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판타지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판타지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그렇게 심각하다던 영국 보다 더 위험”…한국 부채, 10년 만에 3000 너구리
- 내로남불 와이프에게 현타온 블라 신창섭 디씨망령
- 비상비상) 어쩔수가없다 근황 ㅇㅇ
- 독일 뮌헨 ③ 각하
- 심심해서 찍어 본 밤 사진 불교맨
- 괴담출근 트위터에서 불타네 ㅋㅋㅋㅋㅋ 한가운데
- 타임 아시아 이재명(타임지 커버스토리에 실린 대통령님들) ㅇㅇ
- [여행] 오랜 로망의 실현 라이카+파리+신혼=힐링낭만MAX 갬성몰빵
- 와이프가 딸 같다는 블라인...ㄹㅇ 실베무무쿤
- s전자도 조선마냥 당파싸움 またね
- 니네 nc신인 인스타 이거 봤냐? ㅋㅋㅋㅋ(신인 인스타 모음) ㅇㅇ
- 9월 18일 시황 우졍잉
- 한남들 데이트비용 다내는게 이해가 안간다는 일본누나 ㅇㅇ
- 딩크 글 볼때마다 답답하다는 블라인....ㄹㅇ 실베무무쿤
- 방첩사, 인맥 동원해 부대해체 저지 로비 ㅇㅇ
[역사역사] 고양이를 활용한 펠루시움 전투를 알아보자
https://youtu.be/kIVHL1AIkE8고대 이집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동물을 신성한 존재로 대우한 문명 가운데 하나였음.나일 강 유역에서는 고양이·이비스·송골매·황소 등 여러 동물이 특정 신의 화신으로 숭배되었음.그중에서도 고양이는 풍요의 여신인 바스테트(Bastet)의 상징으로, 집과 출산, 보호를 관장하는 존재로 여겨졌음.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이집트에서 집에 불이 나면 사람들은 불부터 끄는 대신 고양이를 구하러 뛰어든다”고 기록했고,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죽으면 가족 전원이 눈썹을 밀고 애도했다고 전함.심지어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의도적이든, 사고든 중범죄로 간주되어 사형에 처해졌다는 기록도 있음【Diodorus Siculus, Bibliotheca historica 1.83】.실제 고고학적으로도 이집트의 고양이 사랑에 대한 근거는 차고 넘침.사카라(Saqqara)·부바스티스(Bubastis)같은 유적에서는 실제 수천 구의 고양이 미라가 발굴되었고,이 중 상당수는 실제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확인됨.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에는 이런 고양이 미라와 바스테트 청동상들이 소장되어 있음.이는 이집트인들이 단순히 동물을 길렀다는 수준을 넘어 죽은 뒤에도 장례를 치르고 종교 의식에 포함할 만큼 깊은 애착과 신앙적 의미를 부여했음을 보여줌.그러다보니 이집트인은 (물론 당연히 육식과 사냥도 했지만) 채소나 유제품 등 채식을 주로 했는데, 이러한 식습관도 동물존중의 일종이라 볼 수 있겠음. 즉, 고양이는 단순한 애완동물이 아니라 가족, 신의 화신, 공동체를 지키는 존재로이런 문화적 배경 때문에 기원전 525년 펠루시움 전투에서 페르시아가 고양이를 방패로 이용했다는 일화가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임.그럼 아래부터는 최초이자 유일한 고양이를 대거 활용한 전투, 펠루시움 전투를 알아보도록 하겠음. 우선, 이 전투를 알아보기 이전에 당시 이집트와 페르시아의 정치적-외교적 상황 및 관계 등을 알아 볼 필요가 있음. 먼저, 기원전 6세기 중반, 나일 강 하류의 이집트는 마지막 토착 왕조인 사이스 왕조(제26왕조) 아래에 있었음.기원전 7세기 초에 프삼티크 1세 등이 국내를 통일하고 국력을 신장시켰으며,이후 네카우 2세 등 파라오는 대외 교역과 군사력 강화에 힘썼음.그러나 신왕국 시대의 전성기에 비하면 국력은 쇠퇴한 상태였고, 제22~25왕조를 거치며 중앙 권력이 약화된 여파로 완전한 안정에는 한계가 있었음.그 상황에서 아마시스 2세(재위 기원전 570 ~ 526년)는 반란을 통해 즉위한 인물로서, 전임 왕 아프리스(우아히브라)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음.이러한 정권 교체로 인해 왕실 혈통의 정통성 논란이 당시 이집트의 구조적 불안기와 겹치며 상당히 혼란스러웠지만, 아마시스 2세의 포용 정책 등으로 집권기 동안 이집트는 번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음. 즉위 후 내정 안정과 경제 부흥에 힘쓰며 나우크라티스(Naucratis)에 그리스인 거류지를 허가하고,헬라스 세계와 활발히 교역하는 등 옛 패권국 지위까지는 아니어도 다시 부를 쌓으며 과거 영광을 어느 정도 회복하던 차였음. 