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클로저스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클로저스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라인사태 배후는 日자민당…지지율 노려 '경제전쟁' 일으켰다" 고닉팠
- 싱글벙글 러시아 급식들의 패기 ㅇㅇ(211.215)
- 싱글벙글 문과감독이 만든 재난영화 ㅂㅈㄷ
- 까마귀 소녀가 쇼타군을 둥지로 납치해간 이유.manhwa 사자베기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70분 초기편집판 공유 비디오변환
- 토쿠시마 - 토라야 코츄안 (虎屋 壺中庵) 나기
- 싱글벙글 고지능자가 친구가없는 이유.jpg 딸근이
- 내가 점찍어둔 힙스터 여행지 공유한다... ㅇㅇ
- 뷰티풀너드가 이센스 디스는 못 하는 이유 ㄷㄷ...JPG ㅇㅇ
- 김호중...사고직전 유흥주점 들렀다 ㄹㅇ...jpg Adidas
- 싱글벙글 대한 해군.jpg ㅎㄹ.
- 광명시청 근처 2편 이지
- 싱글벙글.. 완장이 돈 뿌리던 갤러리.jpg ㅇㅇ
- 싱글벙글 명품가방 리폼 장인 실력ㄷㄷㄷ.jpg 수인갤러리
- '윤석열 상품' 출시…"평소 철학 반영" 고닉팠
영국을 명말시킬 뻔한 나치의 위조지폐 제조 작전...jpg
1939년 9월 18일,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2주 밖에 되지 않았을 시점에 독일 재무성은 하나의 비밀작전을 수립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안드레스(Andres) 작전이었다. 작전 내용은 대규모로 위조 파운드화를 제조, 영국 상공에 살포하여 영국 경제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당시 SS(나치 친위대)의 수장이었던 히믈러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그렇지만 이 계획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재무성의 작전을 좌절시킨 장본인인 SS가 도리어 그 작전을 부활시킨 것이다. 1942년 SS 중령 베른하르트 크루거가 이 작전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베른하르트 작전(Operation Bernhard)이라 한다. 작전의 총책임자가 된 베른하르트는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유대인 기술자들과 인쇄공, 회계사는 물론 패션디자이너까지 동원한다. 이들 중에서 핵심 인력은 유대인 위조범 솔리 스몰리아노프와 유대인들이었다. 그를 비롯한 유대인 기술자들은 수용소에서 차출되어 옮겨진다. 그곳은 바로 19구역이라고 불리는 베를린 근교의 모처였다. 이 19구역에서는 제한적이나마 수감자들에게 개인 여가시간을 제공하였고, 사복과 세면실과 화장실이 포함된 개인 공간이 있었다. 식사에는 스프와 커피가 딸려나올 정도로 아주 좋은 조건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마냥 행복하지 않았다. 이 작전이 끝난 후의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너무나도 자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튼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유대인 기술자들에게 그러한 대우를 해줬을 정도로 나치 독일은 이 작전에 큰 공을 들였다는 것이다. 이 19구역의 기술과 규모는 날로 성장해나갔다. 18구역을 병합하였고 전문 회계실과 인쇄소, 사진 연구소 등등의 시설까지 별도로 갖추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구역에서 만들어내는 파운드화와 영국에서 생산해낸 진짜 파운드화의 갭은 여전히 좁힐 수가 없었다. 석영램프 불빛을 비추었을 때, 진짜 파운드화와 위조 파운드화의 색이 달라지는 문제가 특히 그랬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진전이 없게 되자, 총책임자 베른하르트는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위폐 제조를 중단할 것을 지시한다. 이에 유대인 기술자들은 공포를 느꼈다. 위폐 생산을 중단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이용가치가 더 이상 없는 것이므로 죽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대인 기술자들은 목숨을 걸고 밤낮으로 이 문제에 매달리게 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19구역 대형 인쇄기에 화재가 발생한다. 이 때를 노려 유대인 기술자들은 탈출을 감행하려 하지만, 총책임자 베른하르트는 화재현장을 통제하고 소방관 조차도 막아버린다. 유대인 기술자들은 완벽한 위조지폐를 만들어내는 것 외에는 자신들에게 탈출, 생존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문제 해결에만 몰두하게 된다. 결국 유대인 기술자들은 진짜 파운드화와 구별 조차 할 수 없는 완벽한 잉크를 제조하는 데에 성공하고야 만다. 그리고 다음 해, 총책임자 베른하르트는 주머니에서 5파운드화를 꺼내더니 "이걸 보게, 제군들. 이제 이건 대영제국 은행에도 유통되고 실제로 쓰이고 있다네. 나는 자네들이 자랑스럽네, 어서 공장을 확장하자구." 라는 말을 하며 아주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베른하르트는 인력을 늘리고 체계적으로 파운드화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위조 파운드화는 4단계로 나뉘어 생산, 유통되었는데 1단계는 전문가도 구분할 수 없는 완벽한 위폐로, 각국의 독일 스파이들에게 공작금으로 제공되었다. 총 생산량의 10~15%를 차지했다. 2단계는 그 보다 조금 낮은 퀄리티지만 일반인은 속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선 전문가도 속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3단계는 중립국과의 무역에 쓰였으며 4단계는 영국 상공에 살포할 예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작전을 위해 1억 3천 4백만 파운드가 위조되었으나 독일의 공군참모총장 괴링과 히믈러의 의견이 잘 맞지 않아 실행되지 못했고 1944년에 이르러서는 작전 실행은 커녕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하다시피 하여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덧붙여 1945년 초에 들어서는 미국 달러화의 위폐 제작까지 시도했으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이것이 쓰일 일은 전혀 없었다.
