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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물루스 촬영비화 잡썰들 (삭제업)
짤을 잘못 올렸나 갑자기 글이 삭제되서 다시 올림문제가 될만한 사진이나 스포가 될만한 건 뺌비요른이랑 타일러가 냉각수가 흘러나온 동면실에서 페이스허거들에게 공격받는 장면은 약 3주 동안 촬영됐다함. 비요른 배우와 타일러 배우 말에 의하면 3주 내내 물에 담궈져서 흠뻑 젖은 상태로 보냈는데 처음 1주일 간은 재밌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녹초가 되고, 덥고, 습기가 가득해서 힘들었다고함.또한 비요른이랑 타일러가 환기구를 기어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상당히 불편하고 좁은 환기구 속에 몇분 동안 방치해 둔 후 촬영을 시작했다고 함. 촬영이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난 시점이라 폐쇄환경에 있는 연기에 몰입하기는 쉬웠다함.타일러 배우와 레인 배우에 의하면 펄스 라이플 소품은 무거웠고 실제로 약간의 반동과 진동이 있었다함, 촬영을 위해 만든 제노모프 애니매트로닉스는 높이가 240cm였고, 페이스허거가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장면을 위해 만든 원격조종 페이스허거 애니매트로닉스만 무려 70개라고 함. 그 외에 체스트 버스터 역시 실제 작동되는 애니매트로닉스였다함.타일러에게 페이스허거가 달려들면서 딥키스를 시도하는 장면은 역시나 실제 애니매트로닉스를 사용했는데 이 장면에서 페이스허거를 조종한 게 페데 감독 본인이라고 함. 감독은 꽤나 즐기면서 조종했다고 농담을 날리고, 타일러 배우는 이거 완전 야스씬 아니냐고 농담을 날림.페데 알바레즈 감독은 의외로 호러 영화를 무서워 한다고함. 다만 자기 영화를 자기가 보는 건 안무섭고 다른 사람의 영화는 무섭다함. 코미디언이 자기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소재를 활용하듯이, 본인 역시 자기가 두려워하는 소재를 활용한다고 함. 아직도 페이스허거가 무섭다함.하루 촬영이 끝나면 사람들이 싹 집에 가서 감독 혼자 덩그러니 남아 어두운 세트장을 돌아다니며 내일 뭐할지 계획했는데 으스스해서 무서웠다함.배우들 말로는 세트장이 상당히 방대했고 한 세트에서 촬영을 끝내고 나가는 와중에도 다른 세트들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카메라 바깥에도 여전히 그 세계에 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함.에일리언 로물루스는 딱히 제작사의 별 간섭 없이 만들어졌다함. 스튜디오 영화 치고 꽤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함. 다만 감독은 제작사의 간섭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도 많아서 이상적으로 제작사의 방침과 감독의 주관 사이의 중간지점이 적절하고 이 지점에서 좋은 영화들이 많이 탄생했다고 함.제작사가 간섭한 적이 한번 있었는데 원래는 영화 등장인물들이 극중에서 죄다 담배를 피웠다고 함. 그러나 제작사에서 흡연 장면 좀 줄여달라고 요청해서 비요른이 묘기부리듯 담배 피는 장면만 남게됨.감독이 등장인물들을 20대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서 레트로 퓨처리즘은 70~80년대에서 바라본 미래를 그리는데 이 당시에는 20대가 어엿한 성인이자 노동인력이었기에 영화에서도 그렇게 그렸다함. 또한 제 3세계에 가까운 열악한 식민지 환경에서 젊은 청년들이 착취받는 것에도 부합한다고 설명함.