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던전앤파이터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던전앤파이터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싱글벙글 의외로 반일오졌던 새끼들...jpg 닭장매니아
- 美, 대만 침공 얼마 안 남아... 미국서 나온 디데이 난징대파티
- 위블리) B1(블라인드) 피트충
- [단편] 플래시 카운터 下 나보이
- A-WEB) 사라진 선관위 중국인 99명 행방 ㅇㅇ
- [인터뷰] 웃음 잃은 손흥민, “제가 축구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공치리구
-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배낭여행 후기 1편 firetrap13
- 싱글벙글 고속도로 휴게소 음식점 근황 예도리
- ARCC MAIN BXSL같은 BDC 분석하는법 풋바오
- 세기말 모두가 국장하던때 거시팀김씨
- (유튜브같이보자) 일본에도 남성혐오가 있을까? ㅇㅇ
- 판사 신상털기에 협박까지... 도 넘은 극우 유튜버들과 추종자들 ㅇㅇ
- 국힘 비공개회의서 ‘중국 부정선거 개입설 여론전 활용’ 제기 ㅇㅇ
- 유럽도 대석열 지지 입갤 ㅇㅇ
- 윤 대통령, 구속영장심사 불출석…"물 흐르는 대로 하겠다" 삼디문도미닉
스팀출시를 하며 느꼈던 1인개발에 관한 고찰
게임 개발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작업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1인 개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기획, 프로그래밍, 그래픽, 사운드, 마케팅까지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한다. 필자 역시 취준생이지만 1인 개발자로서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1인 게임 개발이 갖는 어려움과 그 과정에서의 고민을 공유해보고자 한다.1. 기획 단계: 아이디어의 무게최근 핫했던 1인게임은 발라트로, 리썰컴퍼니 등 "어케 혼자했습니까 선생님들,,"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퀄리티면 퀄리티, 회사 프로젝트 였으면 여러명이 달라붙어서 해야했던 그런 프로젝트인데,,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 생각하고.하루에 수십개의 게임이 나오지만 결국 성공한 인디게임들을 보면 신선하고 기발한, 또는 이미 있던 요소에 개인만이 넣을 수 있는 퍼포먼스 들이 시장에 잘 통했다고 생각한다.필자도 항상 게임 아이디어를 생각하지만, 어렸을때의 창의력과 지금 나이가 먹고나서는 확실히 창의적인 생각이 줄었다는 생각을 한다.게임개발자들은 보통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고치고 고쳐서 결국 미리 테스트버젼을 만들어보고 괜찮으면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를 시작한다. - 아예 엎었지만 뭐 대충 다들 이렇게 시작하지 않을까,,-2. 개발 단계: 한계와의 싸움게임 개발은 단순한 프로그래밍 작업이 아니다. 하나의 기능을 구현하는 데에도 예상치 못한 버그가 발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하루가 지나가는 경우도 흔하다.필자의 경우, 던전 생성 시스템을 DFS 알고리즘으로 구현하면서 방향 배치 문제를 겪었고, 해결하는 데에만 며칠이 걸렸다. 또한, 씬 전환 및 상태 관리에서 익숙하지 않은 디자인 패턴을 적용할 때도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특히, 1인 개발에서는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영역에서도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 큰 부담이다. 개발을 하면서도 "이걸 왜 내가 다 해야 하지?(특히 사운드)"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림이나, 모델링 에셋 등 만능캐가 아니면 정말 힘든 분야다.하지만 하나씩 해결해 나갈 때의 성취감은 1인 개발만이 줄 수 있는 보상이다.암튼, 여러 한계를 깨부수며 결국 출시를 준비하게 될텐데,,,3. 출시 준비: 끝이 보이는데도 끝이 아니다개발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이제 게임을 세상에 공개할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출시를 앞두고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버그 수정, 최적화, UI/UX 개선, 폴리싱, 마케팅 같은 작업들이 쏟아진다.특히, 게임을 더 완성도 있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기면서 계속해서 기능을 추가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무한한 수정 및 새로운 기능추가의 지옥에 빠질 위험이 크다. 결국, 본인이 처음 설정한 목표에 집중하고 "언제 출시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중요한 도전 과제다.4. 스팀 출시이게 진짜 처음에는 머리 돌아버린다.영상 편집도 잘 못하고, 포토샵도 못하지만.트레일러 및 컨셉아트 및 스팀페이지 작성,, 에셋검수, 스팀페이지 검수 등 엄~~~~청 많다...대략 25가지 이상 필수항목을 완료하면,,스팀페이지 등록 및 검수와, 게임 검수,, 그리고 나면 검수완료가 뜨고 2주 동안 스팀페이지가 홍보가 되고출시버튼이 활성화 된다,,맞다,, 사실 이말하려고 빌드업한거다,, 이 글을 완료하고나서 바로 출시버튼을 누를 것 이다,,내가 게임개발자를 희망하면서 만든 게임이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배운 것 들이 너무 많고,, 영광적인 순간을 기록에 남기고 싶었다.