수였죠. 두 사람이 고교시절 아는 사이였나요?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저는 영명이를 알았죠. 영명이가 다니던 북일고가 전국대회 나가면 항상 우승을 차지했던 팀이고, 영명이는 이미 유명한 선수였으니까요. 한화 입단 후 영명이가 장난으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대전고 2차 2번 윤규진이 누군지 몰랐다고(웃음). 당시의 저는 2차 지명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행복했어요. 솔직히 자신 없었거든요. 그래도 입단 동기로 영명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의지하고 힘이 많이 됐습니다.”
<2021시즌부터 kt wiz에서 활약하게 된 안영명.>
두 분이 옛날 싸이월드에 주고받았던 글들이 화제를 모았습니다. 캡처된 걸 보니까 무슨 연인 사이처럼 달달한 대화를 나누었더라고요.
“잊고 싶었는데 다시 기억을 소환해주시네요. 그 당시 제가 1군에 있으면 영명이가 2군에, 영명이가 1군에 있을 때 제가 2군에 있는 등 오락가락하는 상황이었어요. 아마 그 시기에 싸이월드를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것 같아요. 처음 프로 데뷔 후 의지하며 지내다 떨어져 있는 게 아쉬워서 그런 표현을 했을 겁니다.”
‘자기야’란 표현도 있던데요?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요? 아마 영명이가 했을 겁니다. 저는 그런 표현 못해요(웃음).”
누가 먼저 결혼했어요?
“제가 먼저 했어요. 그 다음에 영명이가 결혼식을 올렸고요. 결혼 후 바로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생활을 대신했는데 훈련소 들어갔을 때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제 현실이 정말 답답했습니다. 군 복무 마치고 팀에 복귀해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터라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탈모가 진행됐을 정도였어요. 모든 게 불투명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신흥초등학교 충남중학교 대전고등학교 출신으로 정민철 단장의 초·중·고 후배입니다. 덕분에 선수 생활하면서 선배 정민철한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 있는 단장님을 닮는 게 목표였어요. 그런 저로선 한화 입단 후 가장 기뻤던 일이 단장님과 룸메이트가 됐을 때입니다. 같이 선수 생활을 하는 것도 영광이었는데 방까지 함께 사용하다니 정말 꿈만 같았던 일이었죠.”
정민철 단장과 룸메이트였군요.
“네. 단장님이 선수로 뛰실 때 한동안 글러브를 산 적이 없었어요. 단장님이 다 주셨어요. 스파이크, 글러브, 심지어 옷까지도. 단장님이 옆 침대에서 주무실 때 종종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내가 정민철 선수랑 함께 누워 있다니’라고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거예요. ‘아, 멋있다! 나는 언제 저분처럼 공을 던져볼까’하는 생각도 했었고요. 프로에서 저의 롤모델을 만났고, 그분이 사용하는 글러브, 스파이크, 사복, 운동복까지 모두 사용하고 입게 되면서 스스로 축복받은 시간들이라고 믿었어요.”
<한때 룸메이트였던 선배를 단장과 선수로 만나 FA 계약을 맺게 된 장면. 지난 1월의 사진이다.(사진=한화 이글스)>
정말 다 줬네요.
“팬티 빼고 다 받았어요(웃음). 그 자체가 감동이라 단장님이 주신 옷만 입고 다녔어요. 하얀색 트레이닝복이 갈색이 될 때까지 입고 다녔으니까요. 글러브도 그것만 끼고 했고요. 단장님의 모든 걸 다 닮고 싶었습니다. 야구는 당연하고, 야구 외적인 부분까지 모두 다 닮고 싶어 했을 정도로 진짜 팬이었어요. 심지어 단장님의 등번호 55번까지 달았으니까 저는 행운아였죠.”
그래도 대선배와 한 방을 쓰다 보면 불편한 점이 있었을 텐데요.
“제가 잘 보이려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들만 말씀드리는 거예요. 단장님은 한참 어린 후배에게 심부름조차 안 시켰어요. 원정 가서 친구들 만나러 나가면 편하게 만나고 오라고 오히려 더 배려해주셨어요. 정말 좋은 분이라는 걸 느끼면서 선수 생활을 했었죠.”
선수 정민철이 달았던 55번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느껴졌을까요.
