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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 전설을 남긴 몽골의 일본침공..JPG
고려를 정복한 몽골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복종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유목민인 몽골인들이 바다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일본은 몽골의 요구에 코웃음을 친다.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는 여섯 번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이 계속해서 사신들을 모욕하고 박대해 돌려보내자 일본 정벌을 결행한다. 몽골은 고려에 대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를 독촉했고, 이에 고려에서는 장인 3만5천명을 동원해 900척의 배를 건조했다. 고려로서는 엄청난 재정부담이자 출혈이었다. 이 당시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병력은 몽골 및 북중국의 한족 혼성군이 2만5천명, 고려군 8천명, 키잡이 등 보조원 6천700명으로 이뤄졌으며 1274년 5월 14일 마산에서 출정했다. 이때 원의 도원수는 홀돈이었고, 고려군은 김방경이 지휘했다. 여·몽 연합군은 월등한 전력과 함께 철포와 화전 등의 신무기를 보유했다. 뿐만 아니라 활도 그 사정거리가 길었다. 먼저 연합군은 대마도를 점령해 대마도주를 죽인 후 규슈로 향했다. 하지만 대반격이 시작된다 전선 사령관 쇼니 가게스케는 시마즈 가문의 병사들과 함께 맹렬히 연합군에 항전했는데 결국 원나라의 좌부원수 유복형이 화살을 맞자 연합군은 함대로 철수한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태풍을 만난 정벌군의 함대는 큰 타격을 받는다. 이때 정벌군 총 2만5천명 중 1만3천500명이 익사했고 고려군 5천300명 중 2천700명만이 겨우 살아 돌아왔으며 200여 척의 전함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부서지고 침몰됐다. 2차 정벌 1차 일본 정벌에 실패한 몽골의 쿠빌라이 황제는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일본을 재정벌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결국 2차 정벌에서도 고려는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되었다. 1281년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는 결국 일본 2차 정벌을 결행한다. 그는 병력을 동로군과 강남군, 크게 두 개로 나눠 일본을 침공한다. 먼저 동로군을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 4만 명에 병선 900척으로 전면에 배치시키고, 강남군은 10만 명과 병선 3천500척으로 후위에서 돕게 한다. 이키섬을 1차적으로 정벌하고 시가노 섬으로 진격했지만 막부에서 미리 돌성을 세우고 대비했기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해 다시 이키섬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그 사이 쇼니 카게스케의 지휘 하에 오토모 가문, 시마즈 가문, 마츠우라 가문, 류조지 가문, 다카시 가문에 속한 1만의 일본군 병력이 이키 섬을 탈환했다. 결국 여몽 연합군은 히라도 섬으로 이동한다. 전선 사령관 쇼니 카게스케는 시마즈 가문의 병사들과 함께 하카타 만에서 맹렬히 연합군에 항전했는데 그 덕분에 여몽연합 강남군이 합류할 비슷한 시기에 일본 본토에서 6만의 대군을 모아 지원군으로 보낼수 있게 된다. 7월 말 드디어 강남군이 도착하지만 싸워보기도 전에 8월 15일 태풍이 북상하면서 강남군은 거의 다 익사하고 큰 타격을 입은 여·몽 연합군은 결국은 퇴각한다. 쿠빌라이 칸은 두 번에 걸친 원정이 모두 실패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3차 원정을 계획하고 일본을 복속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계속되는 반란에 직면하는 바람에 추진에는 실패했고, 결국 1294년 8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일본 원정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환송대고정닉
아시아 역대 원탑으로 평가받는 영화감독..gif
구로사와 아키라 (일본, 1910년 3월 23일~1998년 9월 6일) 일본이 배출한 세계 영화사의 거장 중의 거장이다. 그의 영화는 일본적이며 일본의 극예술,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일본 문화의 아이콘과 화려한 색체 감각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에서는 주로 허무주의, 휴머니즘, 현대 사회의 비정함 등이 내포되어 있는게 특징이다. 아키라의 영화는 특히 헐리우드에 매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는데 조지 루카스는 아키라의 1958년작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 영향을 받아 스타워즈를 만들어냈고 스티븐 스필버그는 1998년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마하 전투씬은 아키라의 1987년작 <란>의 전투씬을 본떴음을 밝혔고 피터 잭슨의 2002년작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의 헬름 협곡 전투씬은 아키라의 1954년작 <7인의 사무라이>의 빗속 전투씬을 오마주 하였다. 일화로는 영화를 제작 중이던 아키라가 거액의 제작비로 어려움을 겪자, 스필버그,코폴라, 조지 루카스는 자신들의 스승이 곤경에 빠져있는건 절대 못보겠다며 20세기 폭스를 설득 및 경졔적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서 아키라가 내놓을 수 있었던영화가 바로 1980년작 <카게무샤>이다. 아키라의 촬영장을 찾아온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대부 시리즈> 감독과 조지 루카스 <스타워즈 시리즈>의 감독. 란 (1985) 꿈 (1990, 스필버그가 위너 브라더스를 설득해 제작함) 후배 감독들의 도움 덕분에 아키라는 커리어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들을 연이어 완성하게 된다. (199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은 구로사와 아키라 그리고 자신의 우상을 모시는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아키라 감독의 페르소나 배우 <미후네 토시로> 역시 서양인들이 존경하는 아시아 역대 원탑 배우로 뽑힌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leeloo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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