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애니-일본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애니-일본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우즈벡 여자와 국제결혼한 한국인 남편 야갤러
- 대한민국 군대 리즈시절.JPG 전두환
- 15000원 순대정식.jpg dd
- 광복기념. 재일교포들의 희생 인육짱깨
- 싱글벙글 평화롭고 귀여운 견보살 댕댕남매.gif 수인갤러리
- 요즘 MZ 해병대 근황 카라데키드
- 이젠 낙태약 완전 합법화 빌드업하고 있는 나거한 언론 ㅇㅇ
- WHO, 원숭이두창 전염에 세계 공중보건비상사태 선언 마스널
- 안싱글벙글 변호사가 현타 오는 순간 시진핑의왼쪽부
- 싱글벙글 한국공산당 결성사건.jpg ㅇㅇ
- 비스마르크 추격전 2부 후드vs비스마르크 토마토재배자
- 카카오페이...중국에 넘긴 정보 목록 ㄹㅇ...jpg Adidas
- 싱글벙글.. 한국의 흑역사.... 창씨개명...jpg LoLHistory
- 드라마 파친코에서 묘사된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jpg 마스널
- 카미카제에 대한 <해외 vs 한국> 인식차이..gif leeloo
아직도 처칠이 독립 반대했다는 날조 선동 믿는 빡대가리들 봐라
커뮤 밈으로 역사를 배우니까 조선족 선동질에 놀아나지 ㅋㅋ대표적으로 ㄹ이나 여초에서 자주 올라오는 이 짤먼저 이 글의 출처이 기사에서 문장이랑 회담 기록 날짜까지 그대로 긁어옴기사 작성자 "이상철" 뒤에 다시 설명할거니까 잘 봐둬라이기https://shindonga.donga.com/3/all/13/113033/5 신동아 신동아shindonga.donga.com그런데 정작 이 기사에서도 제목에서 어그로만 잔뜩 끌어놓고 정작 처칠이 "한국 독립을 반대한다고 발언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음왜냐고? 처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거든당시 회담에 대한 팩트만 나열하자면1. 카이로 회담은 미국, 중국, 영국 3국이 공동으로 작성한 공식적인 회의록이 없음2. 위 회담에서 마지막에 공식적으로 발표한 선언문 외에는 각각 미국 정부의 기록과 당시 장제스 및 중국 측 인사들의 비밀 기록만 각각 남아있음3. 처칠이 인도와 홍콩을 계속 식민지배하고 싶어서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 반대 -> 이건 사실임4. 하지만 처칠이 저 카이로 회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한국 얘기가 나오자 그때 안된다고 반대??? -> 그런 기록은 미국과 중국 양쪽 기록 전부 존재하지 않음5. 카이로 회담의 초안 -> 미국에서 작성함- 미국에서 작성한 홉킨스 초안 내용:우리는 우리의 잔인한 적(brutal enemy)에게 바다, 육지, 상공에서 무자비한 공격을 가할 결의를 가지고 있다. 이 압력은 이미 진행 중에 있다. 이 지역에서 우리가 공동공격을 개시할 때, 장소와 규모는 지금 밝힐 수 없지만 일본은 그 힘을 알게 될 것이다.우리는 일본이 점령해 온 태평양의 여러 섬은 일본에서 영구히 빼앗고 일본이 중국에게 신뢰를 저버리고 훔친(so treacherously stolen) 만주, 대만과 같은 영토는 당연히 중화민국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결단했다. 우리는 한국 인민들을 기만하는 예속(treacherous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에 유의하고 일본의 항복 후 최대한 빠른 시점에 한국이 독립하고 자유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결단했다.우리는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격렬하고 결연한 싸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우리 세 나라는 일본의 무조건 항목을 얻어내기까지 함께 싸워나갈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6. 