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전하 이야기'라 쓰고 '이제와서 라캉 철학 다시 보기'라 읽어야 할 듯
파카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이 케케묵은거 다시 안 끄집어오면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공부했고
에전에 쓴거 활용해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려고 노력했고 중간중간 짧은 요약 부분도 넣었지만
그럼에도 워낙 복잡하고 난해한 내용이라 어렵고 이해 안 간다고 해도 전부 글쓴놈 잘못임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 바람
상상과 상징,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의 실제
라캉은 인간 정신을 세 종류의 계(界)로 나누었다
상상계, 상징계, 실제계가 그것이다
‘상상계’는 개인이다
그리고 개인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이자 세계를 인식하는 기반이 되는 곳이다
상상계라는 근원에서 개인은 세계를 각각의 ‘이미지’로서 인식하게 된다
‘상징계’는 세상이다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이자 현실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준엄한 ‘현실’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실’인 상징계는 ‘개인’인 상상계에 일방적인 우위관계를 점하고 있다
상상계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이미지’에 상징계는 ‘의미’를 부여한다
‘네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러하니까 너도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해’
상상계는 ‘현실적 문제’ 때문에 상징계의 압력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고분고분한 것은 아니다
상상계는 이러한 종속관계에 불만이 많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싶은데 현실은 안 그래’
이렇게 발생한 불만족은 감정적 결여, 불안감으로 발현된다
그런 결여와 불안은 ‘불쾌한 것’으로서 완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은 ‘세상’과의 사이에서 안정적인 합일의 지점을 추구하게 된다
‘내가 생각한 대로 행하지 못한 것을 실천하고 싶다’
이것이 ‘욕망’이다
욕망을 통해 개인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며
그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개인과 세상 사이의 괴리감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세상이란 가치관들이 난립하며 시시각각의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 변덕과 변화 속에서 욕망의 완전한 충족이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좌절감을 겪게 된다
그 좌절 속에서 ‘세상’의 ‘개인’에 대한 절대성은 금이 나 갈라진다
‘하란대로 해봤자 제대로 돌아가는 건 뭐 하나도 없고 보람도 없어’
이렇게 상징계의 상상계에 대한 이미지의 의미화가 실패하는 곳이자
개인이 세상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의심하게 되는 곳,
그 지점이 ‘실제계’이다
실제계의 위치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열심히 라캉 철학을 두고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실제계를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의 어딘가’라고 해석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세상 속에서 욕망을 가지며 상호작용하게 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 다른 사람(어머니, 아버지, 기타 등등)을 ‘타자’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상상계(개인)에서 상징계(세상)으로 가도록 하는, 또는 가도록 만드는 모종의 위치를 대(大)타자라 한다
대타자는 실존하는 존재라기보단 세상의 규칙, 규범과 같이 사회 속에서 개인이 살아가는 방법을 ‘제한’하는 개념이다
인간이란 홀로 나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타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러한 관계들이 모이고 모여서 형성된 사회, 세상이란 대타자의 영향을 통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신과 세상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며 결여된 부분을 욕망으로 투영시키며 충족시키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진 않는다
상상계가 욕망을 투영하지만 상징계의 의미화론 충족이 안 되는 지점
그 곳이 실제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과 좌절, 의심이 뒤섞인 곳인 이 실제계는 곧 ‘삶’이라 할 수 있다
거울단계
위의 세 가지 계(界) 이야기를 성장하는 아이의 과정에 비유한 것이 ‘거울단계’이다
상상계는 상징계가 제공하는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하고 맞추고자 한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유동적인 것이기에 투영하고 맞추고자 하는 욕망은 충족이 불가능하다
의미화를 통해 인식한 이미지는 불완전하며 결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좌절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에 대한 인식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중간 유도단계가 ‘환상’이다
완전하고 전체적인 이상으로서의 ‘환상’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의미화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미지의 형태를 축적시킨다
이로서 ‘환상’은 인간이 파편화된 인식을 넘어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게 한다
그 느낌으로서 형성되고 내재화된 상상계의 기반을 ‘자아’라 한다
