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일행이 떠난 뒤, 튜링은 T1641을 점검했다.

[하체 검사 완료 - 손상 경미함. 결론 - 행동 능력에 지장 없음.]

"설명해 주겠니?"

튜링은 T1641에게 물었다. 짐작하지만 단호하게.

"T1641은 튜링과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T1641은 말했다. 여전히 무념한 눈빛이었지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잖아. 잠시 피난을 가라는 뜻이지, 영영 돌아오지 말라는 게 아니야. 정화자들이 떠나서 안전해지면

돌아와도 돼."

"하지만... 그러면 튜링이 혼자가 됩니다."

"뭐?"

"T1641과 한나가 떠나면, 튜링은 혼자서 정화자를 상대해야 합니다. T1641은 튜링이 위험해지는 것이 싫습니다. T1641은 튜링을 돕고

싶습니다."

"...내 말 들으렴. 난 섹터의 관리자지만 넌 평범한 지능체잖니. 정화자는 아직은 날 어쩌지 못하겠지만, 널 발견하면 곧장 죽이려 들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넌 여기 있으면 오히려 짐만 돼!"

"...죄송해요."

T1641은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고, 말이 심했음을 깨달은 튜링은 무릎을 굽혀 T1641과 눈높이를 맞쳤다.

"나야말로 미안해, T1641. 네 알고리즘이 완전하지 않다는 걸 깜빡했어... 감정 시스템이 기준치를 초월할 수 있도록 다른 모듈을 희생했으니..."

"죄송해요 튜링, t1641이 한나처럼 뛰어나지 못해서... 노력했지만, 도저히 한나를 따라잡을 수 없어요. 한나는 데이터 센터에서 계획도 구성할 수

있는데, T1641은 튜링에게 짐만 되고..."

튜링은 고개를 저으며 T1641을 꼬옥 끌어안았다.

"너희의 가치는 테스트 점수로 매기는 게 아니야. 너도 한나도, 내겐 똑같이 소중해."

"...그럼, T1641은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다른 지능체 한 명을 붙여 줄 테니, 곧장 데이터 센터로 가렴. 이건 임무야. 또 멋대로 굴면 안 돼, 알았지?"

"네! 튜링의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튜링은 다른 지능체를 불러 T1641을 데려가게 했고, 제어 콘솔 앞으로 돌아오자마자 통신 요청이 들어왔다.

>통신 요청 - 데이터 섹터.

"한나니?"

"저에요, 한나는 옆에 있어요."

노이즈가 낀 입체영상에 하늘색 머리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가슴팍엔 임시조립한 노트북과

같은 기기가 떠 있었다.

"같이 몇 가지 대책을 강구했는데, 당신의 의견도 듣고 싶어서요. 정화자가 너무 갑작스레 들이닥쳐서, 계속 여기에 숨어

있기는 너무 위험해요."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한나와 함께 섹터를 떠날 준비를 하세요, 곧 마중할 사람이 데이터 센터에 도착해요. 그들은 정화자를 쓰러뜨릴

능력이 있으니, 당신과 한나를 데리고 안전하게 로숨 섹터를 벗어날 수 있을 거에요."

"정화자를 쓰러뜨린다니... 로숨 섹터엔 전투 모듈을 보유한 지능체가 없지 않나요?"

"외부에서 온 방문객들이에요. 그중 한 명은 42Lab의 연구원이고요. 연산량을 담보로 거래를 했어요. 다만 요구한 양이 엄청나니, 미리 압축해서

준비해 주세요."

"잠깐만요, 갑자기 정보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우선, 그들이 신뢰할 만한 사람들인지는 어떻게 알죠?"

"그들이 직접 나서서 T1641을 구해 줬어요. 그리고, 함께라는 그 42Lab 연구원의 이름은 페르시카에요. 그녀의 프로파일도 확인했어요."

"페르시카요?!"

"아는 사이인가요?"

"정보가 너무 많이 쌓이는데... 정리 좀 할게요. 그 페르시카란 사람, 분홍 머리에 하얀 가운을 입고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나요?"

!삐이--

또다시 갑작스레 울린 시스템 알람음이 대화를 끊었다.

>관리 센터 방문 요청을 접수. 방문자 신분을 확인 중...

>신분 확인 - 중급 정화자.

"!!!"

"튜링? 여보세요. 튜링?"

"시간이 없어요, 페이쓰가 관리 센터에 왔어요. 그들의 연산량 청구서를 보낼게요. 나머지는 부탁해요... 안토니나."

"잠깐--"

뚜우우-

통신을 종료하기가 무섭게, 뒤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정화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화자의 통행 요청을 처리 중인가, 튜링?"

분홍색 단발머리에 온몸을 중갑으로 감싼 소녀가 입구에 서있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