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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벙글 자기의지로 4번 월북한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으며 이사람만큼 김일성 일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현재 김정은도 이사람을 굉장히 좋아함 이사람은 원래 평범한 일식 요리사였음 그러다가 1982년 북한에게 스카우트되어 1년동안 일하게 되었는데 이사람이 북한에서 연 초밥집이 장사가 너무 잘돼서 항상 가게가 붐볐다고 함 이 얘기가 김정일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겐지의 초밥맛을 맛본 김정일은 아주 만족하며 아예 단골손님이 됨. 한번은 팁으로 5만엔 정도를 줬는데 그당시 북한 환율로 계산해보면 평범한 직장인의 2~3배되는 봉급이었음 우리나라로 치면 500~900만원 정도로 팁을 받은것. 하지만 스카우트 관계였기때문에 다시 일본에 돌아가서 평범한 요리사 생활을 하는데 당연히 만족이 될 리가 없었음. 평양에서는 돈도 엄청 벌었고 다들 자기를 알아줬는데 일본은 월급도 쥐꼬리만하고 대우도 좆같아서 북한에 있었던 호화로운 생활이 그립기 시작했음 그렇게 다시 북한으로 다시 갈 기회만 기다리다가 1987년, 브로커가 "이번엔 3년 어떻겠노?" 제안하자 바로 승낙하고 북한으로 다시 들어감 워낙 김정일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잘해줬던지라 1989년부터는 아예 김정일 전속 요리사로 일하기 시작함 김정일이 이렇게 총애하자 겐지는 감명받으며 김정일에게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라는 일본 속담까지 꺼내며 서로 물고빨아주던 아주 그런 사이까지 됨 김정일은 겐지가 북한에 아주 눌러살길 원했음 그래서 월급도 더 주고, 벤츠도 주고, 고급 아파트도 주고, 20살 연하의 어린 여자까지 줌 참고로 이 여자는 겐지가 반한 여성인데 김정일이 그걸 다 알고 지시해서 결혼까지 함 이 양반은 원래 일본에 아내랑 자식도 있었는데 김정일이 위자료 문제까지 다 해결해줌 ㅋㅋ 겐지는 충성의 의미로 일본 여권까지 반납하고 김정일의 '최측근'으로서 새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함 김정일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골프, 사냥, 낚시, 승마 등등도 같이 즐기고, 1990년에는 조선로동당에 입당까지 하고 그당시 어린 꼬마 김정은의 놀이상대도 되어줌 당시 김정은은 북한 내에서도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북한 고위직 탈북자도 김정은의 존재를 몰랐었음 이정도되면 얼마나 김정일이 겐지를 신뢰하는지 알 수 있음 시간이 흘러 1996년 후지모토는 식재료를 구하러 일본에 갔다가 그대로 체포당함 다시는 북한에 가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서야 겨우 풀려남 근데 다시 평범한 일본 요리사로 살아가기에는 이미 뇌가 북한 최고위층 삶의 도파민에 찌들어버린 상황 결국 다시 1998년 중국을 거쳐 다시 북한으로 들어감 이번이 3번째 월북 그러던 어느날 이양반이 식재료를 구하러 중국에 갔을때 몰래 일본 경찰한테 전화를 하다가 들킨 사건이 일어남 이것때문에 자택에서 구금되게 됨 겐지는 김정일 로열패밀리의 생일이 되면 자기를 부르겠지 생각했으나 1999년에도 자신을 부르지 않았고 폐인처럼 1년 반동안 술만 먹었음 2000년 4월이 되어서야 김정일의 부름을 받게 되었고 이때 겐지는 울면서 용서를 빈 이후에 다시 그의 요리사로 일할 수 있었으나, 이 일을 계기로 본인도 언제든 아오지탄광 갈 수 있겠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닫고 이번엔 진심으로 북한을 벗어나기로 마음먹음 겐지는 2001년에 김정일에게 홋카이도식 성게알 요리를 대접해드리겠다고 꼬드기며 일본으로 식재료를 구하러 가기로 함 탈북직전 김정은을 만나 포옹하며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그렇게 겐지는 일본으로 넘어가고 힘겹게 탈북을 함 이후에 2002년 이후로 일본에서 이양반은 북한에 김일성 로얄패밀리 일가에 대한 책도 쓰고, 인터뷰도 하는 등 광역 어그로를 끌면서 살아감 처음엔 사람들이 소설 취급하면서 잘 안믿었는데 진술이 상당히 일관성이 있었고 북한 고위층 출신 탈북자도 못맞췄던 김정은이 김정일 다음 위원장이 될 것이라는 것까지 이사람이 맞춤 일본에서는 저렇게 어그로 끌어대니 언제 암살당할지 몰라 저렇게 가리고 다녔다고 함 그렇게 일본에서 살아간지 꽤 된 어느날, 후지모토가 편의점에서 뭐 좀 사고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오더니만 쪽지를 건냈다고 함 내용은 '안전은 보장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방북하라' 처음에는 씹었으나 한달 뒤 그 사람이 다시 찾아와 "2001년의 약속을 지켜달라" 라는 말을 전했는데, 이 내용은 김정은과 자신 둘 밖에 모르는 이야기였으며 이를 확신한 그는 북한에 잠깐 방문함 (용서를 구하는 후지모토 겐지와 이를 반겨주는 김정은) "배신자가 돌아왔습니다" "됐다 배신한 건 잊은지 오래다. 어릴때부터 함께 놀았던 것 기억하고 있고 고마웠다. 앞으로는 언제든지 조선(북한)에 와도 좋다" 그리고 사실 굳이 김정은의 환대가 아니더라도 이 사람 책을 보면 딱히 북한에서 위협 받을만한 건덕지가 없기는 했음. 물론 김씨일가의 사생활을 적어놓기는 했지만 책 내용에선 그다지 나쁘게 적어놓지 않았기 때문 그 이후 2016년 다시 북한으로 넘어감 이번이 자신의 의지로 월북한 4번째 월북 현재 그는 한 백화점에서 일식집을 차려 운영하고 있다고 함 (북한에서 일식집 차려 요리하고 있는 후지모토) 이후에 또 무슨 사건으로 체포됐다고는 하는데 현재는 생사불명임 아마 살아는 있을듯