한국 얘기가 구체적으로 회담에서 나온 것은 회의의 11월 23일과 24일, 카이로 회담 선언문 초안이 거의 작성된건 11월 25일지금부터 가져오는 링크의 문서들은 (history.state.gov) 미국 정부에서 공식으로 공개한 회담 기록들임이 기록들 중에는 미국 정부가 중국 정부의 동의를 받아서 회담 내용에 대한 중국 측의 기록도 보충자료로 있음11월 23일에는 (미국-소련 회의 후에) 미국과 중국이 먼저 만나서 대화했고 그 다음 본회의에서 3개국이 만남오전 회의: Patrick J. Hurley와 장제스의 대화 -> 대화 내용에 대한 기록 없음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54 Historical Documents - Office of the Historian Historical Documents - Office of the Historianhistory.state.gov본회의 Plenary meeting, 11 a.m. (루즈벨트, 장개석, 처칠 모두 참석)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ch5subsubch9본회의 내용 -> 미국 측 합동참모회의록에서 기록한 회의 내용 전체를 읽어봤지만 한국에 대한 언급 없음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55이후에 이어진 루즈벨트-처칠 미팅 -> 내용에 대한 기록 없음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56그 다음 오후 2시 30분 합동참모 장군들 회의 -> 한국에 대한 언급 없음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57오후 8시 루즈벨트 - 장개석 저녁 만찬 -> 여기서 처음으로 워싱턴 주재 중국 대사 Dr. Hollington Tong 기록으로 번역문에 한국 언급이 나옴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59"루즈벨트는 중국과 미국이 태국뿐만 아니라 한국, 인도차이나 및 기타 식민지 지역의 미래 상황에 대해 상호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장개석은 이에 동의하면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또한 전후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위해 중국과 미국이 함께 노력해야 하고, 태국의 독립지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도 그의 견해였다"이후에 이어진 미국 영국 참모총장 회담 -> 내용에 대한 기록 없음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60그리고 11월 23일 마지막 일정인 미국 마셜 장군과 처칠의 회담 -> 내용에 대한 기록 없음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61이제 11월 24일로 넘어감11월 24일 오전 9시 30분 첫 일전 합동참모회의 -> 한국에 대한 언급 없음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6211월 24일 오전 11시 두 번째 일정인 루즈벨트 - 처칠 회의 -> 여기서 루즈벨트의 한국 언급The President said that he shared the views expressed by Mr. Molotov that the defeat of Japan would follow that of Germany and more rapidly than at present was generally thought possible. It seemed that the Generalissimo had been well satisfied with the discussion held the previous day. "There was no doubt that China had wide aspirations which included the re-occupation of Manchuria and Korea.""중국이 만주와 한국 재점령을 포함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63 Historical Documents - Office of the Historian Historical Documents - Office of the Historianhistory.state.gov그 다음 일정은 24일 오후 마샬 장군과 장개석의 회담 -> 내용에 대한 기록 없음(No official record of the substance of this meeting has been found)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64오후 2시 30분 장군들 회의 -> 한국에 대한 언급 없음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6524일 마지막 일정 루즈벨트 대통령과 이집트, 그리스, 영국, 유고슬라비아의 대화 -> 한국에 대한 언급 없음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66그리고나서 11월 24일 오후부터 카이로 회담의 초안이 미국 측에 의해 본격적으로 작성되기 시작함루즈벨트가 직접 수정해가며 만든 초안: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pg_39911월 24일 미국 대통령 특별 보좌관 홉킨스를 거쳐 수정된 내용: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pg_401 Historical Documents - Office of the Historian Historical Documents - Office of the Historianhistory.state.gov포인트 1. 