동시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은 키루스 2세(고레스 대왕) 시기에 급속히 팽창하여 서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였음.키루스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재위 기원전 530 ~ 522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국 확장을 지속했고,특히 이집트 정복을 최대 과제로 삼았음.당시 페르시아는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 등 인근 강국들을 이미 굴복시킨 상태였고,지중해 동부에서 유일한 독립 강대국은 이집트 뿐이었기에 페르시아의 제1목표는 이집트를 굴복시키는 것이었음. 이에 따라,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면서 외교적으로도 주도면밀하게 움직였음.그는 사전에 동맹 관계 구축과 정보 수집을 통해 유리한 여건을 마련하였는데,예를 들어 이집트군의 그리스인 용병 지휘관이던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의 파네스(Phanes)가이집트 왕과 불화하여 페르시아로 망명해오자 이를 적극 활용하였음.망명자 파네스는 이집트의 지리와 전략을 상세히 조언하여 페르시아군의 침공 계획 수립에 큰 역할을 하였고,특히 시나이 사막을 넘어 이집트로 진군하는 경로와 관련해 아라비아 부족들의 협조를 얻도록 제안했음.이에 따라 캄비세스는 이집트로 통하는 유일한 육로인 팔레스타인-시나이 경로의 통과를아라비아 부족 왕에게 요청하였고,아라비아 왕은 당시 이집트의 아마시스 2세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에 기꺼이 이를 승낙하며 페르시아군에 안전 통로와 식수를 제공했음.이처럼 페르시아 제국은 침략 이전에 철저한 사전 외교 공작과 보급 대책을 강구함으로써 장거리 원정의 장애를 극복하였음.또한, 캄비세스는 적의 동맹을 이간질하는 외교전략도 구사했는데,대표적으로 에게 해의 섬나라인 사모스의 참주 폴리크라테스가 자발적으로 페르시아 편에 가담하여 함선을 지원한 사례가 있음.원래 이집트가 오히려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와 친교를 맺고 그와 서신을 교환할 만큼 우호적 관계였으나,폴리크라테스는 기원전 525년경 돌연 캄비세스에게 사절을 보내 이집트 원정에 협력하겠다고 제안하였음.그 결과 폴리크라테스는 삼단노선40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페르시아 측에 파견하였음.(물론 폴리크라테스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체제에 반항하는 시민들도 같이 묶어서 축출하는 차원에서 보낸거긴함.)사모스 함대는 항해 도중 일부가 귀환하는 등 혼선도 있었으나,어쨌든 이 사건으로 이집트는 원래 기대했던 그리스 세계의 지원군을 잃게 되었음.이처럼 페르시아는 이집트의 우방이었던 그리스 세력(사모스, 키프로스 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이집트를 고립시킴으로써 전략적 우위를 이미 진작에 확보하고 있었던 것임. 페르시아의 이집트 침공은 단지 제국 팽창주의뿐만 아니라 양국 간의 외교적 갈등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음.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와 아마시스 2세 사이의 사소한 외교 마찰이 전쟁을 촉발한 직접 계기가 되었음.사건의 발단은 당시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에게 매우 좋은 조건으로 이집트의 안과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구했음.(당시 이집트는 의학술 상당히 훌륭한 수준) 의사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달라고 요청했음에도 아마시스가 씹고 혼자만 보내 가족들과 생이별하게 된 것에 이집트에 원한을 품고, 캄비세스 2세에게 "파라오의 딸을 아내로 달라 요구하라"는 계략을 제시했음.당시 딸바보로 알려진 아마시스가 자신의 딸을 페르시아에 보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문제였고, 그렇다고 해서 거절하자니 강대국인 페르시아를 자극해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딜레마에 빠질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음.