작성자 : 설윤아기고정닉
일본의 섬노예 사건 (일본의 신안)...jpg
전라도의 염전 노예 사건들을 보고 미개하다고 극딜하는 일본이지만, 그런 그들도 예전에는 엄연히 섬노예를 쓰고 있었던 나라야. 이 사건은 나사케지마(情島 - なさけじま) 한자로 '정' 이라는 이름을 가진 섬에서 벌어진 비정한 이야기야. 쇼와 23년 (昭和23) , 서기 1948년 7월, 세토내해(瀬戸内海) 에 떠있는 야마구치현의 야시로지마 (屋代島) 에 초췌한 몰골을 한 19세, 17세의 소년들이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어. 이들은 맞은 편에 있던 나사케지마(情島)에서 조업 중인 어선 등에서 노를 젓는 등, 강제노동을 하던 노예 소년들이었지 옛날부터 나사케지마에는 카지코(梶子 - かじこ) 라 불리우는, 어선의 키를 잡거나 노를 젓는 역할을 아이들에게 맡기는 풍습이 있었어.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가난한 집 아이들을 사다가 3-5년 정도 부려먹고 내보내곤 했는데, 패전 이후 더욱 일손이 부족해지자, "물고기를 배터지게 먹게 해주마" 같은 말로 데려온 뒤 통수쳐서 가혹한 노예 생활을 시키게 된 거야. 이 섬노예 소년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1시가 되서야 잠이 드는 강제 노가다충 생활을 매일 지속해야 했고, 조업을 완전히 쉬는 일부 명절을 제외하고 쉬는 날은 존재하지 않았어. 거기에 매일 지속되는 가혹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거의 식사를 주지 않아서 당초의 물고기를 배불리 먹여주겠다는이야기는 다 거짓부렁이었고 영양실조로 나날이 여위어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 물론 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아무튼 두 소년의 발견으로 이 사건이 지방 신문에 알려지고, 경찰과 정부의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지. 이 때 당시 발견된 노예 소년 들의 수는 약 50명. 지금의 나사케지마의 인구가 13명인데 비하면 많은 숫자였어. 물론 각자의 사연도 기구했는데, 빚을 갚지 못해 아이가 부모의 차금 대신 팔려온 경우, 전쟁 고아인 경우 심지어는 소년원(그 당시의 감화원-感化院-) 이나 고아원에서 원장의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비밀리에 섬으로 팔아넘긴 경우 등등 근대화 된 사회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사실들이 줄줄히 터져나왔지. 거기에 해당 사건으로부터 2년 정도 전에 한 소년을 우리에 감금한 뒤 굶겨죽인 사건도 발각되었지. 감금한 범인은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모든 정황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섬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행정관계자나 기자, 경찰들조차 이 사건을 이해하는 "척" 을 했을 뿐이야. 패전 이후 일본도, 천조국 성님들에게 "기브 미 쪼꼬레또" 를 외치며 따라다니던 상황이고 모두가 빈곤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입장이라는 사고 방식이 강했고, 당연히 전쟁 고아들도 넘쳐나는 상황이었지. 그런 상황에서 섬노예 소년 하나 둘 쯤 굶어 죽는 것이 무'슨 상'관 이냐는 분위기가 강했고 하다 못해 변변치 않아도 밥이라도 주는 게 어디냐며 이런 섬노예를 "필요악" 으로 까지 보는 인식이 강한 상태였어. 이 사건에서 정부가 해준 것은 12세 이하의 아동에게 노동을 강요하지 말 것, 의무 교육을 받게 할 것 법에 의하지 않은사형(私刑)을 하지 말 것을 문서화 한 것에 불과했고, 섬노예 소년들을 이용한 어업 활동은 그대로 유지되었어. 굶겨죽인 1명의 소년 이외의 소년들에 대한 강제 노동 등은 전부 불문에 부쳐졌고, 실제로도 형사 사건화 되지 않았지. 이 사건으로 10여명의 소년들은 섬을 떠났지만 대다수의 소년들은 섬에 남았어. 섬을 떠나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도, 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지. 이렇게 종결되는 줄 알았던 섬노예 사건은 3년 후인 1951년에 학대를 견디지 못한 5명의 소년들이 탈주함으로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 그 사건 당시 정부의 지도가 전혀 지켜지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정부가 묵인하는 모습을 보고 강제 노동 등 대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밝혔어. 이 사건을 소재로 NHK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카지코(舵子) 라는 대하 드라마를 만들었고, 1957년에는 분노의 고도 (怒りの孤島) 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지. 이 나사케지마 외에도 이 당시 일본의 농촌이나 어촌 들에서는 인신매매에 의한 가혹한 노동이 강요되는 사건들이 각 지역 풍습으로 남아 있었어. 오키나와 이토만 지방의 이토만우리(糸満売り - いとまんうり) 오키나와 케라마 제도(慶良間諸島)의 케라마우리 (慶良間売り) 오키나와의 빈농이 부농에게 자식을 노동력으로 파는 인쟈(インジャ) 미야기 현(宮城県) 의 모라이코(モライコ) 등 각 지역에서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도시로 노동력이 이동하고, 한국 전쟁 등의 특수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는 60대 중 후반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작성자 : 설윤아기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