감독은 무중력 장면이 가장 찍기 어려웠다고 함. 같은 장소라고 해도 중력 장면을 위한 세트와 무중력 장면을 위한 세트가 따로 필요했음. 때문에 똑같이 생긴 장소를 수직으로 세우거나 축을 변경한 세트를 따로 만든 다음 촬영을 서로 번갈아가며 했다고 함.레인 배우 말에 의하면 코벨란 호의 조종실 세트는 실제로 4D로 움직인다고 함. 그래서 이륙할 때 뒤로 젖혀지는 느낌이나 난기류 진동 같은 게 그대로 전해져서 몰입하기 좋았다고 함.감독이 에일리언1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제노모프에게 첫 희생자가 살해당할 때 고양이가 그걸 지켜보는 장면이라함. 리들리 스콧은 이때 고양이의 시선을 통해 살해당하는 장면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를 통해 기술적인, 예산적인 제약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그 장면을 상상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함. 호러의 핵심은 관객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함. 감독이 설명하기를 보지 않아야 더 무서운 법이라고 말함. 이블데드를 만들 때 심의 때문에 고어장면을 자른 적이 있는데 그러니까 더 무서워졌다함. 무엇이든 충분한 만큼만 보여주고 넘겨서(cut away) 사람들로 하여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함.감독이 에일리언2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해병들과 리플리가 있는 방 안으로 제노모프들이 몰려오는 장면이라고 함. 동작감자기에 나오는 제노모프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상황에서 제임스 카메론이 감지기 소리를 조금씩 키워서 긴박감을 올리는 효과를 낸 것, 그리고 이미 방 안에 있어야 할 제노모프가 안보이고 알고보니 천장에서 기어오고 있는 반전 등이 아주 인상적이었다함. 이처럼 할 수 있는만큼 관객의 예상을 뒤엎고 놀람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함.영화 촬영 순서를 극의 서사순 그대로 찍었기 때문에 맨 처음 찍은 장면은 식민지 장면이었다함. 감독은 네온사인 술집 간판을 넣은 이유를 밝히는데 에일리언2에서 해들리의 희망 식민지에 네온사인 술집 간판이 나왔던 장면이 유독 기억이 남았었다함. 우주 식민지에 스포츠 바가 있고 이제는 전부 버려진 채 남아있는 모습에서 SF속 인간미가 느껴졌다함.이번작 로물루스를 처음 구상한 것도 에일리언2의 삭제 장면에서 식민지 아이들이 뛰어노는 장면을 보고 떠올렸다함. 식민지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출구없는 삶 같은 것이 떠올랐다함.촬영 막바지에 감독과 레인 배우는 완전히 녹초가 됐었다고 함. 배우 조합 파업 일자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영화 촬영을 끝내기 위해 달렸다함. 원래 계획된 3~4일의 일정이 더 남았었는데 배우 조합 파업 때문에 여유가 이틀로 줄어들게 됐었다함. 마지막 하루에는 완전히 기초방법으로 돌아가서 감독이 카메라를 직접 조종하고, 레인 배우랑 같이 뛰어다니면서 급하게 찍었다함.시간이 워낙 촉박해서 레인 배우한테 여기까지 뛰어가라고 지시하고 감독은 카메라 밀면서 같이 뛴 다음 1테이크 만에 끝내고 이런 식으로 찍었다함. 근데 다행히도 파업이 연기되서 이틀이 더 생긴 덕에 제대로 끝마칠 수 있다고 함.촬영을 서사순대로 했기 때문에 극후반 장면을 상당히 급하게 찍은 것 같음. 감독은 덕분에 이 긴박함이 해당 장면에 전달된 것 같다고 농담을 날림.