초록색 부분 만주와 대만은 중국에게 돌려줘야한다고 쓴 것포인트 2. 한국의 독립에 관해서는 "가능한 가장 빠른 순간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적혀있음이에 대한 앞 문장에는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의 기만적인 노예화 (treacherous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by Japan) 이라는 문구가 있음초안이 전달되고 오전에 루즈벨트와 영국 외교관 캐도건 Alexander Cadogan의 대화가 있었음 -> 내용에 대한 기록 없음(No official record of the substance of this meeting has been found)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d267이후 11월 25일 다른 회담들도 내용에 대한 기록 없음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ch5subch4그리고 11월 25일 미국한테 초안 건네받은 당일에 영국 외교관 캐도건에 의해 수정된 영국의 초안 버전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pg_404페이지 주석에 따르면 손글씨 첨삭은 처칠의 것으로 보인다고함위의 루즈벨트 버전과 비교해보겠음-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지들도 식민지에서 수탈했던 과거가 찔렸는지 "일본이 기만적으로 훔친(so treacherously stolen)"을 그냥 stolen으로 바꿈- 일본이 폭력과 탐욕(violence and greed)으로 취한 모든 영토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문장이 덧붙여짐- 한국의 독립에 대해 "가능한 가장 빠른 순간에" 문구가 사라지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라는 문구가 생김위에서 이미 말했지만 이것은 캐도건이 작성한 초안이고 처칠이 한국 부분에 대해서 캐도건과 상의했는지에 관해서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음그리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free and independent)" 문구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 자체에 대한 반대를 했다는 증거는 없음위의 초안에 처칠이 친필로 첨삭한 부분은 한국과 전혀 관련 없는 부분이고무엇보다도 11월 25일에 처칠이 미국과 대립하고 있던 부분은 유럽 이슈임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3CairoTehran/pg_407처칠한테는 지금 나치 조지는 문제만 중요하다고 ㅋㅋㅋ장제스한테는 김구가 있었고 루즈벨트한테는 머한 초대 주딱이 있었지만처칠한테는 아무도 없고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알못 노상관이라고 ㅋㅋ7. 그래서 최종적인 선언문https://en.wikipedia.org/wiki/1943_Cairo_Declaration"The several military missions have agreed upon future military operations against Japan. The Three Great Allies expressed their resolve to bring unrelenting pressure against their brutal enemies by sea, land, and air. This pressure is already rising.""The Three Great Allies are fighting this war to restrain and punish the aggression of Japan. They covet no gain for themselves and have no thought of territorial expansion. It is their purpose that Japan shall be stripped of all the islands in the Pacific which she has seized or occupi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first World War in 1914, and that all the territories Japan has stolen from the Chinese, such as Manchuria, Formosa, and The Pescadores, shall be restored to the Republic of China. Japan will also be expelled from all other territories which she has taken by violence and greed.