어쨌든 캄비세스는 이 조언대로 아마시스에게 공주를 시집 보내달라고 요구했고,아마시스는 강대국 페르시아의 요구를 뿌리치기도, 딸을 내주기도 곤란한 처지였기에 자기가 반란을 일으켜 죽였던 전왕, 아프리스의 딸인 니테티스를 자신의 친딸인 냥 꾸며 보냈음.그러나, 니테티스가 자신의 친정 아버지를 아마시스가 아닌 아프리스로 부르는 것이 발각되었고 결국 니테티스가 아마시스의 속임수를 폭로하면서 이 일을 통해 아마시스의 기만을 알게 된 캄비세스는 대노하여 이집트에 대한 원정을 결심하게 되었음.물론, 이게 하나의 흐름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제1원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실제로 이집트는 이전에도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와 동맹을 맺는 등 페르시아 신흥 세력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페르시아 입장에선 이집트가 잠재적 적대국으로 인식되고 있었음.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에 패배한 후 이집트만이 남은 독립 강대국이었으므로, 캄비세스가 적당한 명분을 얻는 대로 공격할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을 것임.심지어 전쟁이 이제 막 일어나기 직전 아마시스 2세는 기원전 526년경 사망하였고,아들 프삼티크 3세(Psametik III)가 겨우 즉위 6개월 만에 대제국 페르시아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음.매우 어렸던 프삼티크 3세는 갑작스러운 국난을 헤쳐나갈 경험이나 기반이 부족했고,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고자 부왕 때 맺어진 그리스 도시국가들과의 동맹에 기대어 지원군을 요청했으나,앞서 언급한 대로 키프로스의 도시들과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 등이 모두 페르시아 쪽으로 선회하는 바람에 이 기대는 어그러졌음.게다가 이집트 용병대의 중요한 지휘관이었던 파네스까지 적국에 합류함으로써프삼티크 3세는 사실상 군사 전략 고문과 외원(外援)을 모두 잃은 상태에서 혼자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음.결국, 기원전 525년, 아마시스 2세가 죽은 바로 1년 뒤에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2세가 이끄는 군대와 이집트의 프삼티크 3세 군대가나일 삼각주 동쪽 관문인 펠루시움 성채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짐.이곳은 이집트로 들어오는 요충지였기에 이집트군은 강력한 저항 의지를 보였고, 성채에는 투석기와 같은 공성병기까지 준비하여 페르시아군에 맞섰음.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양측의 격전 후 현장에는 해골이 산처럼 쌓였다고 하며,나일강 주변 모래밭에 흩어진 이집트와 페르시아 전사들의 유골을 보고 그는 두 민족의 해골 단단함이 다르다고 기록하기도 했음.(이집트인은 어려서부터 머리를 깎아 햇볕에 두개골이 굳고, 페르시아인은 머리를 두건으로 가려 약하다 평함)사실 처음에는 이집트가 생각 이상으로 공격에 탁월하게 대응하며 방어했음. 폴리아이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이 펠루시움 성을 공격할 때이집트 수비군은 투석기와 화살, 불탄 등을 퍼부으며 완강히 저항하였고 페르시아 측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그러자 결국 캄비세스 2세는 전술을 돌변하며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고양이를 활용한 전술로 바꾸게 되는데 ....페르시아군은 캄비세스 2세의 전술 변경에 따라 전면에 이집트인들이 신성시하는 동물들을 내세우는 계략을 폈다고 함.구체적으로 페르시아 병사들은 개, 양, 이집트 따오기(이비스)와 고양이 등 여러 성스러운 동물을 잡아모아 방패 역할로 앞세웠고,어떤 병사들은 방패에 아예 여신 바스테트의 형상을 그려넣기도 했다고 전해짐.이집트 군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성 동물들이 적의 최전선에 등장하자 큰 충격을 받았으며,함부로 화살이나 돌을 쏘았다가 자칫 자기들이 신성시하는 고양이나 이비스를 해치게 될까 두려워 망설이기 시작했음.