배우들에게 몇개월 동안 공포 영화 촬영하면서 그 감정을 어떻게 풀었냐고 묻자 레인 배우는 노래방을 아주 많이 갔다고 답함. 매주마다 다같이 노래방을 갔는데 케이 배우에 의하면 페데 감독이 의외로 노래방 악귀라고 함. 마이크를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을 정도로.여기서 페데 감독이 거들기를 나는 40대고 이 친구들은 20대인데 언제 한번 다 같이 저녁 외식을 한적이 있다고 함. 식사 후에 배우 중 하나가 페데 집에 놀러가자고 했다함. 페데는 수락했고 집에 우르르 몰려감. 46살인 본인은 그 의미를 '집에 놀러와서 재즈 음악 듣고 레드 와인을 마시자' 정도로 이해했다함. 하지만 이 젊은 친구들에게 그 의미는 '집에 놀러가서 음악과 파티를 폭발시켜보자'는 의미였다함. 때문에 자기가 숙소로 쓰던 아파트에서 퇴거당했다함. 실화라함.케이 배우가 말하기를 체스트 버스터가 터져나오는 장면을 찍을 때 나바로 배우가 가짜 몸을 달고 찍었다함. 배우가 세트 아래쪽에 뚫린 공간에 몸을 숨기고 가짜 몸을 위로 드러내서 찍었음. 가짜 몸에는 체스트 버스터 애니매트로닉스가 부착되어 있어서 피와 함께 터져나오는 걸 실제 모습 그대로 찍었다함.레인 배우는 에일리언1에서 참 좋았던 부분이 등장배우들이 다들 블루칼라 우주 트럭커에 몰입되어 있었던 부분이었다고 말함. 그래서 본인도 레인이 그 세계 사람 같이 보이도록 만드는 것에 호기심을 가졌다함. 본인이 중서부 출신이기 때문에 레인도 그런 동네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게끔 고향 경험을 끌어냈다함. 비슷한 이유인지 감독도 영국 출신인 비요른 배우에게 미국 억양 대신 그냥 자연스러운 영국 시골 억양을 쓰게 함. 반면 앤디 배우의 경우는 연기해야 할 대상이 합성인간이었기 때문에 백지상태나 다름없었고 때문에 이걸 연기하는 게 무서우면서도 흥미로웠다고 함.감독은 각본을 쓰기 몇년 전에 맨 인더 다크에서 빌런을 맡은 배우 덕에 제임스 카메론과 팬팔 사이가 됐었다함. 그가 맨 인더 다크를 제임스 카메론에게 보여주었고 그 영화를 마음에 들어해서 페데를 아바타2 세트장에 초대했었다함.그래서 각본을 쓸 때 카메론에게 질문을 보냈는데 카메론이 그러면 얘기를 나누자며 2시간 동안 줌으로 통화를 했다함. 첫 1시간은 에일리언2에 대해, 에일리언2를 만든 경험, 제노모프를 다루는 법에 대한 경험 등을 이야기했고 그 다음 1시간은 이번에 만들 우리 영화가 어떤 것이 될지, 어떻게 해야 더 나을지를 브레인스토밍했다함.페데가 말하길 자기는 젊은 사람들이랑 여러차례 영화를 찍어봤는데 보통 영화를 찍을 때는 항상 촬영장에 긴장감이 있고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일과, 스크린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르다함. 심지어는 항상 사람들 간의 분쟁 같은 것이 있어서 복잡하고 영화 만드는 걸 힘들게 한다 함.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같이 생활하기 때문임. 그런데 이번에 로물루스를 찍을 때는 배우들이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화기애애한 모습이 정말로 카메라 밖의 실제와 항상 똑같았고 이런 배우진을 가진 적은 처음이었다함. 그래서 이런 모습이 너무 좋았고 서로 잘 지내는 걸 보는 게 행복했다함. 대부분은 다들 알다시피 영화 만들고나면 다신 서로 안보는데, 이번 로물루스 배우들은 서로 친구 되서 잘 지내니까 좋았다함.감독은 시리즈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세트장을 최대한 진지하게 만들었는데 정작 배우들이 거기서 자기들끼리 재밌게 지내니까 진지한 분위기가 불가능했다고 너스레를 떰.
