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전설함장에 네순 9티어까지 뽑는 등 네덜란드 트리 진행이 아주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몇년전부터 이 사람에 대한 글을 쓸까 말까 고민을 엄청했다. 뭔 명분이나 건덕지가 있어야 시너지가 나서 적을거 아냐. 이번에 그 명분이 제대로 이루어진게 그 기회라고 생각해서 이제껏 구상만 하던 사안을 현실화해보고자 한다.
조선의 이순신 제독과 매우 유사한 삶을 걸어온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해상 영웅, 미힐 더 라위터르를 소개한다.
先 3줄 요약
1. 네덜란드가 영국과 전쟁하던 시기
2. 미힐 더 라위터르가 캐리해서 네덜란드를 구한다.
3. 근데 인생을 쭉 훑어보면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비슷함.
미힐 더 라위터르 1607. 3.24. ~ 1976. 4.29.
1. 배경
먼저 이 복잡한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영국-네덜란드 왕실의 가계도를 살펴보아야한다. 우리가 주목해야할건 빌럼 3세인데, 영국왕가와 네덜란드 왕가가 빌럼 3세, 훗날 윌리엄 3세로 영국 왕과 네덜란드 총독의 동군 연합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두는게 좋아.
1630년대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무려 80년동안 독립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네덜란드는 국토 서부의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되찾고 프랑스와 분할하기 위해 분전했지만 육상에선 고전하게 된다.
반면 1602년 동인도 회사를 설립한 이후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던 네덜란드는 해상 주도권을 잃지 않았으며, 이때 네덜란드의 마르텐 트롬프 제독이 스페인의 함대를 상대로 영국 켄터베리에서 대승을 거두며 명실상부 제1의 해상 강국이 된다.
일찍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깨부순 영국이 이 광경을 보게되는데, 자기보다 훨씬 작던 네덜란드가 전 세계에서 자기들 동인도 회사보다 무역으로 잘 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뒤집혔겠냐?
그동안 네덜란드의 총독 빌럼 2세가 요절하고, 아직 어린아이였던 빌럼 3세를 대신해 네덜란드 주의회는 의장(수상)인 요한 더 비트가 통치하게 된다.
요한 더 비트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니 나중에 또 나온다.
빌럼1세 이후로 오라녀 가문이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닌, 의회가 통치하는 혼란기가 오게되자 당시 영국의 호국경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은 홀란트 주의회에 동맹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하고, 심기가 상한 영국은 이때다 싶어 1651년 영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물건은 영국 선박만 이용해야한다는 '항해조례'를 발표하며 해상무역을 독점하려하고 네덜란드가 반발하게 되며 1차 영란전쟁이 일어난다.
2. 유년기와 청년기
플리싱언에서 맥주 운반공의 아들로 태어나 마을 교회 종탑에 올라가길 좋아했던 사고뭉치 꼬마로 유명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사략 권리가 있는 무역선에 승선하여 선원생활을 하게 된다.
15세에 마우리츠 오라녀의 군대에 합세해 독립전쟁에 기여했는데, 이때 말을 타고 다녔기에 'De Ruiter(기수)'라는 별명이 붙었고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때부터 미힐은 '더 라위터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육지에서의 모험을 마치고 다시 바다로 돌아온 그는 포경(고래잡이), 네덜란드 해군 소장 신분으로 포르투갈 독립전쟁에 파견, 모로코와 카리브해를 떠돌며 무역을 하는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무역 중엔 기독교 노예를 해방시키기도 했다고.
1650년 43살의 나이에 바다와 작별할만큼 부를 축적한 그는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려 했는데.. 역사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3. 마르텐 트롬프 제독의 후임
1차 영란전쟁 시기 영국에 맞서 상선을 싸움배로 전환하여 해군의 확장을 꾀했던 네덜란드. 유능한 선원이 필요했고 이때 풍부한 해상 경험을 가졌던 더 라위터르를 영입하려했으나 편안한 여생을 보내려했던 라위타르가 거절한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가 해군 중장에 임명하는 등 간곡한 요청 끝에 수락하여 참전한다.
1652년 플리머스에서 승리하며 '질랜드의 바다사자'라는 별명을 얻는 등 27번의 해전에서 싸우며 대부분의 해전에서 확실히 승리했다.
그러나 1653년 스헤베닝언 해전에서 트롬프 제독이 전사한다. 네덜란드의 전략적 승리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전투에서 영국이 많은 전력 손실을 입고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트롬프 제독을 잃고 전의를 잃은 채 웨스트민스터에서 항해조례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강화조약을 맺는다.
그동안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며 다시 한번 해상무역 독점을 노리는 영국. 북미의 뉴 암스테르담(뉴욕)을 점령하며 도발하고 항해조례를 연장하는 등 갈등이 커지며 2차 영란 전쟁이 발발한다.
2차 영란전쟁 초기 로스토프트 해전에서 네덜란드는 전력의 1/3을 상실하는 어마어마한 패배에, 해군 총사령관 이었던 오프담 제독마저 잃는다.
전설적인 제독을 잃은지 얼마되지 않아 최악의 참패까지 겪은 네덜란드. 지휘부에 공백이 생겼으니 후임이 필요하겠지?