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With these objects in view the three Allies, in harmony with those of the United Nations at war with Japan, will continue to persevere in the serious and prolonged operations necessary to procure the unconditional surrender of Japan."11월 25일 버전 영국쪽 초안에서 거의 달라진게 없음8. 당시 "한국" 문제에 대한 영국의 의견최영호. (2013). 카이로선언의 국제정치적 의미. 영토해양연구, 5(), 56-85.영국이 제국주의 국가고 지가 갖고있던 아시아 식민지를 2차대전 후에도 유지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상태였던 것은 사실임영국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식민지배가 스스로 생각해도 양심에 존나 찔렸고이 문장들이 다른 식민지에 영향줄거 생각해서 일제의 제국주의를 강력하게 패는 문구를 뜯어고친것도 사실임하지만 조선은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은 한국의 독립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저때 상황에서 영국 입장에서 더 경계하고 있던 것은 오히려 중국이 한국을 흡수하고 아시아에서 패권을 되찾는 것이었음왜냐하면 그때 당시에도 영국은 아직 홍콩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거든그러니까 한국에 대한 영국의 입장은"짱깨새끼가 한국 독립하자마자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집어삼키는 꼬라지는 절대 못본다절차에 따라 나중에 독립시키되 일단은 신탁통치로 보호하자" 였던거임결론: 처칠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에 반대 -> 그런 말은 기록에도 없고 당시 영국의 이해관계에도 맞지 않는 일임그러면 지금 커뮤에 떠도는 저 짤의 원 출처 기사는 증거 제시도 못하는 주장을 왜 저렇게 어그로끌기 좋게 제목에만 써놨을까?저 기사의 작성자, 일본 류코쿠 대학 교수 리 소테츠(이상철)"조선족 출신""일본으로 귀화""우익 입맛에 맞는 말만 해줌"혐한질 때문에 불매운동 일어났던 쪽본 DHC tv채널 출연해서한국에 이런 한국 비하글이 있다고 책에서 통계도 제시한다고 한국인 국내 여론을 사칭함조선족 출신 + 중국에서 기자활동 하다가 일본으로 귀화 + 한국인을 사칭하며 혐한 날조자료로 좆본 우익들 입맛에 맞춰주는 말만 해주는 방송 패널다른 어지간한 매국노들도 따라하기 힘든 역대급 씨발 3관왕 달성사실 매국노도 아니고 애초에 한국인이 아니었던 중국계 일본인한국인인척하는 중국계 일본인ㅋㅋㅋ날조 아니라도 어차피 갈리폴리좌 깔거 많은데 국민 여론이나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는 날조 선동글을 이렇게? 싶었는데 ㅋㅋㅋㅋ그러니까 1. 저 기사는 짱깨석이 한국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장제스 찬양을 위해 처칠이 하지도 않은 말로 한국인들 선동하는 글을 쓴거고2. 영국 혐성밈에 환장하는 근첩찐따들이 저 기사 출처를 숨기고 문장 짜집기해서 역사 지식인 것처럼 커뮤에 뿌리고다닌거임아직도 처칠이 독립 반대했다는 조선족 날조 선동 믿는 빡대가리들 능지 수준ㅋㅋㅋ
작성자 : ㅇㅇ고정닉
대한독립 기념 아이티 독립 이야기
서력기원 1492년,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의 지원 하에 레츠고 인도탐방기를 찍게된다.물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희망봉을 돌아 동쪽으로 향해해, 실제로 인도의 고아 지역에 도착한 바스쿠 다 가마와는 달리,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인도 도착하다니까요? 라고 박박 우기던 콜럼버스는 인도 대신, 브랜 뉴 미개척지를 발견하게 되는데그게 신대륙, 아메리카다. 대서양을 항해하던 콜럼버스는 저 멀리서 대륙이 있음을 육안으로 확인했고, 근처 섬들에 내려 탐험을 시작했노라.1492년 12월 5일, 안틸러스 제도에서 두번째로 거대한 섬에 도착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그 섬에 "히스파니올라" 라고 이름을 붙였고, 20일후, 12월 25일, 에스파냐 왕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하나 좌초 시켜 버리고만다 병신 ㅋㅋ당시 포르투갈 식민제국은, 적도기니나 상투메 프린시페를 비롯한 서아프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자원과 노동력을 쪽쪽빨아먹고 있었다. 