작성자 : stool고정닉
유대인 소드마스터가 땅크 몰고 아우슈비츠를 쳐부수는
2021년 6월 4일 러시아 펜싱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남자펜싱 선수/ 여자펜싱 코치였던 다비드 알렉산드로비치 두쉬만(Душман, Давид Александрович)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국제펜싱협회, IOC, 여러 유대인 단체, 폴란드 정부, 이스라엘 정부 등이 조의를 표했다. 스포츠계는 몰라도 폴란드나 이스라엘은 왜 조의를 표했는지 의아할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자 1941년 모스크바 펜싱 챔피언이 된 검사였고 2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로 진격한 소련군 중 하나로 T-34를 몰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펜스를 가장 먼저 박살낸 인물이자 그 직후 죽어가는 유대인들에게 통조림을 나누어주는 등 구호활동을 했고 이후 소련 내외에서 자신이 목격한 아우슈비츠의 참상에 대해 가장 핵심적인 증인으로 참여했으며, 그 뒤 여자펜싱 코치로 자신이 이끄는 팀에 여러번 메달을 안기며 편하게 사는 듯……하다가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 당시 바로 건너편 기숙사에 머물다가 죽을뻔한 목격자로 본인은 유대인이란 의식이 없었음에도 20세기 유대인이 목격한 가장 끔찍한 두 공포(홀로코스트, 뮌헨 테러)를 본의아니게 한 인생에서 겪은 기막힌 운명의 소유자였기 때문. 1923년 폴란드 그단스크, 그 당시 단치히 자유시에서 유대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소련으로 이주하며 그 이후 평생을 러시아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의사이자 소련군 군의관으로 적백내전 여파로 장군 티오가 텅텅 빈 와중에 의무책임자로 형식상이지만 별(장군)도 단 인물이었다. 이를 보면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사상의 이유로 소련으로 갔거나 최소한 적백내전때 의용군으로 참여했다 돌아가지 못한 인물로 추정. 본인은 유대인이란 자각이 없었는지, 혈통을 제외하면 유대교도 믿지 않았고 유대인 커뮤니티에 참여하지도 않았었다. 군의관에서 예편하고 스포츠의사가 된 아버지의 영향으로 다비드는 펜싱을 시작했고 1941년 18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시의 펜싱 챔피언이 되었으나, 그해 6월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전개하며 나라 전체가 전쟁의 화마에 휩쓸리게 된다. 다비드는 펜싱소드보다 더 효율적으로 파시스트들을 죽일 방법을 찾기 위해 소련군에 자원입대했고, 처음에 소련군은 미성년자에 유망한 운동선수라는 이유로 그의 입대를 거절했지만 그는 서류까지 속여가며 억지로 소련군에 들어가 전차병이 되었다. 그는 소련 기갑계의 살아있는 전설 중 하나가 된다. 동시에 그는 부상과 악연이 깊은 인물이었는데 주코프가 처음으로 지휘한 작전으로 유명한 옐냐 공세에서 대전차지뢰에 부상을 입었으나 외과 수술 후 다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고 쿠르스크 전투에서 포탄 관통으로 두 번째 부상을 입었다. 어지간한 나라라면 두 번이나 죽을뻔한 전차병이면 후방으로 보내줄 만도 한데 소련은 그런거 없었고 이후 제1벨라루스 전선군 소속으로 다시 전투에 투입, 바그라티온 공세에 참여한다.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검 대신 포탄으로 낙지 파시스트들의 대가리를 깨고 그들의 시설물을 부수는 아름다운 소련군의 전통을 발견했는데, 바그라티온으로 전세가 기운 후 그는 여느때처럼 폴란드에서 진격하던 중 정체불명의 나치 시설을 확인한다. 이에 그는 T-34를 몰아 그 시설의 펜스를 가장 앞장서서 밟아 부숴 보병부대가 지나갈 수 있게 통로를 만들었다. 이후 그 시설이 일종의 '수용소'였으나 감시하던 나치들이 도망친 후 수감자들만 남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된다. 소련 포로들은 거의 죽었고 폴란드와 그 외 유럽 전역의 '특수한' 포로들만 남은 상태라는 것을 확인한 그와 기갑부대 동료들은 굶어 죽어가는 수감자들에게 전차에 있던 모든 전투식량과 통조림 물을 나누어준 뒤, 뒤따라오던 보병들에게 인계하고 더 많은 대가리를 깰 나치를 찾으러 다시 전차 엔진에 시동을 걸고 움직였다. 나중에야 그는 그 시설의 이름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라는 것을 알게된다. 이후 전쟁 막바지 독일 전역에서 다시 한번 포탄 파편에 부상을 입은 그는 더 이상 전선으로 복귀할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지만 소련군의 한 여성 군의관이 수술 끝에 그를 살리는데 성공한다. 