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에 넘쳐나는 혹평과 양도글의 소나기를 맞으면서

그래도 내 세번째 본진, 무사 전문배우가 되어가는 박해수님에 대한 의리를 지키러 다녀왔다.

초연에 프리뷰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확실히 완성도 있는 공연은 아니네.
무엇보다 스토리가 지나치게 커..;; 극이 스토리를 다 소화를 못해..ㅠㅠ

인물별로 이야기를 굵게만 짚어봐도,

일단 의자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라 말아먹은 방탕한 폭군이 아니라

어머니가 신라인이라는 자신의 출신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서

백제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던 백제의 마지막 왕이라는 역사적인 주장이 있는데,
(의자라는 뜻도 의롭고 자애로운 왕이라는 뜻임) 그런 측면에서 의자왕을 새롭게 다루려고 애쓴 흔적이 보여.
전쟁을 무리하게 진행시키고 있긴 하지만, 그건 전쟁에 미친 왕이 아니라 자주적인 정치판단이었고.
그러다가 연화를 만나서 왕으로서 자신의 고독한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은 그녀에게 빠져들고,
점점 집착하게 되고, 종국에는 그 마음 때문에 많은 걸 잃게 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사실 여기까지 쓴 의자왕 이야기만 가지고도 뮤지컬 한 편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계속 이야기 하겠지만, 작가가 담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정작 중요한 감정의 흐름들이 뚝뚝 끊어지는데, 연화하고 연결되는 인물들은 다 그래.. ㅠㅠ
특히 난 의자왕이 연화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와닿지가 않더라. 토로가 굵은 눈물을 눈앞에서 뚝뚝 쏟아내는데도
토로 잘운다... 연기 잘하네.. 하면서 한 발 떨어져서 보게 되더라...ㅠ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그게 의자왕만의 문제가 아니더라구.

진장군은 의자왕이랑 어릴적부터 함께 자란 충신인데,
연화와 전생부터 얽혀있는 운명적 인연으로 결국 연화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로 인해서 의자왕의 믿음을 잃고, 결국 어찌보면 제일 고통스럽게도
나라 망하는 것도 보고, 왕 죽은 것도 보고, 자기 이름도 명예도 잃고, 사랑하는 여인도 못보고 죽는데..
문제는 안슬퍼 -_-;;;;
일단 연화랑 뭐 그렇게 대단히 절절한 사랑인지 와닿지가 않아 ㅠㅠ

결론적으로 의자왕-연화-진장군 이 삼각관계가 어느쪽도 제대로 와닿지가 않았다는 건데,
이게 배우의 연기력 문제라든가, 나의 개인적인 감상 문제는 아닌 것 같애.
아무리 뮤지컬이 스토리를 세심하게 푸는 장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물들의 중요한 감정선은 와닿게 해줘야 하는 거잖아.
근데 이 삼각관계 이야기만 하기에는 또 다른 인물들의 사연도 풀어야 하고,
백제의 마지막도 슬프고 장엄하게 그려야 하니까
결국 이들의 감정은 관객에게 설명하는 식으로..주입식 사랑이 된 듯;;

그 바람에 연화는 그냥 눈 멀고 본의 아니게 어리바리 어장관리나 하는 이쁜 무당이 됐음;;
게다가 그 와중에 출생의 비밀도 있고, 예식 장군이랑 악연도 있고..
이게 무슨 일일드라마도 아닌데 등장인물들이 전부다 얽히느라고 고생고생;;
진장군과의 러브라인이 잘 살았으면 참 애절했을 여주인공인데,
내 눈엔 그냥 분위기파악 못하는 약간 민폐 캐릭...

예식장군은 현재의 왕이 누군지보다 궁극적으로 백제를 위해 일을 꾸미는,
어찌보면 그 시대의 혁명가 캐릭터인데, 화야의 복수심을 읽지 못하고 잘못 결탁해서
결국 자기 손으로 백제를 팔아넘긴 꼴이 되어버린 비극적인 충신.
이게 잘만 그리면 예식장군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극 하나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캐릭터인데,
배경 설명부터 차근차근 해주지 않고, 저 많은 이야기의 소용돌이에 파묻히다 보니까
예식장군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놓쳐버리는 관객들도 생길 것 같더라.

마지막에 예식장군의 최후는 비장하고 슬픈 이야기였는데,
역시 스토리 따라가기도 바쁘다보니까 아.. 안됐다..대신 죽었네.. 이 정도 감정 ㅠㅠ
무려 본진님인데도 죽는데 눈물이 안났어 ㅠㅠ

화야는 어릴적에 백제 왕족에게 겁탈당해 아이까지 낳고,
또 그 아이를 잃기까지 한 것으로 알고는 복수심으로 평생을 살아온 신녀인데,
뻥 안치고 이 두 줄이 넘버 하나에 그냥 설명하듯이 실린 게 다야.
그 복수심이 결국 백제를 말아먹고, 등장인물 전부를 죽인건데 -_-;;

여기까지 다 읽은 횽이 얼마나 될지도 사실 잘 모르겠는데,
암튼 이 인물들 이야기 하나하나, 사실 되게 재밌는 스토리야.
문제는 이게 뮤지컬로 두 시간에 압축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지...ㅠㅠ
이건 최소한 엄청 큰 스케일의 영화나, 대하드라마로 풀 이야기지
두 시간도 채 안되는 소극장 뮤지컬에 다 담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것 같아..;
그런데도 무리하게 스토리텔링에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무슨 드라마 빨리감기로 본 것처럼 내용만 남고,
어떤 인물에게도 감정 이입이나 애정을 가질 여유가 없었어.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니라 수업을 듣고 나온 기분..;;

개인적인 바람은,

인물 하나하나를 다 살리는 건 좋은 의도지만,
작가와 연출이 가장 살리고 싶은 스토리를 정해서 나머지 가지치기를 좀 해줬으면...
도대체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나라 망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진정한 충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무대...
나 개인적으로는 무대장치 많이 없이도 효과적으로 무대 사용하는거 엄청 좋아하는 취향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천 무대는 좀 심하더라....;;
아무리 망해가는 나라라도 배경이 궁이고, 전쟁터고 그렇게 화려한데,
별다른 변화도 없이 내내 칙칙한 안개와 비같은 발만 주렁주렁 ㅠㅠ
내가 보는 이 공연이 본공연인지 리딩인지 헷갈릴 정도로 성의 없어 보였어. 쉴뫙....

세 줄 요약 :

긴 드라마의 요약본을 무대에 올린 것 같은 허망함.
속도감있는 게 아니라 쫓기는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서 같이 숨찼음.
무대는 그게 뭐냐.

한 줄 요약 :

배우들이 아깝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