이에 꼴받은 이사벨 여왕은 본국으로 리턴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게 식민지를 세우기 위한 대규모 지원을 하게 되고, 총원 1500명에 달하는 거대 식민선단이 레츠고 인도 식민화 (인도 아님) 를 찍게된다. 초창기 히스파니올라 식민지는 심각한 문제를 겪게 된다. 콜롬버스 삼형제의 원주민 대학살 대작전과 역병 때문에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겪게되었고, 이에 포르투갈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흑인 노예들을 수입하면서 노동력 부족을 매꾸었다. 여담으로, 1500년에 새로 히스파니올라에 부임한 신임 총독은 크리스토퍼-바르톨로메오-쟈코모 삼형제가 식민지 관리를 개판으로 했다며 감옥에 처박아뒀고, 이 사건으로 콜롬버스 브라더스는 몰락한다. 콜롬버스의 아들내미가 1508년에 총독으로 부임하기는 하지만.초창기 히스파니올라의 주요 수입원은 금광이였지만, 금광이 고갈되고, 또 사탕수수가 카나리아 제도에서 유입되었기 때문에 히스파니올라는 플랜테이션 농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런 산업에 종사하던 흑인 노예들은 콜롬버스의 아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탈주 닌자가 되어 깊은 산속으로 숨었는데, 이들과 산속 원주민들 사이에서 잠보라고 불리는 원주민-흑인 혼혈 자손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산이 많은 땅" 이라는 아이티의 산악지대. 수많은 탈주 흑인 노예들이 이곳에 숨어들었다. 자신들이 가진 부두신앙과 함께.사탕수수의 인기가 떨어지자, 많은 식민지인들은 페루, 멕시코, 쿠바같은 더 나은 식민지로 떠나기로 결심햇다. 가축들은 야생화되어 마구 번식했고 섬의 식생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이 당시의 히스파니올라는 토르투가 섬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사략 해적들에게 있어 개꿀약탈지였기 때문에, 에스파냐 국왕은 약탈을 막고자 개발이 덜 된 서부에 살던 시민들을 비교적 부유한 동부로 옮기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아이티 북부의 조그마한 섬, 토르투가 (거북이 섬). 캐리비안의 해적에서도 몇번 나왔던걸로 기억하는데,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곳임. 약탈을 막을려고 저지랄을 했는데, 무인지대가 된 섬 서쪽에, 토르투가를 근거지로, 에스파냐의 보물선단을 털어먹던 합법 해적들인 프랑스-영국-네덜란드의 사략꾼들 (Flibustier)이 그대로 눌러살기 시작하고, 이들에게 육류를 공급해주던 사냥꾼들 (Boucanier) 과 이 사략선단이 연합하면서 레츠고 대해적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히스파니올라에 프랑스인들이 본격적으로 식민야욕을 내비치기 시작한다…!이 버케니어 - 사략꾼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은, 당연 토르투가에서 활약하던 "에스파냐의 재앙". 프랑수와 롤로네, 또는 프랑수와 롤로노아이다.당연히 롤로노아 조로가 이 사람 이름보고 따왔다.1665년에 태양왕, 루이 14세가 공식적으로 토르투가와 히스파니올라 서부는 프랑스 영토라는 식민지 선언을 하고,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또는 9년전쟁 / 팔츠 계승전쟁) 의 종전조약인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합법적으로 히스파니올라의 서부인 쌩 도멍그, 현재의 아이티를 집어삼킨다. 이곳에서 프랑스인들은 담배와 가죽을 생산했는데, 훗날 이곳에 프랑스 세네갈 식민회사, 그리고 프랑스 기니 식민회사를 통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수입하면서, 다시 설탕산업을 부흥시킨다. 1789년 당시, 이곳은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지로, 그리고 세계 커피 수요의 50%를 공급하는 최대의 커피 생산지로 프랑스에 큰 부를 가져다 주었다. 