그 결과 성의 방어선이 급속히 무너졌고 페르시아군은 손쉽게 펠루시움을 함락하여 이집트로 통하는 관문을 열 수 있었다고 전해짐.이 기묘하고 독창적인 전략으로 인해 믿거나 말거나 설화로는 전투 후 분노와 수치심에 빠진 이집트인들 앞에서 캄비세스가 일부러 고양이들을 집어들어 그들의 얼굴에 내던졌다는 이야기까지 나옴. 이러한 ‘고양이 방패’ 전술 덕분에 페르시아군은 최소한의 피해로 이집트군의 강력한 방어를 무력화할 수 있었고,이집트 측은 종교적 금기에 스스로 발이 묶여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음.결국 이집트군은 더 이상 항전을 지속하지 못하고 대열이 붕괴되어 퇴각하였으며,패잔병은 나일강 서쪽 내륙의 요새도시 멤피스로 도망쳐 최후 항전을 준비했음.프삼티크 3세 역시 펠루시움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멤피스로 돌아갔고, 페르시아군은 승세를 몰아 곧바로 멤피스를 포위 공격하였음.그러나, 당연하게도 멤피스 공방전은 오래 가지 않아 페르시아의 승리로 끝났고,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는 함락되었음. 참고로, 이 때 사실 페르시아 측에서는 굳이 무의미한 전투 하지말고 협상하자는 의미에서 사절을 보냈지만, 멤피스로 보낸 협상 사절이 이집트 군중들에게 몰매맞아 찢겨 죽임을 당하자 캄비세스가 분노하여 멤피스 함락 후 보복 학살을 명령했다고 함. 어쨌든 멤피스 함락과 함께 프삼티크 3세는 페르시아에 사로잡혀 포로 신세가 되었고,이로써 이집트 제26왕조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음.(참고로 프삼티크 3세의 공주는 노비로 / 왕자는 처형당하고, 프삼티크3세는 그나마 좀 대접받으며 살다가역모 꾸미는 걸 들켜서 오염된 황소 피 먹어 죽었다고 함.)아무튼 펠루시움 전투와 멤피스 함락의 여파로, 기원전 525년부로 이집트의 고대 왕조 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되고,이집트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음.캄비세스 2세는 승전 후 이집트 전역을 손쉽게 제압하였고,정통 파라오를 몰아낸 정복자로서 이집트의 새로운 왕(페르시아계 파라오)를 자처함. 그는 이집트를 페르시아 제국의 제6번째 사트라피로 편입시키고 키프로스와 페니키아를 함께 이 관할에 묶었으며,자신이 이집트의 왕위를 계승했음을 내세워 이집트 제27왕조(제1차 페르시아 왕조)를 열었음.한때 독립왕조(제28~30왕조)가 부활하기도 했으나 결국 기원전 343년에 제2차 페르시아 지배가 재개되는 등이후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가 이어받기까지 지속적으로 외세 통치의 시대가 펼쳐졌음.아무튼 이 모든 변곡점이 된 것이 고양이를 활용한 펠루시움 전투에서의 페르시아 승리 덕분이라는 것임. 물론, 실제 고고학적으로 해당 전투가 다소 과장되었던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무튼 이 펠루시움 전투는 상대국의 문화적 요소를 활용한 독창적인 전술 전략이면서 동시에 계사적 변곡점으로서 중요함.이 전투에서 이집트 토착 왕조가 무너지고 이후 2000여 년간 진정한 자주 독립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펠루시움은 이집트 고대사의 종언과 외세 지배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분기점이라 할 수 있음.결과적으로 펠루시움 전투의 ‘고양이 심리전’은 역사적 사실 여부를 넘어 문화와 전쟁의 관계, 신념과 승패의 상관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고전적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임. 실제로 중국에서도 재건축 철거를 막기 위해 건물 주인이 건물 모든 면에 시진핑 사진을 붙임으로써 막은 일례도 있는 것처럼 우리도 (있어서는 안 되지만) 만약 제2의 한국전쟁이 또 한 번 발발한다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김씨 일가 사진을 탱크에 붙이는 것도 어떨까 싶음..
작성자 : 영단어봇고정닉
차단 설정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전체 갤러리]
차단 기능을 사용합니다. 차단 등록은 20자 이내, 최대 10개까지 가능합니다.
설정된 갤러리
갤러리 선택
설정할 갤러리를 선택하세요.
[갤러리]
차단 기능을 사용합니다. 전체 설정과는 별개 적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