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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시대때 아들을 뚝스딱스하고 마차에 불지른 여자
사건이 난 배경은 1847년 미 서부시대. 그 당시 서부에서는 나라에서 땅 공짜로 준다는 소리에 한 번 인생 펴보려는 사람들이 마차끌고 수천km 너머에 있는 서부로 대거 이주했음. 그리고 서부로 가던 이들이 주로 애용하던 길이 있었는데, 바로 오리건 가도라는 길임 길이는 약 3400km에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모피상인이나 사냥꾼, 선교사들만 지나다니던 길이었지만, 19세기 중반에 수십만 명이 서부개척을 떠나는 활로로 사용되었음 하지만 가는 길이 그리 평탄치는 않았는데, 왜냐면 가는 길 중간에 해발고도가 4000m가 넘는 봉우리가 수십 개나 있을 정도로 가파르고 날씨가 추운 로키산맥이 있는데다가, 총들고 강도질 하려는 도적때가 가끔씩 털러오고, 늑대나 곰같은 짐승들이 한입하러 오거나, 이질, 콜레라, 천연두, 장티푸스같은 질병에 걸려 땅의 거름이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특히 병사가 사망 원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음. 그리고 저런 상황에서 하루에 10~20km를 대부분 걸어서 가야했고, (마차에 타는 건 마차에 식량이랑 옷가지, 총, 탄약, 땔감같은 필수품을 실어야해 공간이 없어 마부 빼면 못 탔음.) 옷은 흙과 먼지투성이로 덮히고 빨래도 옷보다 더러운 흙탕물에 하는 게 부기지수에 먹는 거도 모닥불에 대충 조리한 밀가루빵이나 통조림 요리나 씹어야하는 생활을 최대 1년은 해야했음. 결국 이런 고되고 힘든 행렬에 미쳐 버리는 경우가 가끔있었고, 설명할 사건이 대표적인 사건임 사건은 1847년 9월 15일 북미서 10번째로 긴 강인 스네이크강을 따라가던 개척민 행렬에서 일어남. 당시 아내인 엘리자베스 마크햄과 남편인 사무엘 마크햄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개척민 행렬에 섞여 스네이크 강을 따라 서부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내인 엘리자베스가 더는 못가겠다며 가만히 서서 뻐팅기기 시작함. 남편인 사무엘은 아내를 데리고 가려 설득과 말싸움을 했지만, 결국 아이들만 데리고 길을 떠남. 그치만 상술한 대로 씹창난 서부 한복판에 아내를 두고가긴 그랬는지, 결국 아들 존을 보내 엄마 데리고 오라고 시켜서 보냄. 몇 시간 후, 아내 엘리자베스는 마차에 도착했음. 그런데 보냈던 아들 존이 보이지 않았음. 사무엘은 아내한테 아들은 어딧냐고 물었고, 엘리자베스는 존을 돌로 내리쳐죽였다고 말함. 그말에 놀란 사무엘은 마차를 내버려두고 곧바로 엘리자베스가 뻐팅기던 곳으로 급히 감. 다행히도 아들은 살아있었고, 이후 아들을 챙기고 같이 마차로 돌아옴. 그리고 충격적인 광경을 보게됨. 바로 가족들 짐이랑 식량이 실린 마차가 불타고 있었음. 다행히 사진처럼 전소된건 아니고 근처의 다른 개척민들이 불을 꺼줘서 다 타진 않았음.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니, 바로 아내인 엘리자베스가 사무엘이 아들 챙기러 바로 달려가자마자 마차에 불질러버린 거였음. 사건 후 둘은 바로 이혼 하지는 않고, 성공적으로 오리건 주의 오레곤 시티에 정착 후 가게를 운영하며 몇 년간 같이 살다가 1850년대 초에 결국 이혼함. 아마 엘리자베스의 정신적 문제, 스네이크 강 때 일로 인한 부부 갈등이 원인이었을 듯? 이혼 후 사무엘은 캘리포니아로 가고, 몇 년 후 엘리자베스도 캘리포니아로 가서 재혼했지만 결국 1872년에 이혼하고, (마운틴 뷰 묘지의 위치) 1891년까지 86세의 나이로 살다가 사망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마운틴 뷰 묘지에 묻힘. 추가로 엄마한테 뚝스딱스 당한 존은 이혼 후 엄마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가서 살았고, 1912년 81세의 나이로 사망 후 어머니가 묻힌 마운틴 뷰 묘지에 묻혔음. - dc official App
작성자 : 장성택고정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공에 실패한 이유
조선,명나라 자체가 일본이 점령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사이즈를 가진 국가들임 일본의 인구는 1,400만 조선의 인구는 1,200만 명나라의 인구는 무려 7,000만으로 조선은 일본과 인구 차이가 별로 없었고 명나라는 인구수 자체가 일본을 압도하는 동북아시아 초강대국이었다.명나라를 먹는 것 자체가 불가능 인 게 명나라는 동북아시아 초강대국으로 300만에 달하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국가로 일본군이 사용하는 조총들보다 강한 화약무기 다수를 보유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왜군을 상대하기 위한 부대를 따로 만들 정도로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당연하게도 조선을 공격하면 제후국인 조선을 구하기 위해 명나라가 개입할게 뻔한 상황이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나리오로 히데요시는 정신병에 걸렸는지 명나라-조선 정복에 매달리기 시작한다.