프랑스 전체 인구 8분의 1 이 식민지에서 나온 부로 먹고살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시간대를 보면 알 수 있듯, 머지않아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는 아메리카 13개주의 독립을 지원하면서 영국 물먹이기 대작전을 펼치다가 자신의 모가지가 날라가는 대참사를 겪게되는데~루이 14세와 15세 때 누적되어왔던 재정 적자에 더해,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경제가 완전히 파탄나자, 시민들이 못살겠다고 대혁명을 터뜨린다. 프랑스 본국이 완전히 흔들리고, 본국의 인권사상이 바다를 건너 전파되자, 인종차별 사회였던 쌩-도멍그 식민지에도 여파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당시 쌩 도멍그 식민지는 귀족출신의 대농장주과 부르주아지 출신의 대상인들인 Grand blanc 그헝블렁, 큰 백인들과 공무원 노동자들인 Petit blanc 쁘띠 블렁, 작은 백인들이 노예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있었던 사회였다. 실제로 흑인에게만 적용되는 법 규정인, Code noir 꼬드 누와흐라는 것도 존재했으니. 쌩-도멍그가 속한 프랑스령 안틸러스 제도 식민지는, 1788년에 60만명의 노예들, 3만명의 자유흑인, 그리고 5만 5천명의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 식민지 주민들은 프랑스의 재정문제를 비롯한 내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열린 삼부회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참가하지 못했는데, 이에 실망한 안틸러스 제도 식민지인들은 이에, 프랑스 정부에 더 큰 자치권을, 특히 생산품들을 본토에서만 수입하고, 본토에게로만 수출하는 식민지 무역독점법 철폐를 요구하게 된다. 반면, 흑인 노예들은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프랑스 본국에서 수입받으면서, 자유의 희망을 품게 된다 !식민지 부유층들이 모여서 회의를했던 공간인, 파리의 마씨악 호텔.마씨악 호텔 클럽은 흑인들의 친구 협회와 대적하는 포지션의 프랑스 정치 이익집단이였음.프랑스 본토의 혁명으로 인한 대혼란을 틈타, 식민지의 대지주들은, 식민지는 혁명 이전의 법의 적용을 받고, 자신들만의 의회를 갖을 수 있다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킨다. 쌩-도멍그 식민지에서는 한발 더 나가, 무역의 자유와, 자유 흑인을 배제한 의회 설립등을 추진했다. 당연히 프랑스 본국에서는 식민지의 이런 모습이 굉장히 고까웠고, 백인 지도층의 난리부르스를 막기 위해, 흑인들과 손을 잡고 백인들을 억압한다.자신들보다 못한 존재인 흑인들에게 진압당한 백인들은 분노를 불태웠고, 흑인 자유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자유흑인들은 프랑스 본토에서 쟈코뱅이나 흑인의 친구 협회같은 정치 집단과 접촉해 노예제 철폐를 위한 투쟁을 계속한다.이러던 와중, 서력기원 1791년, 8월 14일 Dutty Boukman 이라는 한 흑인 노예를 중심으로, 대규모 노예 반란이 일어난다. 이들은 서아프리카 출신으로, 부두술을 믿던 사람들이였는데, 반란 전에 부두교 집회를 열어, 그곳에서 검은 돼지를 죽이고 그 피를 마심으로써 무적이 되는 의식을 열었다고 전해진다.북부에서 시작된 노예반란은 수천의 백인들을 학살했고, 사탕수수와 커피 농장은 불에 타, 초토화 되었다. 부크만은 반란 도중에 목숨을 잃지만, “왕당파 흑인” 들이 카톨릭과 왕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반란을 일으키는 등의 소란이 계속 이어졌다. 반란군들은 점령지를 늘려나갔지만, 반란군의 통치-권력행사 능력 부재로 인해, 반란 역시 늘어지게 된다.흑인들이 대폭동 대작전을 일으켰다는 소식은 10월이 다 되서야 프랑스 본토에 전해지게 된다. 프랑스의 혁명 온건파들인 지롱드 파 소속 정치인들은 흑인 인권과 자유를 강력하게 지지했지만, 노예제 철폐라는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고, 흑인 자유민들에게 '만' 완전한 시민권을 부과하는 것으로 프랑스 내부에서의 논쟁은 일단락 되었다. 물론 쌩-도멍그 식민지의 백인과 흑인 모두 이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Toussaint Louverture, 아이티 독립과 흑인 노예제 철폐에 큰 공을 세웠다.당시 식민지는 왕당파, 혁명파, 독립주의자, 흑인, 백인들로 저마다 분열되어 있었고, 북방에서 흑인들이 백인들을 학살하며 남하하고 있었다. 이 흑인 반란을 이끌던 인물 중 하나가 아이티의 독립을 이끌어 낸 인물이자, 프랑스의 노예제 철폐를 이끌어낸 장군인 투쌩 루베르튀르인데, 글을 읽고 쓸 줄 알던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 왕족의 후손이였다는 루머가 있었던) 해방 노예 출신의 흑인임. 