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비가 싫다
사람을 잡아채서 구렁텅이에 쳐 박아 버리는 느낌이 들어서 싫다

빗소리가 어깨를 가라앉게 해서 싫다

항상 개야구를 질 때마다 머릿속에서 비가 온다
한가롭게 개야구나 쳐 보고 있는 현실로 돌아올 때마다 비가 온다
가슴에 정말로 쫙쫙 가느다란 빗금질 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무슨 내 팔자에 그딴 건 필요 없다 이딴 소리를 지껄이다가도
친구의 소개팅 제의에 혹하는 나는 이 빗구름을 빠져나올 수 없을 거 같다
또 존나 어이없게도 글로 밥숫갈이나 뜨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실천은 안한다

이걸 슬럼프라고 불러야 할까 번아웃이라 불러야 할까 투정이라 불러야 할까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모른다
정확히는 그 뚜껑을 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가 탓해야 할 것은 졸로나도 비도 개야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그 딱딱한 현실을

시발
그래 다 안다 내 탓인 거
코로나 핑계도 제대 핑계도 이제 약발이 떨어져 갈 시기이다

그 와중에 붉청신의 하위 데뷔 장면을 봤다
숨이 탁 막혔다 선크림 때문이었나
저 무대에 당당히 선 붉청신이 그렇게 빛나 보일수가 없었다
작년 고랄신은 솔직히 관객도 별로 없고 내 상황도 낫고 그래서 뭔가 와닿지 않았는데 참 기묘하더라
그 순간 음해고 편견이고 다 뭔 소용인가 싶어졌다. 하.

그냥 그 순간의 감정을 묻어두고 그 전처럼 돌아갈 수도 있지만
이번엔 그러기 싫다
이 빗구름을 걷어내고 싶다
그냥 저 사람들처럼 나도 한 번은 뿌듯하게 꿈의 무대에 들어서고 싶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늦은 거라는 모 코미디언의 말처럼 늦어버린 걸 알지만,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달라지고 싶다.
몸 관리를 시작하고, 조금씩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그런 사소한 점이라도.

그러면
점점 달라지면
언젠가 나에게도 빗소리가 달콤하게 들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