이 ‘자아’를 통해 상상계는 상징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꼬부랑 소리에서 ‘용어’를 바꿔 써서 다시금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상상계는 아이, 상징계는 거울, 이미지는 거울 속 모습, 환상은 어른이다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아직 완전히 잘 통제한다고 보긴 어렵지만,
일단은 ‘신경적 느낌’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몸을 가누고 감각을 느낀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신체에 대해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신체 인식’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신경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개별 신체부위의 인식’에 대한 모음, 즉 ‘파편화된 신체’일 뿐이다
여기 거울이 있다
아이는 거울 앞에 서서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에는 한 모습이 비친다
그 앞에서 아이가 손을 들어본다
거울 속의 모습이 손을 든다
아이가 발을 들어본다
거울 속의 모습이 발을 든다
아이는 깨달았다
거울 속의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이제 아이는 ‘파편화된 자신’이 아닌
‘완전한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에 아이는 도취된다
‘완전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이제 그 ‘완전한 자신’과 신경으로 움직이는 ‘자신’을 일치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무언가 괴리감이 있다
나는 내 몸을 가누는 게 완전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저 거울 안의 나는 그런 것 없이 완벽하게 몸을 가누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 완벽한 거울 속의 몸놀림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어 몸을 움직이면
거울 속의 자신은 ‘가만히 그 모습대로 있어주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마치 따라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에 자신을 맞추기란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아이는 좌절하게 된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어른이 있다
어른은 아이에게 다가가 거울과 거울 속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완전히 납득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른의 설명은 도움이 된다
아이는 자신과 거울 속 모습 간의 괴리감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어른은 아이 앞에서 이런저런 자세를 취해주며 아이가 따라할 수 있게 한다
아이는 어른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자신의 몸과 움직임을 이해한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이러한 과정이 누적되며 아이는 자아를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이런 비유적 이야기가 우리가 알고 있는 ‘거울단계’이다
그러나 거울단계 속 ‘어른의 목소리’조차 완전한 것이라곤 볼 수 없다
어머니든 아버지든 선생님이든 서로 다른 사람마다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게는 개인 대 개인인 타자와의 관계, 크게는 개인 대 사회인 대타자와의 관계 모두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아이라는 개인은 성장과정에서 서로 다른 관계들의 행동 차이 속에
세상이 제공하는 이미지의 확고함이 붕괴되고 혼란을 겪게 된다
요약
상상계 - 개인
상징계 – 세상
실제계 – 삶
대(大)타자 – 사회성(행동의 제약), 더 나아가면 절대존재, 절대법칙
개인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사회성을 주입받으며 세상의 구성원이 됨
하지만 세상의 모습과 개인 자신의 ‘이상향’ 간 괴리로 인해 불안과 결핍이 발생
불안과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욕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길 바람
그러나 시시각각 변하는 가치관과 상황으로 인해 ‘욕망’의 완전한 성취는 불가능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가진 개인 – 그것이 ‘삶’
‘거울단계’는 위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거울을 보는 아이에 빗대어 표현한 것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상징계(세상)가 주는 올바른 상상계(개인)에 대한 개념이 불확실한 것이 되면 인간은 혼란을 겪는다
그런 혼란 속에 인간은 결여된 무언가를 채우길 욕망하게 되고,
그 욕망의 궁극적 지향점은 무언가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된다
더 정확히는, 결여된 자신을 만족시켜 줄 타자의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야기에 빗대어 예를 들면,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의 대상’이 되길 원하나 어머니의 ‘사랑의 대상’은 아버지이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버지는 이러한 노력을 금지시킨다
여기서 나타나는 ‘사랑’에 대한 것을 프로이트든 라캉이든 팔루스(남근)라 지칭했는데
좀 더 풀어쓰면, 사랑은 어떠한 대상을 향한 욕망이다
사람은 대상을 향한 욕망이 자신을 향하길 원하기에 ‘팔루스’의 위치를 차지하려 한다
인간이 무언가을 원하며 하는 행동 전부는 다른 무언가, 누군가의 ‘사랑의 대상’이 되기 위한 것이며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되길 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욕망하는 것은 타자 그 자체라기 보단, ‘타자의 욕망’이다
그리고 이것이 극단적으로 추구되면,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길 원하는 것을 넘어
‘욕망의 대상 그 자체’, 즉 타자 그 자체를 욕망하게 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라캉은 ‘오브제 (쁘띠) 아{objet (petit) a}’란 개념을 소개한다
