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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로갤문학] 리사의 후회.txt

우끼끼뉴비(14.63) 2021.01.11 16:04:09
조회 3782 추천 48 댓글 43
														



[브금]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 황지우, <뼈아픈 후회> 中




1월 초, 한겨울 답게 엄청 추운 어느 날의 오후.


또슈, 아니 이제는 오레하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메타몽의 전 수장, 고닉 리사는


약속 장소 인근의 벤치에 홀로 앉아


텅 빈 허공을 노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메타몽을 탈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을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다.


"너희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아니, 나를 제외하면 메타몽 모두가 깨끗해.


나만 떠나면 돼. 나만...


메타몽은 가족이니까......"




그렇게 말해놓고서 떠났다.


리사는, 이제 막 메타몽의 수장으로서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을 때쯤 휑하니 떠나버렸다.


사실 리사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리사가 메타몽을 떠난 진짜 이유는,


메타몽이 공격받는 게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로갤에선 리사의 메타몽 탈퇴가


누구 때문인지 갑론을박을 벌였으나,


리사는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다.


아니, 리사는 메타몽의 수장을 맡은 이후로


길드의 모든 패배와 실책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다.


도대체 왜였을까.


예전의 자신은 그렇지 않았는데.


늘 당당하고, 거만하고, 실수 따위 개의치 않는


그런 여자였는데.










“여기서 불쌍하게 뭐해?”


고개를 돌리자 벤치 옆에서


우끼끼파라다이스의 전 수장,


샴푸독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커피캔이 두 잔 들려 있었다.


리사는 따라 웃으려고 했지만, 입꼬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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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걸까...”


나란히 앉아 한 마디 대화도 없이 커피만 홀짝이길 10여 분.


리사가 무겁게 입을 뗐다. 샴푸독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고추잎도, 에레게도...


내가 서포트했던 사람들은 모두 내게서 떠났어.


왜일까. 혹시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리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조용히 자신의 커피를 다 마신 샴푸독은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너는 너무 상냥해서 문제야.”


“상냥해서 문제라고?”


“그래. 너무 착하고 다정해서.”


샴푸독은 구원의 섬에서 동전 꼽기하다가


정지 당한 유저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중한 목소리였다.




“고추잎이 처음 아르카나 했을 때, 솔직히 좀 못했잖아.


툭하면 짤리고, 딜 넣는 것도 엉성하고 포지션도 엉망이고.


그때 네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해?”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한 번도 고추잎을 탓하지 않았어.


괜찮아, 잘할 수 있어, 너 잘못 아니야,


갤에서 남들이 하는 말 신경쓰지 마,


다음부턴 더 잘할 거야.”


샴푸독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리사는 숨이 막혔다.


"천상 콜 못한 내 잘못이야,


내가 음진 잘못 깔았어,


내가 수연 썼어야 했는데 실수했어,


다 내 잘못이야, 넌 잘하고 있어.”


뚝, 샴푸독의 말이 끊겼다.


샴푸독의 눈매는 평소의 그 눈이 아니었다.


우끼끼파라아디스의 길드장이


섬 점령전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그게 리사를 괴롭게 했다.




“너는 고추잎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했지.


하지만 또슈야, 고추잎은 바보가 아니야.


자기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어.


그리고 늘 괴로워했지.


너처럼 출중한 서포터가


자신 같은 3류 딜러 옆에서 썩고 있다는 걸."


“그런!!!”


잠자코 듣고 있던 리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고추잎은 3류가 아니야!


내가 본 최고의 아르카나였어!”




샴푸독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이래서 더 힘들어했던 거야. 고추잎은...”


"......”


“실제로 고추잎은 점점 더 잘하게 됐고,


증명의 전장에서 캐리도 몇 번이나 했지.


하지만 고추잎은 언제나 네가 과분하다 여겼어. 언제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리사.


샴푸독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건 또슈, 네가 짊어진 업보 같은 거야.


그리고 너와 함께 할 나작딜이 짊어져야 하는 숙명이지.


넌 로아 최고의 서포터야.


너와 함께 하는 딜러는 최고가 아니면 안 돼.


스스로의 빛이 바래는 것은 물론이고,


너까지 나락에 빠뜨릴 수 있으니까.”




샴푸독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움직일 생각도 못하는 리사에게 샴푸독은 덧붙였다.


“나방은 빛에 홀려서 달려들지, 타죽을 걸 알면서도.


선택지는 둘 중 하나야. 타 죽든가, 날개를 꺾고 살아남든가.”


샴푸독은 씁쓸하게 웃었다.


메타몽에선 나방 두 마리가 불탔고,


나머지는 그리 될까 두려워 빛을 밖으로 내쳤다.




“날 춥다. 얼른 들어와. 오늘 백마형 온다잖아. 인사는 해야지.”


샴푸독은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리사는 여전히 넋을 놓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언젠가는 해줘야 할 이야기였다.


기왕이면 같은 서포터,


바드인 자신이 해주는 게 나으리라 생각했을 뿐.


“이걸 참, 질투를 해야할지 측은해해야 할지......”


