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7일 아침, 전남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와 월야리(동산·괴정·송계·순촌마을) 앞 남산뫼에 까마귀 떼 같은 한 무리의 군인들이 중대장 지시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작전준비를 끝낸 이들은 그 자리에 매복한 채 중대장의 수신호를 기다렸다.
월악리와 월야리 주민은 뭔가에 홀린 듯 이른 새벽부터 잠이 깼다. 전날 군인들이 인근 정산리에서 70여명의 빨치산과 내통한 주민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이 뒤숭숭한 탓에 잠을 설쳤다. 몇몇 젊은이들은 험한 꼴을 피하고자 서둘러 동네를 벗어나 몸을 숨기기도 했다.
정산뿐 아니라 계림리에서도 60여명의 빨치산과 내통한 빨갱이들이 무자비한 총검에 죽임을 당한 터라 이곳만은 군인들 발길이 미치지 않길 바라며 어른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금세 현실이 됐다.
작전은 토끼몰이식으로 이뤄졌다. 동이 터오자 어슴푸레 비췄던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고, 7개 마을을 둘러싼 군인들은 집집마다 뒤지며 빨치산과 내통한 빨갱이들을 끌어냈다.
비탈진 곳에 들어서니 덩그러니 놓인 무덤 위로 세 자루의 기관총이 설치됐다. 총구는 며칠 전 풍악소리가 요란했던 월악산(월야면 외치리) 쪽을 내려 봤다. 그 밑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은 뒤 “엎드려”라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총격이 가해졌다. 사람들은 흉측한 몰골로 쓰러졌고, 일부는 시체 속에 파묻혀 숨어들었다. 비명과 울음소리로 남산뫼는 순간 아비규환이 됐다.
*총살이 끝난 뒤에도 군인들은 엎어져 있는 시신을 총대로 휘두르며 꿈틀거리는 이가 있으면 가차 없이 확인 사살했다. 그렇게 빨갱이 200명 이상이 싸늘한 주검이 됐다.*
마지막 빨치산 토벌전, 불갑산 ‘대보름작전’
불갑산은 당시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 산하 불갑지구사령부(사령관 박정현)가 들어서 있었다. 불갑산 남서부줄기에 해당하는 모악산 용천사에 불갑지구당(위원장 김용우) 본부가 설치됐고, 무장투쟁을 위한 훈련장도 마련됐다. 또 1951년 2월까지 <불갑산 빨치산>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할 만큼 세도 강했다. 이들은 함평, 영광, 장성, 무안, 목포 등 전남 서북권을 관할하며 군경과 끈질기게 대치했다.
군인들은 불갑산 토벌작전을 위해 마을을 소개하던 중 빨치산과 내통한 수많은 빨갱이 주민들을 총살했다. 그리고 빨치산이 후퇴한 뒤 내통한 민간인만 남은 이곳 불갑산에서 마지막 살육전이 벌어진다.
불갑산 ‘대보름작전’은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를 중심으로 연대 중포중대, 대전차포중대, 수색소대 등이 참여했다.
함평 해보·나산·신광면을 비롯해 영광 불갑·묘량면 등지에서 밀고 온 군경은 불갑산 한 덩어리를 두고 연대작전을 폈다. 이들은 포위망을 좁혀가며 숨통을 조였고, 그렇게 빨갱이와 반군의 근거지로 향했다. 하지만 ‘대보름작전’이 있기 전 빨치산은 불갑산을 벗어나 장성의 태청산(해발 583m)으로 후퇴했고, 일부는 나주 금성산(해발 450m)으로 숨어들었다.
금성산에 들어간 빨치산은 영산강을 건너 장흥군 유치면 국사봉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인민유격대 전남 제3지구인 유치지구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불갑산에서 군경을 기다린 건 빨치산에 부역하고 협조한 빨갱이들이었다. 함평에서 만난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빨치산은 이미 도망갔고, 무기도 없는 일반인만 있었다”고 변명했지만, 군경은 개의치 않았다. 이들 모두를 ‘빨갱이’로 간주하고 보이는 즉시 사살했다.
군인들은 해보면 광암리 가정마을 뒷산 부근에 조성된 방공호(길이 180m)에 빨치산에 부역한 빨갱이들을 몰아넣고 그대로 난사하기도 했다. 당시 현장에서 살아난 문만섭(당시 17세)씨는 *이곳에 300여명의 유해가 매장됐고, 가족 단위로 빨치산에 부역했다가 총살당한 사람이 많다고 증언했다.*
함평 불갑산 일대의 희생자들은1천에서 최대 3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함평의 희생자들은 모두 1천164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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