작성자 : 일리아스고정닉
흥선대원군은 과연 전통건축의 구세주인가?
요즘 글을 거의 안쓰고 있는데, 경복궁 관련해서 말들이 많길래 경복궁을 중건한 인물인 흥선대원군에 대해 말해보려 함.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흥선대원군에 대해 별 악감정이 없으며 오히려 그가 시행한 여러 개혁정책들은 꽤나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함. 하지만 그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큰 실수를 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으로 인해 고종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되었음. [광화문과 북악산] 다만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오로지 문화재와 건축에 국한된 부분이지 이것으로 흥선대원군에 대한 비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님. 역사에 가정은 없기에 그가 집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문화재들이 지금 남아 있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음. 다만, 흥선대원군에 대해 경복궁을 중건했다는 사실만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함. [안동 호계서원, 산청 덕천서원, 안동 묵계서원, 밀양 칠탄서원. 사진 : 문화재청]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서원철폐령이었음. 서원은 조선시대에 지방권력을 틀어쥐고 갖은 횡포를 부리고 있어 지방 관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놔두고 있었음. 특히나 세도정치기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백성들의 삶이 극도로 궁핍해져 가고 있던 상황에, 서원의 악행은 묵과할 수 없던 부분이었음.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47개소의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훼철시킴. 정책적 측면을 떠나 문화재적 가치로만 접근하자면,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에서 서원은 궁궐 다음으로 권위 있는 건축물이었고, 또한 그 수도 많았기에 당시에 1000개소가 넘던 서원을 극소수만 남기고 모조리 없앴다는 것은 조선 건축의 한 뿌리가 사라진 것과도 같음. 훼철 이후 여러 서원들이 재건되었는데, 그 면모를 살펴보면 입지나 배치가 훌륭한 곳들이 많아 대원군에 정책에는 수긍하면서도 50년만 더 버티지 하는 생각도 들긴 함. 특히나 한국전쟁 중 서울 근교의 우저서원, 파산서원, 사충서원 등 남아있던 47곳 중에서도 소실된 것이 많은 점은 더욱 안타까움. [경복궁 흥례문]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복궁임. 경복궁은 1592년 소실된 이후 몇몇 왕들이 찾기는 했으나 270년간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음. 반대로 말하자면 조선 초기 궁궐의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었음을 뜻함. 조선 초기는 경복궁-창덕궁 양궁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태종의 경우에는 창덕궁에서 주로 머물렀으나 세종 등의 경우에는 경복궁을 선호하였음. 따라서 경복궁에는 조선 초기, 특히 세종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음. 세종조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많은 과학적 성과들의 흔적이 1865년까지 경복궁에 남아 있었는데, 옥루, 앙부일구 등이 설치되어 있던 흠경각과 일영대, 천문관측을 하는 장소였던 간의대 등이 남아 있었음. 그러나 경복궁 공사가 시작되며 이것들은 모조리 헐리고 말았음. 이를테면 간의대 옥석의 경우에는 근정전 뜰의 품계석으로 쓰였음. 또한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가 "(전략) 우리 나라에서 제일 웅장한 건축인데 지금껏 우뚝 솟아 있어 마치 영광전과 흡사하다."고 하였으며 같은 기록에서 경복궁 터를 다녀온 호조판서 심이지가 보루각 터를 둘러보았으며 흠경각은 들보와 서까래가 썩었다고 했는데, 이는 1794년의 기록임. 이 흠경각은 광해군 때인 1613년 재건한 것인데, 당시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임. 다만 효종조 잠시 언급되었다가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던 것 같음. 물론 정조 때에도 이미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던 것 같지만, 중건 시점이 이로부터 70년 뒤이니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있음. [경복궁 경회루] 흔히 조선 초기 경회루에 대해서는 돌기둥에 용 조각이 있었음에 주목함. 성종조에 조각된 이 돌기둥은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다가, 중건 시점에는 48개 중 3개만 서 있고 나머지는 무너져 있었다고 함. 