“원래 제 등번호가 50번이었어요. 단장님이 일본에서 복귀해 55번을 달다 23번으로 바꾸시더라고요. 55번 등번호가 남았는데 다른 선배가 55번 달겠다고 하니까 단장님이 그 선배에게 규진이 달게 해주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단장님의 선배이셨거든요. 제게는 55번 달고 싶냐고 물어보셔서 무조건 좋다고 했었죠. 그래서 55번을 달게 됐습니다.”
정민철의 황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네요.
“그것보다 선수 시절 잘 챙겨주신 부분이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코치로 다시 만났을 때는 어떠했나요?
“제대하고 팀에 복귀했을 때였어요. 아무리 저를 잘 챙겨주셨어도 단장님은 공과 사가 분명한 분이세요.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거든요. 복귀 후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어요. 저도 많이 답답했는데 단장님은 오죽하셨을까요. 하루는 방으로 저를 부르셔서 크게 혼을 내시더라고요. “너 계속 이러면 안 데리고 있을 거야. 이렇게 던지면 (2군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어”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죠.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금은 편하게 회상하지만 그때는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호된 꾸지람을 들었거든요. 그런 생각도 했어요. 선수 생활하면서 사건 사고가 있으면 안 되겠다고. 그런 일로 단장님을 실망 시켜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덕분에 사건 사고에 굉장히 예민한 편이에요. 가끔은 너무 평범하게 선수 생활을 해서 재미있는 추억으로 떠올릴 만한 게 없어 아쉽기도 해요. 단장님으로 다시 한화에 오셨을 때는 쉽게 연락도 못했습니다. 벌어진 거리만큼 다가가기 어렵더라고요. 은퇴했으니까 이렇게 옛날 이야기도 하는 거지, 현역이었다면 말도 못 꺼냈을 겁니다.”
야구하면서 가장 영향을 받은 지도자를 꼽는다면 누가 될까요.
“최일언 코치님이요. 코치님은 기본기를 매우 중요시 했어요. 프로 2,3년 차에 코치님을 만났던 건 행운이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는데 제가 지금까지 한화에서 18년 동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코치님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투구폼을 수정해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 선수인 이와쿠마 히사시와 같은 투구폼을 가르쳐주셨어요. 이전의 제 투구폼은 정리되지 않은 형태였다면 코치님이 이끌어주신 건 간결한 팔 동작이었거든요. 그게 저한테 아주 잘 맞았던 거죠. 이전에 던진 공과 전혀 다른 공을 던지게 됐어요. 구속도 증가했고요. 코치님은 한화에서 2년 만에 SK로 가셨는데 저는 그때마다 코치님이 맡으신 팀 선수들이 부러웠어요. SK, NC, LG 투수들 모두가요.”
최 코치가 다른 팀으로 떠난 후 투구폼에 변화가 있었나요?
“2005년 팔꿈치 수술하고 구속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코치님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어요. 우리 팀의 코치님들도 많이 도와주셨지만 제 체형에 맞는 투구폼을 잡아주실 수 있는 분은 최일언 코치님이셨거든요. 오죽 답답했으면 SK 원정 경기 갈 때 외야에서 살짝 살짝 코치님에게 포크볼 그립을 여쭤보곤 했겠어요. 속마음은 ‘코치님, 공이 안 나가는데 방법 좀 알려주세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다른 팀을 맡고 계시는 분에게 괜히 부담 드리는 것 같아 직접적으로 묻지 못했습니다.”
<150km/h의 구속을 자랑하던 윤규진은 두 차례의 수술과 부상 등으로 구속이 떨어졌는데 은퇴하기 전까지 정확한 구속 저하의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한때 150km/h 정도의 공을 던진 선수가 어느 순간부터 구속이 떨어졌습니다. 혹시 어깨 수술의 여파 때문이었을까요?
“흔히 수술하면 스피드가 더 올라 간다고 해서 내심 기대를 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은퇴할 때까지 구속이 떨어진 진짜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어요. 관리 부족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비시즌 동안 몸 관리에 집중하면서 준비를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관리 부족으로 구속이 떨어진 셈이죠.”
스스로 구속이 떨어지는 걸 느꼈고, 그걸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겪었다면 구속이 오르지 않은 데 대해 상당히 부담을 느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왜 공이 안 갈까? 이전에는 빠른 공을 던졌는데 지금은 왜 공이 빠르지 않을까? 하는 고민은 은퇴 직전까지 했던 것 같아요. 제 몸 상태는 충분히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구속이 오르지 않으니 미치겠더라고요. 나중에 영상을 보니까 조금은 이해가 됐어요. 공의 회전력이 이전보다 무뎌진 게 보였거든요. 저는 엄청 빠르게 던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영상에서는 그런 느낌이 없었어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가 어떤 공을 던지고 있는 지를. 비로소 그만둬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구와 포크볼이 주무기였던 선수로선 빠른공을 던져야 다른 변화구들이 잘 맞물려 가는 법인데 구속이 안 나오면서 변화구마저 밋밋해지는 걸 느꼈겠어요.
