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문득 어딘가에 누워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자신이 지금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가 생각해본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경기장에 도착해서 무겁던 짐을 라커룸 안에 풀어 놓은 후 잠깐 쉰다는 것이 잠이 들었었던 모양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깊이 잠이 든 모양은 아닌 모양인지 몸이 나른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라커룸의 하얀 천장과 하얀 불빛이 마치 어울려지듯 눈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조금씩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그 맑아지는 느낌에 그의 현재 나이와는 상관없이 다시 신인시절로 돌아가 처음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무언가 신선한 듯 익숙한 듯 한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저 단순히 조금 누워있을 뿐이었는데도 경기장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몸상태와는 달리 피로감이 사라져 있었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마치 날을 시퍼렇게 세워 놓은 것 같은 날카로운 사람들의 의심의 시선과

이것 혹은 저것이라는 모호한 경계에서 선택을 강요 받아 그것이 잘못된 선택인지 잘 된 선택인지 알 수도 없는 골치아픈 상황에 시달렸던 그였다.

비록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해결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를 따라다니던 알 수 없는 죄악감은 오늘 아침까지도 그를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그런 죄악감에 휩쓸릴 것 같아 그는 오늘 다른 이들 보다 경기장에 일찍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죄악감 조차 잠시 라커룸에 누워 쉬자 앞으로의 치열한 경쟁에 뛰어 들기 전 작은 축복이라도 되는 것 처럼 피로와 함께 날아간다.

이게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 대한 소중함이라는 것인가 하는 뿌듯한 느낌과 함께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마침 라커룸 밖에서 차츰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하는 걸 보니 그 말고도 누군가가 심란했던 모양인지 일찍 나온 모양이었다.

그것이 누군지는 상관없었다.

그는 간만에 마치 신인으로 돌아 간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그 동안 굳어 있던 몸을 움직여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옆에 있던 배트를 들어올린다.

얼마전 새롭게 주문한 배트에는 그의 이름이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고 새삼스럽지만 자신의 이름이 적힌 배트를 쥐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그마저도 즐겁다는 듯 피식 웃으며 배트를 어깨에 들쳐 맨 채 그라운드로 향하기 위해 라커룸 문을 열어 젖힌다.

마치 입단 후 처음으로 경기장을 방문 했을때 처럼 모든것이 처음으로 돌아 간 것 같은 새로운 기분을 느끼며 그는 짧은 복도를 지나 그라운드로 향하는 문을 연다.

문을 열자 이미 그 곳에는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마치 조금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 처럼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가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유니폼을 입은 남자는 그가 들어온 문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배트를 들고 덕아웃으로 온 그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겸연쩍게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