중건 시점에서 용 조각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돌기둥들이 화재로 상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서 계체석으로 썼다고 적혀 있음. 아마도 경회루 기단의 돌들이 검게 변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돌기둥들을 깎아 재사용한 것으로 보임. 물론 불에 탔다고 하더라도 조각은 분명 남아 있었을 것임.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다른 용도로 재사용되었기에 그 모습을 알 길이 없음. 현재의 돌기둥들은 삼청동과 송계별업 등지에서 새로 떼어 와 제작한 것들임. 가끔 가다 용 조각은 오래되서 지워진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보임. 한편, 경복궁을 재건하던 당시 근정전과 경회루의 기단과 월대는 다시 제작되었음. 당시 기록을 보면 외형은 약간 손상이 있었으나 돌을 뜯어내니 안쪽은 물이 스민 흔적이 없이 완벽했다고 함. 기단 안쪽을 채우던 돌들은 그대로 사용했다고는 하나 월대와 기단은 새롭게 조성한 것으로, 조선 전기의 흔적이 아님. [경희궁 흥화문과 숭정전. 사진 : e뮤지엄]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손실은 바로 경희궁임. 경희궁은 비록 직전 왕들인 헌종-철종조(1834-1864)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헌종 이전의 순조를 비롯하여 인조, 숙종, 영조 등 많은 임금들이 애용하던 궁궐이었음. 지금은 터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과 경희궁 두 궁궐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남아있었다면 큰 역사적 가치를 가졌을 것임.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하며 부재를 충당하기 위해 경희궁이 헐리게 되었음. 따라서 경희궁은 위 사진과 같이 5개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사라졌음. 막상 헐고 나니 상한 목재가 많아 대부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함. 경희궁은 이후 망국 이전까지 이따금 군사를 사열하는 등의 장소로 쓰이다가 망국 이후 남은 건물들은 모조리 팔려나가고 그 터에는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음. 숭정전은 일본 사찰에 팔렸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고, 정문인 흥화문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신사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쓰이다가 해방 이후 그 자리에 들어선 신라호텔의 정문으로도 오래 서 있었음. 흥화문은 1988년이 되어서야 경희궁으로 되돌아왔으나, 옛 터에 구세군 건물이 들어서 있어 원래 자리는 되찾지 못했음. 참고로 박석 갖고도 시끄러운 거 같은데, 내 추정으로는 임란 이전까지는 박석이 없었을 것으로 보임. 현재 경복궁 내에서 박석이 사용된 장소는 근정전 앞마당뿐임. 그런데 영건일기에 따르면 경희궁과 안현(안국동고개. 현재 광화문에서 안국역으로 넘어가는 길)에 깔려 있던 박석들을 싸그리 철거해서 들고 왔고, 그것도 모자라 강화에서 새로 떼어 왔다고 함. 애초에 박석은 바닥에 까는 돌이니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한들 굳이 철거한 후 다시 깔 필요는 없어 보임. 중건 이후 고종은 30년도 안되는 경복궁 생활 동안 멀쩡한 침전 놔두고 구석에 들어가서 살다가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은 이후 또 다시 폐허가 되었음. 군주의 위상을 세우겠다고 엄포한 고종은 또 다시 궁궐 공사를 시작했고, 여기에 더불어 평양의 풍경궁이나 안동별궁을 비롯해 각종 토목공사를 벌였음. 경운궁은 완공된 지 1년만에 전소되어 중층 중화전 건물을 단층으로 재건하는 촌극을 벌였고, 풍경궁은 완공도 못 한 상태에서 일본군이 러일전쟁 중 점거하여 돈낭비로 그쳤음. 언젠가 고종의 토목공사 욕심에 대하여 제대로 다루게 된다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음. 어쨌든 이번 글에서는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역사를 벌인 흥선대원군에 대해 알아보았음.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경복궁이 없는 서울을 상상하기 어려움. 그러나 그것만으로 대원군을 찬양하는 것은 동전의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이 아닐 수 없음. 더군다나 그 역사적 맥락으로 살펴봤을 때, 경복궁 중건은 결과적으로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끈 시발점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경복궁이 갖는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19세기 조선에 그대로 대입하여 흥선대원군을 평가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임. - dc official App
작성자 : BABO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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