“그렇죠. 제가 구속 저하를 두고 더 고민했던 건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카운트를 잡으려면 빠른 공으로 파울을 이끌어 내야 하는데 구속이 안 오르면서 제구에 신경 쓰다 보니 이도저도 안됐던 거죠. 그래서 고민이 더 커진 것이고요.”
은퇴하는 선수들한테 빼놓지 않고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인생 경기’인데요, 윤규진 선수의 인생 경기를 꼽는다면?
“극한의 상황까지 몰렸다가 탈출했던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2015년 4월 7일) LG전이었는데 (9회 2사) 만루 상황에서 쓰리볼까지 갔었어요. 상태 타자가 김용의 선수였습니다. 쓰리볼이 되니까 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요. 앞으로 스트라이크 3개를 던져야 이닝이 종료돼요. 쓰리볼 이후 투 스트라이크까지 끌고 갔을 때 문득 ‘와, 나 야구하기 정말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이 됐을 때 마지막 공에 자신이 있었고, 저는 이미 그 이닝이 종료된 상황이었어요. 마지막 공도 직구로 우겨 넣고 심판 콜도 안 보고 마운드에서 내려왔을 때의 짜릿함이란. 물론 프로 데뷔 후 대전 두산전(2004년 8월 17일)에서 첫 승을 무사사구 완투승으로 장식한 것도 기억에 남지만 2015년 LG전 9회 그때 그 느낌, 경기장 분위기, 음악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팬들의 함성 소리를 뒤로 하며 마운드에 제가 서 있고, 김용의 타자한테는 미안하지만 속으로 ‘너는 이미 끝났어’라고 자신감을 세우며 마지막 공을 던지고 돌아설 때의 그 느낌, 그 느낌이 지금도 그리워요.”
2015년 쉐인 유먼이 한화에 있을 때 ‘유먼 메달’이 화제를 모았습니다. 실제 두 차례 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었고요.
“그 메달 걸고 싶어서 노력을 많이 했지만 쉽게 받을 수 있는 메달이 아니었어요. 경쟁 관계에 놓인 선수들이 메달을 걸어주고 메달을 목에 걸며 축하를 주고받는 그런 문화가 훈훈했었죠.”
메달이 타자와 투수, 각각 1개씩이었죠?
“네. 메달 받은 선수가 라커룸에 보관해두고 있다가 다음 메달 수상자한테 전달해주는 형식이었습니다. 제가 받았을 때는 너무 기쁜 나머지 유먼한테 메달을 집에 갖고 갔다 와도 되느냐고 물었어요. 아이들과 아내한테 자랑하고 싶어서요. 유먼이 흔쾌히 허락해줘서 집으로 갖고 간 적도 있었습니다.”
진짜 메달도 아니었지만 선수들 사이에서 그 메달 받으려고 경쟁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그렇죠. ‘남자네 남자’ ‘투수’라고 쓰여 있는 게 전부였지만 덕분에 클럽하우스에서 재미난 일화들이 많았습니다.”
선수 윤규진한테 유먼 메달이란?
“상장! 집에 가서 자랑하고 싶고, 팬들한테도 자랑하고 싶었던 상장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타자들 중 천적을 꼽는다면 누가 될까요?
“타자 윤석민 선수요. 제 공을 유독 잘 쳤어요. 그 선수를 상대할 때는 실밥도 다르게 잡아보고, 볼배합도 달리 하는 등 변화를 주려고 노력했는데 그래도 안타를 치더라고요. 한 번은 야구장에서 마주쳤을 때 직접 물어본 적도 있었어요. 같은 윤 씨끼리 왜 그러느냐고, 왜 이렇게 내 공을 잘 치냐고 물었더니 미안하다고 말하더라고요(윤석민은 윤규진 상대로 23타수 9안타 2홈런 8타점 타율 0.391 기록). 기록만 따진다면 윤석민 선수보다 더 잘한 선수도 있겠지만 저한테는 가장 임팩트 있는 타자로 윤석민 선수가 기억에 남아요. 속으로 ‘저 선수한테 왜 이렇게 많이 맞는 거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요. 그 후에도 제 공을 잘 때리더라고요.”