반란 초창기에는 의사로써, 그리고 군 지휘관의 조언가로써 활동했지만, 후에는 반란군 최고의 군 조직자로써 군 고위직에 오르게 된다.투쌍 루베흐뛰흐는 유럽식 군사 조직과 규율을 통해 3000-4000여명의 반란군들을 통솔했는데, 이들은 군기가 개판인 다른 반란군들과는 달리 엄격하게 통제된 모습을 보였고, 전투력도 강력했기 때문에 반란군, 정부군, 그리고 식민지를 둘러싼 외세 - 대영제국과 에스파냐 왕국 - 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L’ouverture, ‘열다’, ‘개시하다’ 라는 뜻의 그의 이름도 적진의 틈을 벌려 그대로 아군을 승리로 이끄는 그의 군사적 재능에서 유래했다는 썰이있노라.한편, 프랑스 본토에서는, 프랑스의 혁명, 특히 기요틴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16 세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가지를 날린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유럽의 많은 군주국들, 특히 14 살이나 어린 여동생을 잃은 요제프 2세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언제나 프랑스가 탐탁치않았던 대영제국,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들어선 에스파냐 왕국이 주축이 되어 대 프랑스 전선을 형성함.프랑스 본토에서 혁명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에스파냐 총독이 쌩 도멍그의 흑인 반란 지도자들을 회유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당시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리버럴한 국가였고, 위 흑인시민권 인정 사건이 있고난 뒤, 몇년 후, 1794년 2월 4일 칙령을 통해 이미 프랑스는 자국과 식민지 내의 노예제를 금지시켜 버렸었다 !흑인 반란 지도자였던 투쌍 루베흐뛰흐는 에스파냐가 오히려 프랑스보다 흑인 인권, 자유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내다보았고, 이에 투쌍 루베흐뛰흐는 프랑스 혁명군으로써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투쌍은 대영제국군을 무찌르는데 성공하면서 쌩도멍그의 총독이 되었고, 검은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면서, 쌩도멍그는 그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다.실제 아이티 대법원 사진투쌍은 섬의 관리를 위해, 기술력, 특히 행정 전문가들이 많았던 백인 기득권들을 다시 섬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특히 법원에서 백인들을 대거 기용하는데, 그에 반해 흑인들에게는 강제로 자신들이 일했던 곳, 즉 노예로써의 생활을 다시 하도록 강요했다. 당연히 흑인들은 불만을 표출하며 반란을 일으키지만, 투쌍은 이를 잔혹하게 진압한다.나폴레옹 1인 독재 체제 아래, 1802년 5월 20일 법령을 통해 프랑스 식민지 내에서 노예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는데, 투쌍은 이에 크게 반발한다대영제국과 초기 13개주, 그리고 아이티가 위치한 히스파니올라 섬의 지도. 프랑스도 잘나가던 때가 있었는데, 참 아쉽다투쌍은 섬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해나갔는데, 전에 설명했던 식민지 무역독점법을 완전히 어겨가면서 미합중국과 대영제국과 무역했다. 그 밖에도 쌩-도멍그만의 헌법을 만들기도 했고, 독자적으로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부를 장악하고 있던 에스파냐를 공격해 섬을 통일하기도 했음. 당시 프랑스 혁명공화국의 대빵이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에스파냐 간의 화해-친선 무드를 만들고 싶어했는데, 이런 계획에 초를 친 투쌍을 굉장히 싫어했음. 쌩-도멍그는 과도한 자치권을 누리기도했기 때문에, 아미앵 조약으로 2차 대 프랑스 전쟁이 종결되자, 투쌍이 너무 깝친다고 생각했던 나폴레옹은 자신의 처남에게 25000명의 군사를 쥐어주고 카리브 해로, 그리고 안틸러스 제도 식민지로 원정군을 출항 시킨다.