여러분들이 보는 유명한 게임은 최소 7천명 이상은 출시 전 부터 찜하기를 누른 작품들이고 필자는 50명정도 모은게 끝이다.인디게임들은 결국 마켓팅이 제일 중요하고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다른 1인 개발자가 이 글을 본다면, 개발과정이나, 홍보를 열심히 알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마지막으로 아무도 안사도 괜찮지만,, 여기에서 도움도 많이받고, 그냥 출시 끝내서 자랑하고 싶었구요,, ( 자랑할 사람도 없음 )세상에 내놓은 제 애기 많이 응원해주시고, 앞으로 열심히 또 개발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트레일러 올리고 부끄러우니 도망가겠습니다,, 피드백이나 새로운 게임 아이디어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https://youtu.be/w3andc0lAwc결론: 끝없는 도전이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다1인 게임 개발은 힘들고 외롭지만, 동시에 가장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구현할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모든 경험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작은 성취도 크게 느껴진다.혹시 1인 개발을 고민하고 있다면, 완벽한 게임을 만들려 하기보다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그리고 무엇보다 즐기는 마음이 있어야 끝까지 갈 수 있다.오늘도 1인 개발자들은 모니터 앞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작성자 : 라비에옹고정닉
정성글) 레닌-스탈린 시기 현실사회주의 (3/3)
[시리즈] 레닌-스탈린 시기 현실사회주의 · 정성글) 레닌-스탈린 시기 현실사회주의 (1/3) · 정성글) 레닌-스탈린 시기 현실사회주의 (2/3) · 정성글) 레닌-스탈린 시기 현실사회주의 (3/3) 1924년, 레닌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만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끌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대신, 유언장을 통해 후계자 후보들에 대한 의견 정도만을 남겼다. 레닌의 유언장에서는 스탈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스탈린 동지는 서기장이 되면서 무한한 인사권을 갖게 되었지만, 그 권한을 신중히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중략...) 스탈린은 너무 거칠다. 이러한 결점은 서기장 직책에선 용납되지 않는다. 동지들이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임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중략...) (스탈린을 대체할) 이 사람은 동지들에게 더 관대하고, 보다 인내심이 강하고, 충성스럽고, 예의 바르고, 덜 변덕스러우면 된다. 이 점들이 아마 보잘것 없는 작은 일로 보일 수 있지만, (...중략...)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그러나 레닌은 자신의 명성을 활용하여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사라도 확인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년에 경고만을 남겼을 뿐이고,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레닌이 범한 실패 중 하나가 되었다.1922년, 스탈린은 서기장이 되었다. 서기장이 되면서 그가 얻은 인사권은 매우 강력한 권리였다. 레닌은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에, 후계자는 당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당은 누구인가? 당은 인민이었다. 그 인민은 누가 선택하는가? 인사권을 가진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공산당 지역위원회 서기들을 임명했고, 이 서기들은 공산당 대회에 참석하여 거수기 노릇을 할 지역 대표들을 선출할 사람들을 임명했다. 그들을 뽑아준 사람들을 뽑아준 사람은 스탈린이었다.1927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스탈린은 어떤 인물일까. 피해망상을 가진 사이코패스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집권 후 레닌의 유언장에 언급된 인물들 중 제르진스키, 오르조니키제, 트로츠키 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처형했다. 제르진스키는 스탈린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인 1926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오르조니키제는 1937년 비밀경찰의 손에 죽기 전 한 것 같은데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트로츠키는 추방되었고, 1940년 멕시코시티에서 암살당했다. 스탈린은 자신의 경쟁자였던 모든 이들과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고, 그 자리는 철저히 스탈린에게 의존하고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로 채워졌다. 1927년 당시 소련의 상황을 보자. 이 해 소련은 기대수명, 인구, 산업생산, 생활 수준에서 1914년의 수준을 회복했다. 생존의 문제가 해결됐고, 자원만 축내던 귀족정도 사라졌다. 이에 인민들은 지지를 보냈다.그러나 여전히 위협이 존재했다. 