샴푸독은 마지막으로 중얼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리사는 그 후에도 한참 동안까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고추잎과 에레게의 얼굴이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조금 울 것 같았다.


둘 다 떠나보낼 때는 태연했는데,


이제 와서야 조금 울고 싶어졌다.


정말로 자신 때문일까. 자신 때문에 모두 망가진 걸까.


자신의 선의와 순수가 파트너를 파괴해버린 것일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언젠가 들어봤던 시구를 조용히 읊조려 보았다.


뜨거워지는 눈을 손등으로 꾹 누르는데,


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추워 죽겠는데 여기서 뭐하냐?”




놀라서 돌아보자, 쾌활한 인상의 청년이 서 있다.


그래, 저 남자가... 우끼끼파라다이스 현 수장 안녕남시,


로아갤 고닉 백마,


오늘부터 자신의 새 파트너.


그는 리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글싱글 잘도 웃고 있었다.




“몰랐는데 은근 감성적이네... 나 그 시 알아.


황지우의...... 그 뭐였더라. 뼈아픈 후회였나? 맞지???”


시적인 건 오히려 백마 쪽이다.


제목까지 꿰고 있다니.


리사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눈만 끔뻑이고 있자니


백마는 껄껄 웃으며 손을 휘저어 보였다.


“고등학교 때 언어 수업만 좋아해서 이런 것만 잘 생각나더라.”


“아......”


“그나저나 불편해 하지말고 편하게 대해. 이제 파트너인데.”




태연하게 리사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백마가 말했다.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다.


리사는 얼떨떨해 하면서도 '알았어요'라고 대답했다가


급히 '알았어'로 정정했다.


백마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대뜸 악수를 청한다.


“로아갤 레전드 리사를 나작바로 맞게 되다니, 영광인데?


파트너 된 기념으로 악수 한 번 하자고.”


리사는 어설프게 마주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백마의 손 바로 앞에서 멈췄다.




“나는......”


리사가 무겁게 입을 뗐다.


백마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널 부서지게 할지도 몰라.


내 옆에 있던 사람들, 내 나작딜이었던


두 사람 모두 부서졌어.


그리고 어쩌면 너도 그렇게 될지 몰라.”


리사의 목소리에 습기가 찼다.


그녀는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난 두려워. 파트너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게,


누군가가 또 내 옆에 왔다가 다시 가버리는 게,


이제 좀 이 사람을 알 것 같은데 떠나버리는 게... 두려워.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무서워.”




백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누구와도 파티를 하지 않을 거야?”


리사는 화들짝 놀라 백마를 바라봤다.


백마는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상대가 망가질 게 두려워서 함께 하지 않는다고?


떠날 게 두려워서 처음부터 인연을 만들지 않아?


그런 건 헛소리야, 또슈.”


그리고 백마는 느닷없이 시구를 읊었다.




北方有佳人(북방유가인)

북쪽에 어여쁜 사람이 있어


絶世而獨立(절세이독립)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서 있네.


一顧傾人城(일고경인성)

한 번 돌아보면 성을 위태롭게 하고


再顧傾人國(재고경인국)

두 번 돌아보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


寧不知傾國(영불지경국)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佳人難再得(가인난재득)

어여쁜 사람은 다시 얻기 어렵도다.




리사가 어안이 벙벙해서 멍청하게 바라보자니


백마는 멋쩍게 웃었다.


“중국 사람 이연년이 지은 시야.


뭐, 결국 경국지색의 여자를 얻기 위해서는


나라가 기울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거고,”


백마는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쳐 보였다.


“세계 최고의 서포터를 얻으려면,


딜러 수명이 불탈 각오쯤은 해야 하는 거지.”


“너......”


“전에 두 사람이랑 너랑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나는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네 말대로 나도 망가지고 결국 네 곁을 떠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나중에 걱정할 문제야. 지금은 아냐.”


백마는 재차 손을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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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슈발 블랑',


걱정마. 네가 아무리 멀리 가 있어도


백마 탄 왕자님처럼 금방 쫓아갈 테니까.”




그 자신만만한 얼굴 위로,


문득 이전의 두 사람의 얼굴이 스쳐간다.


굳어 있던 리사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흘렀다.


아아, 어찌 이리도 자신의 파트너들은 한결같은가.


무모하고, 자신만만하고, 그리고...


어찌 이리도, 환히 웃는가.


아직도 백마는 손을 내밀고 있다.


리사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 손을 잡고, 굳게 악수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그렇다. 진정 뼈아픈 후회는


사랑해서 누군가를 망가뜨리는 것에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망가뜨릴까봐 사랑하지 않는 것에서 올 터다.


언젠가는 백마도 자신을 떠날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누가 올지는 모른다.


얼마나 많은 나작딜이 자신의 곁에서 불탈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불타러 오는 나방들이 있다면,


자신을 찾는 나방들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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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있는 힘껏 안아주리라.




아주 오랜만에 리사는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곧 군단장 레이드가 시작된다.


나작딜이, 눈앞에 왔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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