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구로 쿄헤이 / 80년생 애니메이션 감독.
감독작으로 "4월은 너의 거짓말" "오컬틱 나인" "고래의 아이들은 모래 위에서 노래한다" 등이 있다. 현재 원작물과 오리지널 작품을 준비중.
- NT가 창간된 40년 전 이시구로 감독은 5살이었네요.
이시구로 : 마침 지금 아들이 5살인데요. 질문장에 그렇게 써져 있는걸 보고 "아 똑같은 나이구나"하며 묘하게 감회 깊었습니다(웃음).
- 아하하. 어렸을때부터 애니를 좋아하셨나요?
이시구로 : 내성적이고, 밖에서 노는 것 보다 집에 있는걸 더 좋아하는 애였지만, 그렇게까지 의식한건 아니었어요.
유치원 고학년 쯤에 "세인트 세이야"가 시작되서, 그때부터 처음으로 애니를 확실하게 의식한 느낌이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쯤 되니 일단 애니를 졸업하고 "드래곤볼"정도만 봤어요. 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야구에 빠졌거든요.
- 그때 애니로 되돌아온 계기가 있었나요?
이시구로 : 고교 수험을 앞두고 조금 시간이 생겼을 때 우연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게 된 일이네요.
OP부터 지금까지 봐온 애니와 결이 달라서 "이건 재밌을지도?" 생각해 일단 보기 시작했더니 푹 빠지게 되서.
당시 "에바"의 영향력은 굉장했는데, 야구부나 축구부의 평소에 애니를 전혀 보지 않는 타입의 사람들까지 보고, 떡밥 풀이라든가 "어떤 캐릭터가 좋아?"같은 이야기를 했던게 기억나요.
- 애니를 직업으로 삼기까지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나요?
이시구로 : 중학생 시절 야구랑 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축으로 음악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원래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뮤지션이 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그쪽의 재능은 없구나 하고 포기했을 때 "에바" 이후의 또 다른 축인 애니의 길로 나아가기로 결정했어요.
애니라면 소리도 다루기 때문에 음악활동 경험도 살릴 수 있을거 같았고요. 그래서 선라이즈에 입사하게 됐습니다.
- 그렇게 애니 업계에 뛰어든지 올해로 20년. 그 동안 전환점이 됐던 사건이라면 어떤게 떠오르시나요?
이시구로 : 08년부터 09년 쯤의 일이네요. 제작진행에서 연출조수가 되어, 연출가로서의 전환점이 그 무렵에 찾아왔습니다.
그보다 조금 전에 리먼쇼크가 터져서 선라이즈도 그 여파를 받았어요.
당시 저는 8스타 (8스튜디오의 약자. 마이히메, 경계선상의 호라이즌, 러브라이브 등이 대표작. 현재는 조직개편으로 소멸) 에 있었는데, 오리지널 기획이 무산되어 버렸죠.
그리고 선라이즈는 스튜디오마다 독립채산세인 회사였기 때문에 무산된 만큼 뭔가 다른 일을 맡아야 했어요.
그래서 다른 회사에서 받은 그로스 일 중에, 아오키 에이 감독의 "방랑소년" 7화가 있었어요.
제가 캐릭터물, 일상연기 작품을 좋아한다는걸 스튜디오 사람한테 말했더니 "이런 의뢰가 왔는데 할래?"라 말해줘서.
시무라 타카코 센세의 만화를 좋아했고, 이런 찬스는 더 없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부디!"라고 답했습니다.
당시 콘티 경험은 2개 정도밖에 없었고, 그 전까지의 일은 전혀 잘 되지 않아서 보람이 없었지만요(웃음).
이제 그저 열의만으로 아오키 감독에게 "시켜주세요!"라 부탁하고, 결과, 맡겨주셨어요.
당연히 감독의 체크백으로서 콘티에 수정이 들어갔지만, 꽤 제가 그린걸 남겨주셨죠.
그 중에서 제일 기뻤던게, 마지막 씬에서 원작에서도, 오카다 마리 상의 시나리오에도 적혀있지 않은 대사를 추가했는데 살려준거에요.


- 굉장한 일이네요.
이시구로 : 그 "방랑소년" 7화를 한 덕분에, 당시 애니플렉스에 있던 사이토 슌스케 프로듀서가 "4월은 너의 거짓말"감독을 오퍼해줬어요.
더 프라이베이트적인걸 말하자면, 7화의 작화감독이 지금의 아내(애니메이터 아이케이 유키코)에요(웃음).
만들었을땐 사귀지도 않았지만요. 처음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끝난 후 우치아게 파티에서 대화를 하고, 사이가 좋아지고, 그렇게 결혼했어요.
- 공사 모두 큰 전환점이네요. 방랑소년 7화에서 보람을 느꼈기 때문에 선라이즈를 떠나 프리랜서로 일을 해나가려 한건가요?
이시구로 : 애당초 선라이즈 연출조수 계약이 2년 한정 기한부였어요. 당시 선라이즈는 크리에이터를 사원으로 고용하는 형태가 아니었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 감각을 잘 모를수도 있겠네요. 당시 애니회사는 기본적으로 스태프를 정사원으로 고용하지 않았죠.