소련 고위층은 자본주의 세력이 자신들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체제를 전복시키려 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이미 적백내전과 폴란드와의 전쟁을 겪었고, 이후 나치 독일이 침공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우려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소련 지도부는 생존을 위해 빠른 산업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스탈린은 이를 위해 5개년 계획을 시행한다. 그는 성장하는 산업 도시로 노동자들을 이주시키고 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민들을 집단 농장으로 집산화시켜 농산물을 아주 낮은 가격에 공급하도록 강제했다. 공산품 가격은 계속해서 상승한 반면, 농산물 가격은 계속해서 하락했다. 많은 농민이 도시로 떠나 노동자가 되었으며, 남은 농민들은 공산품을 구매할 수도 없었고, 농산물을 팔아 충분한 수익을 얻지도 못했다. 즉, 스탈린은 산업화 추진을 위해 농민들을 착취하는 방식을 채택했다.농민들은 불리한 거래 조건에 반발하며 집단 농장을 거부하고 자급자족 농업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농산물 유통량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도시는 식량 부족에 시달리면 대혼란에 빠졌다. 스탈린은 이 위기의 원흉을 쿨라크(kulak)라 불리는 부농이라고 보았다. 쿨라크들이 곡물을 비싸게 팔기 위해 감추고 내놓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탈쿨라크화 정책을 시행했다. 쿨라크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집단 농장에 추방했다. 그렇게 소련 정부는 전체 농민의 약 94%를 국가 소유의 집단 농장에 소속시켰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농민들이 처형되었고, 수용소로 끌려갔고, 굶어 죽었다. 아마도 1,500만명 정도가 죽었다. 농업 생산량은 3분의 1이 줄었고 가축 수도 절반으로 줄었다. 도시 산업생산 능력의 일부를 농민이 구매하고자 하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돌려, 농민들에게 더 나은 조건을 제공하며 더 많은 식량을 거래할 수도 있었다. 수많은 농민들을 희생시키는 대신 살려 두고, 그들의 곡물을 소비재와 교환하도록 만드는 방식이 더욱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소련 정부가 선택한 방식은, 앞서 언급한 비효율적인 사실상의 농노제였다.5개년 계획의 주요 목표는 중금속 제조업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뜻에 따라 대규모의 중공업 공장이 우랄 산맥의 마그니토고르스크에 조성되었다. 이 지역은 인구가 매우 적었다.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할 생각도 없는데, 스탈린은 어떻게 이 춥고 낙후된 지역으로 노동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을까?그는 강제적인 징발을 활용했다. 국내 여권 제도는 노동자들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했고, 일자리 여부에 따라 주거지와 배급 통장을 배정하는 방식은 이들이 일자리를 갖도록 강제했다. 징발을 거부하거나 고용주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수용소로 추방되었고, 처형되기도 하였다. 마그니토고르스크뿐만 아니라 소련의 많은 계획 공업 도시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소련의 성공적인 산업 도시 구축의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자유 박탈과 희생이 있었다.5개년 계획은 분명 효과를 보았다.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소련의 산업생산은 1933년에 181%, 1938년엔 558% 증가했다. 1928년부터 1958년까지 실질 국민생산은 평균적으로 매년 4.5%씩 성장했다. 이는 인상적인 수치이다.그러나 그 대가는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었다. 집단 농장에 반발한 농민들은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공장 노동자들도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스탈린에게 반대 의견을 내거나, 그러지 않더라도 그저 스탈린에게 거슬리게 느껴진 지식인들도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관료들과 공산주의자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1930년대 대숙청에서 죽거나 유배된 당원과 정부 공직자는 500만 명이 넘었다.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 끊임없이 채워졌고, 그들은 그곳에서 죽나갔다. 스탈린 시기 소비에트의 정치, 경제 시스템은 실로 수많은 인민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돌아갔다.마르크스가 이 꼴을 원했을까? 만약 마르크스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아마 음울함과 경멸의 표정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르크스는 예언자였다. 자신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행보를 바라보며 음울함과 경멸을 느끼는 것은 예언자들이 빈번히 맞는 숙명이다.-「20세기 경제사: 우리는 유토피아로 가고 있는가」(브래드퍼드 들롱)를 읽고 작성함.
작성자 : 땅콩쓰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