당연히 갖은 전쟁을 치뤘던 프랑스 혁명 공화국의 군대는 에스파냐 왕국, 대영제국의 어중이 떠중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력을 갖고 있었고, 1802년 5월, 크레트-아-피에로 요새가 함락되고 난 뒤, 루베르튀르는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루베르튀르는 인기가 많은 정치인이 아니였고, 더욱이 생-도멍그의 완전한 독립에 의문을 품는 동료들 때문에, 프랑스 혁명정부는 가택연금만 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루베르튀르를 프랑스에서 가장 추운 지방 중 하나인 알프스의 쥐라라는 지역의 한 감옥에, 그 어떤 사법절차도 없이, 재판도 없이 투옥시켜버린다.한 평생 카리브 해의 뜨거운 태양 밑에서 살아왔던 루베르튀르는, 연간 평균 기온 7도에 달하는 알프스의 한기를 버티지 못하고 몇 개월간의 투감생활 끝에 1803년, 옥중에서 병사하고 만다. 루베르튀르가 프랑스 본국으로 이송되면서 더이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 본국에서는 생-도멍그에 노예제를 부활시키라는 명령을 원정군에게 하달한다. 이미 무장해제 당한 생도맹그 군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프랑스 원정대는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즉결처형하고, 물에 빠뜨려 죽이고, 유황에 질식시켜 죽이며, 사냥개를 풀어 개밥이 되게 했다.투쌍을 싫어해서 원정대에 합류했었던 흑인 지도자들은 프랑스가 자신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릴거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들은 원정대에서 대거 이탈해 나갔다.1802년 10월 13일, 프랑스의 안틸러스 제도 식민지인, 그리고 아직도 프랑스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는 과들루프에서 노예제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계기로, 생도멍그에서는 다시 반란의 불길이 치솟았다. 흑인 장군들이 “독립군” 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투쌍의 부관이였던 장-자크 데쌀린이 장군들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으며 원정군을 강하게 압박했다.프랑스 원정군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와 황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패배, 항복하게 되고 데살린은 생도맹그의 이름을 아이티로 바꾸고, 아이티가 독립국가임을 세계에 선포한다. 투쌍이 죽고 겨우 1년 후의 이야기이다. 아이티 왕국의 황제가 된 데살린은 프랑스의 2차 원정군이 두려워, 그리고 흑인 인구가 멸종될까 두려워 아이와 여성들을 포함한 3000-5000여명의 백인 거주민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혁명 이전의 인구 55만의 프랑스령 생 도멍그는 30만의 아이티가 되어버렸다. 카리브 해에서는 독립과 반란에 대한 이야기에 아이티가 빠짐없이 등장하게 되었고, 탈출에 성공한 프랑스인 20000여명은, 바로 옆에있는 섬인 에스파냐 령 쿠바에 정착하게 되지만, 나폴레옹이 에스파냐를 침략하자 쿠바에서의 반프랑스인 폭동이 일어났고, 따라서 이들은 쿠바에서 도망쳐,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식민지의 누벨 오를레앙, 현재 뉴올리언스에 정착하게 된다.혁명전쟁으로 인해 돈이 부족해진 나폴레옹은, 더이상 대서양 너머로 힘을 투사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기의 딜인 루이지애나 할양을 통해, 북아메리카의 막대한 식민지 영토를 초창기 미합중국에 내다 팔게 된다. 미합중국은 루이지애나 할양과 서부 개척을 통해, 대서양국가에서 대서양-태평양의 두 바다에 두루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프랑스는 1825년이 되어서야 아이티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프랑스는 아이티에 압도적인 “독립 보상비” 를 요구했고, 이로인해 아이티는 장기간 국가파탄사태에 직면하게된다.여전히 아이티는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나라 대빵이 사람으로 바베큐해 죽이는 갱단 보스인 상태이다. -------레퍼런스 Hispaniola — Wikipédia (wikipedia.org)Révolution haïtienne — Wikipédia (wikipedia.org)Toussaint Louverture — Wikipédia (wikipedia.org)Toussaint Louverture (1743 - 1803) - L'héritier noir des Lumières - Herodote.net
작성자 : 도시드워프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