침공 과정에서 제일 큰 실수를 하니 조선의 곡창지대 전라도를 패싱하고 한양에 직공을 선택한 것으로 일본군은 수도만 점령하면 끝이라고 생각했으나 선조가 런을 치면서 전쟁이 장기전 양상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때 왜군의 공격을 피한 전라도 육군,수군은 전력을 온존히 보존했다.곡창지대였기 때문에 무한보급을 통해 조선 최강의 수군,육군,의병들을 토해내기 시작하는데 김천일,고경명,김덕령 같은 한국인들이 알만한 의병장들이 튀어 나오기 시작했고 전라도 수군 역시 경상도 수군과 연합함대를 구성 일본군을 해전에서 박살내기 시작했다.조선수군의 전력의 90%가 전라도 좌-우수영 소속 함대로 좌수영 24척, 우수영 25척 경상우수영 4척이었으며 일본군은 골칫거리인 전라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치-웅치 전투들에서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 육군에게 패배하고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하며 전라도를 함락시키지 못했다.전라도 수군-육군 지휘 라인업은 황금라인업으로 수균 이순신,이억기 육군 권율 임진왜란을 상징하는 명장들이 전라도 수군-육군을 모두 이끌었고 행주대첩,한산도 해전 같은 굵직한 전공들을 연달아 세우며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히데요시의 목표가 꼬이기 시작하는데 일본의 조선침공 명분이 바로 명나라 정복이었기 때문에 명나라는 제후국인 조선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무려 11만에 달하는 대군을 조선에 파병 조선은 천군만마를 얻는데 성공했다.11만에 달하는 명나라군이 지상군 역할을 해주면서 조선은 17만에 달했던 지상군 규모를 3만으로 줄였고 조선수군 역시 명나라군이 지상전에서 탱킹을 해주자 마음놓고 일본군을 때리며 재해권을 장악 일본의 보급로가 모두 차단당하며 전쟁에서 고전하기 시작한다.명나라군 조직 중에 제일 잘싸운 군대는 척계광의 절강병이라고 불리는 남병들로 이들은 오직 전투만 하고 약탈은 벌이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조정은 명나라 조정에 북병들 말고 남병들을 조선에 파병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들의 병법인 절강병법을 도입했다.무엇보다 조선에서 이 인물이 등장하면서 히데요시의 조선,명나라 정복이 죄절되는데 바로 우리의 영웅 빛 그자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등장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일본군을 박살내기 시작하면서 전황이 뒤집히기 시작한다.수군이 조선수군에게 박살나면서 보급로가 끊기고 조선수군이 연전연승 한다는 소식에 육군,의병들 역시 사기가 진작되어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했기 때문 결정적으로 한산도 해전에서 충무공이 일본수군을 초전박살 내면서 사실상 히데요시의 대륙진출 야망에 사형선고를 내려주셨다.히데요시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해전 금지령을 내렸고 칠천량 해전을 제외한 모든 전투들에서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에게 박살 나는 것이 일상이었고 명량에서 고작 13척에 불과한 조선수군에게 또 박살 나면서 사실상 해전을 포기하고 왜성을 쌓고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공적들로 인해 이순신 장군의 명성은 명나라에도 알려지기 시작했고 조선백성,명나라 모두 흠모하는 인물이 되었으나 알다시피 이런 명성을 질투한 선조의 견제 역시 받아내면서 일본군을 박살내는 믿기 힘든 업적들을 계속 세우시며 조선의 수명을 무려 300년이나 늘리셨다.도요토미 히데요시다 병사하며 7년 전쟁이 끝났는데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자기의 세력을 모두 잃은 반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력을 온존히 유지 종국에는 세키하가라 전투를 통해 일본의 권력을 틀어잡는데 성공한다.히데요시의 외아들 히데요리는 죽음을 맞이했고 히데요리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히데요시 가문의 대는 끊겼는데 일본의 학자들은 대체 왜 히데요시가 아무런 이득도 없는 조선,명나라 정복에 대한 이유를 모르는데 그래서 나온 애기가 바로 히데요시 노망설이다.전후 이에야스는 조선,명나라와의 국교회복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고 자신은 전쟁터에 단 1명의 군사들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끝내 조선,명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하는데 성공 이에 대한 답례로 조선인 포로 일부를 조선에 송환시켜주었다.
작성자 : ㅇㄴㄴㅇㄹㄴ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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