당시 네덜란드는 빌럼3세를 지지하던 왕당파와 요한 더 비트를 중심으로 하는 공화파로 나뉘었다. 왕당파는 마르텐 트롬프 제독의 아들 코르넬리우스 트럼프를 추천했으나 공화파, 특히 요한 더 비트는 미힐 더 라위터르를 상급중장의 계급을 수여하며 해군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대장은 왕족만 가능해서 중장을 지휘할 수 있는 최고의 계급으로 예우한 것.
4. 해군 재건, 그리고 혁신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17세기 전반에 걸쳐 번영을 누리던 해양강국의 지위가 흔들리게 된 네덜란드. 다행히도 요한 더 비트는 매우 유능한 수상이었다. 해군력 강화에 몰두하며 국채 금리를 5%에서 4%로 내리는 등 군비를 마련했고 신규 군함도 대거 건조한다. 덕분에 네덜란드는 해군력 복구를 넘어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함대를 만들어낸다.
최고 지휘관이 된 라위터르는 현명하게 혁신을 꾀했다. 함대를 현대화하고 색상 깃발을 활용하여 신속한 통신이 가능하게끔 훈련했다. 이런식으로 개별 선박이 하나의 단위로서 기능하게끔 만든 것이다.
또한 해병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당시는 해전과 육상전이 분리되었는데 라위터르는 육지와 바다 모두에서 싸울 수 있는 부대가 큰 전략적 이점을 가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5. 4일 전투와 메드웨이 기습: 전설의 시작
로스토프트의 참패를 딛고 라위터르는 4일 전투에서 영국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전쟁을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데..
당시 영국은 업노어 성의 요새와 템스강에 쇠사슬을 설치해 안전을 꾀했는데, 라위터르가 육성했던 해병대가 쳐들어가 사슬을 끊고 영국 배들에 불을 지르고 템스강을 봉쇄해버린다.
게다가 영국의 기함이었던 '로열 찰스'까지 나포하는데 당시 국왕이 찰스 2세였으니 그 이름을 딴 배를 상실하게된건 엄청난 치욕이었다. 영국은 흑사병과 런던 대화재까지 겹치게되며 버틸수가 없었고 브레다 조약을 체결하며 1667년, 2차 영란전쟁은 끝나게 된다.
6. 요한 더 비트의 죽음, 그리고 최후
영국은 굴욕적인 평화를 이루었기에 복수를 원했다. 1672년 영국은 프랑스, 쾰른, 뮌스터와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공격한다. 당시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네덜란드의 무역독점 타파를 빌미로한 침공의 목적도 컸고.
육지에서 프랑스의 육군에 속수무책으로 털리던 네덜란드. 전쟁이 길어질수록 요한 더 비트의 공화파는 힘을 잃으며 민심이 나락으로 가다 결국 총리직을 사임한다.
게다가 요한의 형인 코르넬리스 더 비트가 왕인 빌럼 3세를 암살하려했다는 빌미로 체포당해 재판에 넘겨지는데, 요한이 항소를 제기하려고 법정에 가자 맞이한건 분노한 민중들이었고..
(혐주의)
군중들은 더 비트 형제를 때려죽이고 시신을 훼손, 심지어는 장기 일부를 먹어버리는 엄청난 짓을 저지른다.
요한이 네덜란드의 군주제를 없애고자 노력했기에 왕당파가 손을 써버렸다는 주장이 강하다. 권력은 왕인 빌럼 3세에게 넘어간건 덤.
자신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후원자가 끔살당하는 엄청난 일을 겪은 슬픈 시기에 어찌됐건 빌럼3세는 라위터르에게 침략자를 막으라 명했다.
라위터르는 솔베이 해전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국의 추가 상륙을 저지하고
텍셀해전에서 60여척 vs 100여척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영국-프랑스 연합함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하며 영란전쟁이 어느정도 마무리짓게끔 한다. 이 승리로 민중들은 국왕인 빌럼 3세보다 라위터르를 더욱 지지하게 되고.
네덜란드는 외교적으로 3차 영란전쟁을 끝내려 하는데,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영국과도 어느정도 화해한다. 빌럼 3세는 더이상 권력이 이동하는걸 원치 않았기에 정적을 제거하기로 한다. 스페인 함대 지원 명목으로 지중해에서 프랑스 함대와 싸우라고 파견을 보낸 것.
스페인 함대의 지원도 없이 분전하던 라위터르는 포격에 다리를 잃고 시칠리아 남부의 시라쿠사로 이동하지만 공격을 받은지 일주일 후 감염으로 사망한다. 향년 69세.
그의 장례는 장엄한 국장으로 치뤄졌고 암스테르담에 잠들어있다.
열악한 상황에서 조국을 구했으나 정치적으로, 특히 왕의 질투로 온갖 고난과 전장에서 최후를 맞는 것까지, 우리의 충무공 이순신과 굉장히 비슷한 운명의 위대한 제독을 기리며 네순을 타보는건 어떨까?
정말 긴 내용인데 읽어줘서 고맙다.
여담
1. 드 제번 프로빈시엔(일곱개의 주)은 라위터르의 기함이다. 지금은 두 이름 모두 네덜란드 해군의 함명으로 사용된다.
2. 라위터르를 사지로 내몬 빌럼 3세는 어떻게 됐냐고? 맨 처음에 언급했듯 1688년 명예혁명으로 영국과 네덜란드 왕위를 모두 먹음으로써 동군연합을 이뤄 길고 길었던 영-란 갈등을 끝내는데 일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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