이시구로 : 맞아요. 꽤 변했죠. 업계가 정상화 됐습니다. 제가 업계에 들어오고나서 10년 동안 업무 환경이 많이 개선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밖에 힘들어진 부분도 있지만요. 일하는 시간이 짧아진 만큼 전체 제작기간이 길어졌어요.
그런데 제작 예산은, 기간이 늘어난 만큼까지 충분히 증가하지 않았어요.
결과 총 예산은 증가했는데, 제작 현장에는 돈이 남기 어려워진게 현실입니다.
참가하는 사람들이 심신적으로 건강해졌지만, 이번엔 "수입이 커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복잡하지요.
- 과연......
이시구로 : 업계 구조 뿐만 아니라, 들어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성실한 사람"이 늘었네요.
저 자신도 그럭저럭 육아를 하며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생활 시간을 일반적인 일에 맞춰야, 어떻게든 가정이 유지돼요.
그래서 아침 7시에 일어나고, 저녁 5시 쯤에는 유치원에 마중가야 하기 때문에 일을 마칩니다.
토 일요일은 일하려고 해도 일 할 수 없고, 이제 완전히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네요. 옛날 애니 업계였다면 이건 허용되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해요.
이건 아내와도 자주 이야기하는건데, 00년대 중반 쯤은 더 엉망진창이고, 인생이 망가지지 않으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상황처럼, 제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지금과 같은 생활을 했다면 아마 다른 사람한테 일이 돌아갔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지금은 저와 같은 생활감을 가진 사람이 업계에서도 드물지 않아요.
이게 제일, 애니 업계가 세상에 맞게 변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업계 밖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감독 일을 10년 넘게 해오셨는데, 애니 팬이나 주변 분위기의 변화가 느껴졌나요?
이시구로 : 원래 시청자를 제대로 생각하긴 하되, 너무 생각하지 않는 정도의 스탠스입니다만, 그래도 시청자의 분위기는 달라졌다고 느껴지네요. 이제 애니가 완전히 서브컬쳐가 아니게 됐어요.
이제는 국가 차원에서 애니로 돈을 벌자는 식의 분위기가 됐죠. 예전부터 말은 나왔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할 수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대학생인 조카가 있는데, 바로 그런 의미의 "애니 네이티브"에요. 풀보이스 게임의 보급도 크지 않을까요.
옛날 우리가 오타쿠로서 느낀 소외감이 애당초 없는 상태로 20살, 30살이 된게 현재의 젊은 애니 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친척 아저씨가 애니 감독을 하고 있단걸 자랑스러워 해줘요(웃음).
- 이제부터 앞으로 어떻게 되갈까요. 생성 AI를 시작으로 아직도 변화가 계속될거 같은데요.
이시구로 : 생성 AI에 관해서는 최근에 좀 고민해 본 적 있습니다.
3DCG 애니메이터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지만, 2D의, 이른바 손그림 애니메이터는 툴이 변해도 손을 움직이고 있단거 자체는 변하지 않아요.
생성 AI가 판권화 같은걸 순식간에 만들 수 있다 해도, 완성된 그림의 가치가 아니라, 그걸 그릴 수 있는 사람의 가치는 남는거에요.
즉, 인간 그 자체가 그리는 것의 라이브감이랄까, 그리는 것 그 자체에 가치가 태어날거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발상을 펼쳐나가다보면, 실은 손으로 그린 애니메이션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살아남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실제로 작년의 "룩백"이라든가, 그 전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것인가"를 받아들여주는 방식에도 그런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시구로 : 맞아요. "룩백"은 오시야마 키요타카 상이 대량으로 그림을 그린, 그 토픽 자체에 가치가 있는거에요.
"얼마나 노력을 많이 들인거야!"하면서.
물론 완성된 영상의 훌륭함도 있지만, 그렇지만 그것 뿐만이 아닌 부속 정보로서 "정말로 그렸다"는 것 자체가 가치를 낳고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향후의 애니 제작에서는, 여러 부분에서 그런 "신체성"의 가치가 높아질 것 같습니다.
- 그런 미래 예상도를 상정한 감독 자신은 어떻게 행동할 계획이신가요?
이시구로 : 우선 최대한 건강하게 계속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이러나저러나 재미있거든요, 이 일.
그래서 제작 방식이 변하더라도, 애니 만드는 일 자체에는 계속 관여하고 싶어요.
그 부분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네요.
저 자신은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연출가로, 그런 의미에서 "신체성"으로 승부할 수 없는 점이 콤플렉스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아내 말로는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그릴 수 있는 범위 내의 오더를 해버린다"고.
그릴 수 없는 연출가인 편이 이상을 더 순수하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기술 혁신이 아무리 진행됐다고 해도 그 스탠스로 있으면 감독으로서의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그 부분을 무너뜨리지 않고 해나가고 싶어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품 -
신세기 에반게리온 : 야구와 음악에 열중했던 중학생 이시구로 소년이 애니에 대한 흥미를 되찾은 계기가 됐다.
방랑소년 : 제작은 AIC Classic. 이후 스튜디오 TROYCA를 설립한 멤버들이 주요 스태프로 참가. 이시구로는 7화의 콘티 연출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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