그는 이 여성 군의관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군의관이자 의사였던 아버지를 오랫동안 보아왔음에도 여성이 간호사가 아닌 의사로서 중상자를 치료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훗날 여자 펜싱팀을 이끄는 계기가 된다. 전쟁이 끝나고 갑자기 다비드 두쉬만은 중요한 사람이 된다. 그가 이름도 모르고 일단 밟아부순 그 수용소가 나치 파시스트들의 가장 큰 악의이자 인류사의 오점인, 수백만의 유대인, 룸인/집시, 성소수자, 소련인 및 폴란드인등을 학살한 아우슈비츠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수용소를 발견했을 때는 별다른 수색도 없었고 이미 나치들은 대다수 수감자들을 데리고 도망간 상황이었으며 소수의 수감자들만 남은 상황이어서 정확한 상황파악이 안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에휴 ㅈ같은 파시스트들 사람들에게 먹을것도 안주고 도망갔네 굶어죽어가는 몰골들 좀 보소"라고 학을 떼었는데 나중에 더 자세한 참상을 알게되자 자신이 있던 자리가 얼마나 끔찍한 곳이었는지 깨닫고 경악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소련 내외에서 여러 아우슈비츠 관련 증언을 하며 홀로코스트의 핵심 증언자중 한 명으로 남게된다. 이후 그는 펜싱선수로 복귀, 5년만에 어렵게 재활에 성공하고 전쟁으로 얻은 무수한 부상을 뒤로한채 1951년 러시아 에페 챔피언이 되었다. 하지만 끝끝내 세계적인 지위를 누리지는 못하고 선수로서는 은퇴를 결정하게 된다. 그 후 그는 놀라운 결정을 내리는데 1952년 소련 여자펜싱 국가대표팀 코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여자 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때였고 일부 보수적인 이들은 남자가 여자팀의 코치나 감독이 되는 걸 불명예로 여길 정도였는데 그는 전쟁중 자신을 생사의 기로에서 구해낸 인물이 여성 군의관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여자펜싱 선수들도 스포츠에서 평등한 권익을 누려야한다는 생각에 기꺼이 소련 여자펜싱의 초창기 주춧돌이 되었다. 그 후 우여곡절이 많았던 과거를 뒤로하고 소련 여자펜싱이 메달을 석권하는 것을 이끌기도 하며 뛰어난 펜싱코치로 잘 사나했……는데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 당시 그는 소련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사가 일어났던 이스라엘팀 숙소 바로 건너편의 소련팀 숙소에 있었고, 이후 그 당시의 참상과 공포에 대해 증언하게 된다. 그는 사건이 끝난 후에야 이것이 유대인들을 노린 테러라는 것을 알게되고 자신이 유대혈통이라는 것이 뒤늦게 떠올라 식은땀을 흘렸다고 한다. 잘못하면 그 역시 희생자 중 하나가 되었을 수 있었기 때문. 좀 특이한 인연이 있는데 1970년 다비드는 각계 펜싱계 인사들과 만나던 도중 한 젊은 서독 남자펜싱 선수를 만나게 된다. 그 선수는 다비드가 소련인이고 독소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으며 유대인이기까지 한데 자신은 동독도 아닌 서독 선수라는 것에 잔뜩 긴장했으나 다비드는 아무런 국가, 인종에 대한 편견 없이 그에게 따뜻한 인사와 여러 조언을 건내었고 이에 그 서독 선수는 감격해 평생 다비드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펜싱 선수가 바로 훗날 독일 펜싱의 전설이자 IOC 위원장까지 하는 토마스 바흐. 이 전설적인 붉은 군대의 영웅이자 아우슈비츠의 해방자, 러시아 여자펜싱의 아버지중 한 사람은 이후 스포츠인인 동시에 그 시대 유대인으로 자각하지도 않았던 본인이 보아야했던 두 번의 반유대주의 참사의 목격자로서 그 끔찍함에 대해 전해야 했던 시대의 증인이기도 했다. 그는 전쟁 도중과 직후 대조국전쟁의 공로로 두 개의 적성훈장, 1995년 러시아 스포츠계에 대한 공로로 2급 조국공로훈장, 그리고 2020년 자서전 출간 후 2차세계대전에 대한 연구 공헌 및 그가 생전에 한 여러 영웅적 행위를 기리기 위해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을 받았고 2021년 눈을 감았다. 그의 격동적인 인생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은 1년 뒤 자기가 소속되어 싸웠던 소련이란 나라가 없어지고 생겨난 두 나라에서 전쟁이 발발, 이상한 인간들이 니가 낙지니 내가 낙지니 요상한 짓거리 하는 꼬라지를 안보고 눈을 감은 점 정도.
작성자 : 나쿠로이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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