결국은 윤석민 선수를 극복 못했네요.
“스스로는 극복했는데 기록이 극복하지 못했습니다(웃음).”
<55번 윤규진과 한화 선수들. 은퇴를 받아들이면서도 다시 선수로 오를 수 없는 마운드, 야구장, 팬들의 응원이 그리울 것 같다고 말한다.>
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적도 있었습니다.
“대타 등 모든 야수들을 사용하고 없을 때는 타석에 들어선 적이 있었죠. 한 번은 봉중근 위원님이 마운드에 올라오셨을 때였어요. 제가 타석에 나가야 한다고 해서 무척 당황했지만 그 순간에도 방망이랑 보호대는 (김)태균이 형 걸 빌렸어요. 기 받으려고(웃음). 태균이 형이 “가만히 서 있다 나올 텐데”라고 말하면서 빌려주시더라고요. 우리가 원 아웃이었고, 주자가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 병살을 치면 이닝이 끝나는 터라 코치님이 치지 말고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타석에서도 떨어져 있으라고요. 그런데 공을 보니까 칠 수 있겠더라고요(웃음). 물론 그냥 들어오긴 했는데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그때 한 번 쳐 볼 걸’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한때 한화 팬들이 윤규진 선수를 향해 ‘규진불패’로 부른 적이 있었어요. 팀 레전드 구대성 선수를 가리켜 ‘대성불패’로 불렀기 때문에 ‘규진불패’라는 호칭은 굉장히 자랑스러운 별명이었을 텐데요.
“선발 중간 마무리를 오갔지만 제 꿈은 마무리 투수였어요. 구대성 선배님이 마운드에 오를 때 나오는 주제가가 있는데 그 음악을 좋아한 나머지 제가 마무리로 나설 때도 그 음악을 배경 음악으로 사용했을 정도입니다. 2015년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구대성 선배님의 이미지를 닮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었어요. 잠깐이지만 ‘규진불패’로 불린 순간들은 꿈만 같았습니다. 마무리를 했을 때가 제 야구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이 났던 순간이었어요. 그 기억을 안고 선수 생활을 그만두는 게 행복합니다.”
윤규진의 야구인생을 다섯 글자로 줄인다면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요?
“‘운이 좋았다’.”
이유는요?
“사실 은퇴 결심을 굳히기 전까지는 모든 게 아쉽고, 더 던질 수 있을 것 같아 마음 정리가 쉽지 않았는데 모든 게 정리되고 나서 제 삶을 돌아보니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 좋게 한화에 입단했고, 거기서 정민철 선배님을 만나 같이 선수 생활을 했고, 다른 팀으로 가지 않고 한화 유니폼만 입고 18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잖아요. 물론 제 자신은 치열하게 싸웠고, 잠을 못 이룰 정도의 내적 갈등을 겪으며 성장했고, 좌절과 극복을 반복했지만 그럼에도 운이 좋았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규진은 마지막으로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냈다. 야구하면서 단 한 번도 인터뷰를 통해 부모님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야구를 그만 둔 적이 있었어요. 당시 반항의 끝을 달리던 시절이었죠. 아버지가 잡아주신 덕분에 야구를 다시 시작했어요. 만약 그때 아버지가 절 잡아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인터뷰도 못했을 겁니다. 그동안 야구하면서 부모님께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어요. 이 자리를 빌려 부모님께 그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살가운 아들이 아니라 표현을 잘 못했지만 야구선수로 키워주셔서 감사했고, 앞으로 그 마음 잊지 않겠다고, 그리고 존경한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최근 일본에 계시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출국한 최일언 코치와 전화 통화가 이뤄졌다. 최 코치는 윤규진의 은퇴를 안타까워하면서 “참 착하고 성실한 선수였다”고 회상했다. 최 코치가 제자에게 남긴 메시지를 그대로 옮긴다.
“규진아, 은퇴하고 새로운 인생을 걷기 시작하는데 야구에 관련된 일을 한다면 야구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지도자를 하게 된다면 지도자로서 좋은 후배들 많이 가르치고 좋은 선수들을 많이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워낙 성실한 선수라서 열심히 할 거라고 믿고 있어. 후회 없이 앞으로의 인생 잘 살았으면 좋겠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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