오브제 아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타자에 대한 욕망을 유발하는 지점이다
위에서 여러번 언급한 ‘타자의 욕망’이란 대상이 이에 해당한다
오브제 쁘띠 아는 욕망의 근원, 그와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다
거울단계에서 나온 ‘환상’이 이에 해당한다
좀 더 풀어 설명하면, 타자에 대한 욕망과 그것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 장치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치 있는 보물이 있고, 그 보물이 든 상자가 있다고 가정하면
보물을 오브제 쁘띠 아라고 할 수 있고 상자는 오브제 아가 될 것이다
가치 있는 보물을 품은 상자는 모두가 그것을 가지길 소망하지만 상자 그 자체가 보물은 아니다
그리고 상자가 있다고 그 안에 무조건 보물이 있으리란 법도 없다
상자가 비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안에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보물을 위해 상자를 가지고자 한다
오브제 아, 상자가 상징하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어떤 대상, 즉 ‘욕망의 대상’이다
실제로 보물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위해 상자를 찾아 헤매는 과정이 욕망이 생겨나고 또 추구하는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욕망을 유발하는 지점’을 욕망할 뿐 ‘욕망의 근원’에 닿아 완전한 욕구충족을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하는 것이며,
라캉이 말한 ‘성관계는 없다’도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인간관계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달성할 수 없는 진정한 욕망을 달성하고자 끝끝내 시도한다면 그것은 타자에 대한 욕망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욕망의 근원’을 직접 노리고 타자 그 자체를 절단내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보물을 직접 자신의 손에 들고자 상자를 박살내는 것과 같다
상자를 부순다는 것은 상자 속에 보물이 있을 것이라는, ‘욕망의 대상’을 추구하는 과정을 버리고
‘욕망의 근원’으로 직진해 들어가 그게 뭐든지 간에 그것을 직접적으로 소유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의 끊임없는 추구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끝냈다는 궁극적인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상자 안의 보물이 뭔지 찾는데 지쳤고, 뭐든 하나 걸리면 때려 부숴서 끝장을 볼 것이며
그 안에 뭐가 있든, 들었든 말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끝내면 그만인 것이다
당연히 이 파괴의 과정은 반드시 한계돌파의 단계를 거치게 되고, 파괴적 충동의 끝에는 고통과 대가가 따를 수 있다
위에서 설명했듯 개인과 세상의 완전한 합일은 불가능 하고, 완벽한 사랑 또한 그것과 같다
완벽한 사랑이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한다면 그것은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서로를 합일시킬 때 함께’ 하는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마치 욕망의 근원을 직접 추구하는 것이 보물을 찾겠다고 상자를 부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말이다
곧 설명할 ‘죽음에 대한 충동’도 이러한 맥락의 것이다
요약
인간의 욕망 – 타자가 원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길 바라는 것
극단적 욕망의 추구 – 자신이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아닌 ‘타자 자체’가 되길 바람
오브제 쁘띠 아 – 보물, 욕망의 근원
오브제 아 – (보물이 들었을 지도 모르는)상자, 욕망의 대상
인간의 욕망 추구는 보물찾기와 같음
- 대부분은 어느 상자 안에 보물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상자를 찾는 과정을 반복
(상자를 ‘찾으려는’ 충동)
- 극단적 일부는 그렇게 찾는 ‘과정’보다 ‘보물’ 자체를 손에 쥐는 순간의 쾌락을 추구하며 상자를 부숨
(상자를 ‘부수려는’ 충동)
-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할 뿐이며, 서로를 완벽히 충족시키는 인간관계란 있을 수 없다
죽음과 삶의 충동
거울단계를 통해 인간은 자아를 형성하고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개인과 세상 간에는 우열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의 영향 아래 종속된 위치의 인간은 그 관계 속에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
이 불만족에 따른 심리적 결여를 ‘욕망’이라는 세상과의 안정적 합일을 통해 채우고자 하지만,
욕망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에 충족이 불가능하므로 좌절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인의 주체대로 세상을 인식 가능한 존재’가 되지 못하며,
세계와 완전한 합일을 이루지도 못한다
더 정확히는, 개인은 주체로서 세상을 인식할 수 없으며,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없다
개인과 세계 간의 완전한 합일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의 완전한 충족을 의미한다
그리고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욕망의 소멸로 이어진다
욕망의 소멸은 실제계의 소멸로 이어진다
실제계는 함은 세상의 개인에 대한 의미화가 실패하고 개인은 세상을 의심하는 지점이다
그런 실제계가 소멸된다는 것은
세상과 개인 간의 관계에 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어지고,
그 불만에 따르는 공허감을 느낄 필요도 없는,
아무것도 의심하거나 생각할 필요도 없는 상태로 되는 것,
즉, ‘삶’의 소멸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삶의 소멸은 곧 죽음이다
선뜻 죽음을 선택하기란 가능하지도 않고,
선택 가능하다 하더라도 최대한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미화’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불만족하고 결여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욕망 속에서 완전함을 추구할 뿐,
내심 욕망의 완전한 소멸까지는 바라지 않는 상태가 인간의 심리적 방어기제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 속에서 어떠한 일이 발생하면,
개인의 주체대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으로 ‘완전함’을 추구하는 대신
개인의 주체성을 ‘적당히’ 포기하고 현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에 맞춰서 ‘적당히’ 살아가고자 하게 된다
그러므로 개인은 주체성을 가지고 세상을 인식하는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주체적 개인으로서 세계와 완전한 합일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타자 또는 현실이란 있을 수 없다
개인은 불만스러운 현실에 종속되어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 상황에서 개인은 스스로가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하게 된다
거울단계 속에서 환상- 상자 속의 보물 찾기-을 통해 형성된 각각의 개인이라는 ‘존재’가
실제론 그저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종속되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자신의 환상과 자아가 무력한 것임을 깨닫는 이 ‘환상 가로지르기-상자 속엔 보물이 없더라-’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방향의 충동을 느끼게 된다
역사의 흐름 속에 종속된 개인은 진정한 ‘선택’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기를 선택한다고 ‘믿게’ 된다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이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애처로운 발버둥으로서의 ‘믿음’을 ‘증상’이라고 한다
증상은 곧 ‘삶을 향한 충동’이자, 죽음을 ‘지연’시키고자 하는 의지이다
프로이트식 비유로는 어머니의 안락한 품에서 나와 발걸음을 떼는 ‘성장의 시절’
그 자체로 세상의 무언가가 바뀌진 않을지라도 스스로 무언가 해보고자
어머니의 젖을 떼고 스스로 똥오줌을 가리며 스스로 밥숟갈을 들고 스스로 발걸음을 떼는 것
상자와 보물의 비유로는 상자 안에 보물이 있을 것이라 ‘믿는 것’
설령 상자가 비어있을지도 모르고, 그 보물이란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른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소중한 것에 대한 가치를 찾고자 노력하고 헤매는 과정이 곧 삶의 원동력이란 것
이러한 ‘증상’과는 반대로, ‘존재로서 역사의 흐름 속에 종속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아무것도 아님’으로서 ‘존재’를 벗어던지고, 욕망과 쾌락을 ‘추구함’을 넘어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욕망의 충족은 삶의 소멸, 즉 죽음이다
이 죽음을 향한 자기파괴를 ‘주이상스’라 한다
주이상스는 곧 ‘죽음을 향한 충동’이자 세상과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이다
프로이트식 비유로는 어머니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 쾌락을 즐기던 ‘유아기 시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젖가슴을 누리며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먹고
마음껏 싸고 마음껏 자면서 모든 욕망과 쾌락이 충족되던 그 때로의 회귀
상자와 보물의 비유로는 상자를 부수고 보물을 직접 ‘쥐려고’ 하는 것
무언가를 욕망하고 찾는다는 과정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추구를 그만두고 파괴적 행위로 그 근원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직접 소유하려는 충동
이 두 상반되는 삶과 죽음의 충동 사이에서 인간은 끊임없는 고통과 부조리를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주이상스가 증상을 압도하게 된다면,
현실과 개인의 충돌에 따르는 고통을 회피하는데 몰두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말초적 쾌락을 추구하는 죽음을 향한 자기파괴적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정신질환’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반면에 증상이 주이상스를 압도하게 된다면,
그것은 ‘환상 가로지르기’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인식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아무것도 아님’으로서의 공허함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역사의 흐름 속에 종속된,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어온 ‘복사본’에 불과할지라도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이라는 ‘믿음’이 애처로운 발버둥일지라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힘닿는 만큼이라도 ‘창조적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간은 ‘증상’을 즐기며 삶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요약
욕망의 완전한 충족 = 욕망의 소멸 = 삶의 소멸
‘세상을 살아가는 개인’은 주체적 존재로서 완전함 추구한다는 것이 불가능함
현실과 타협 – 역사 흐름 속 개인의 무력함 인지 – 욕망 추구란 신기루와도 같음
이러한 불만족스런 상황 속에서의 두 가지 선택지 – 주이상스 / 증상
주이상스 – 욕망의 충족을 통한 쾌락 추구, 죽음 충동, 상자를 ‘부수려는’ 충동, 덧없음
증상 – 그럼에도 욕망을 탐색하는 과정 추구, 생존 충동, 상자를 ‘찾으려는’ 충동, 발버둥
주이상스 > 증상 – 현실도피, 고통의 과정 회피, 말초적 쾌락 추구, 자기파괴적 정신질환
증상 > 주이상스 – 현실 견디기, 고통의 과정 맞서기, 삶에 대한 선택 추구, 창조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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