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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방소멸 실태의 심각성 1부. 수도권 과밀화 문제
[시리즈] 한국이 직면한 문제 현황 · 한국 은둔 청년 실태의 심각성. 지방소멸이란 단어는 2014년 일본 일본창성회의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일본 지방 인구의 지속적인 감소가 지방의 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을 내포해 일본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그런 일본보다 지방소멸이 더 급격히 진행되는 국가가 있다면 믿겠는가? 이미 예상했겠지만 바로 한국이다.지방소멸을 논하려면 우선 서울 과밀화, 나아가 수도권 과밀화를 먼저 논해야 한다. 이 두 문제는 분리할 수 없는 공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https://m.seoul.co.kr/news/plan/population-crisis/2024/01/22/20240122003001 [단독] 청년 빨아들인 수도권도 경고음… 생존 갈림길 지역은 인구 쟁탈전[대한민국 인구시계 ‘소멸 5분전’]<1부> 소멸이냐 상생이냐 대한민국은 어떻게 사라지고 있나 대한민국 소멸 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각종 지표가 보여 주고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2024년 지방소멸 시계는 밤 11시 55분쯤을 가리킨다.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 갈림길에 서 있는 지역마다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가 한창이다. 과연 이들의 노력이 5분도 채 남지 않은 소멸 시계를 멈출 수 있을까.서울신문이 21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 주민등록인구 현황을 바탕으로 지방소m.seoul.co.kr<2024년 대한민국 지방소멸 지도>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한국은 1970년대부터 이미 국토의 불균형과 서울의 과밀화를 우려해 여러 정책을 펼쳤다.박정희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 구상,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지정,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한 신도시들, 공기업 이전을 주축으로 한 혁신도시들,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하지만 위와 같은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계속 과밀화됐고, 서울 인근 신도시들과 연계해 이제는 수도권 과밀화라는 단어가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서울•인천•경기도는 국토의 겨우 11.8%를 차지하지만, 인구의 50.8%를 차지하는 거물이자 괴물이 됐다.1. 탄생은 없고 죽음만 가득한 땅 수도권.http://www.ccg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3922 작년 합계출산율 역대 최저…16개 시도 중 대전 유일 상승지난해 0.78명의 역대 최저 합계출산율을 기록한 가운데, 대전시는 전국에서 출산율이 유일하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22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출생·사망통계 잠정 결과’에 따르면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나타내는 합계출산율은 1년 사이 0.03명이 줄어든 0.78명을 기록했다.이는 OECD 회원국 평균 합계 출산율인 1.59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합계출산율은 2018년 처음으로 1명(0.98명) 아래로 떨어진 뒤 4년만에 0.2명이 더 줄어들었다.지역별로는 대전(0.84명)만www.ccgnews.kr2022년 기준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0.59명으로 한국 시도별 합계출산율 중 꼴찌를 기록했다. 인천도 0.75명으로 평균 이하, 경기는 0.84명으로 평균보다 고작 0.06명 높았다.전국의 청년들을 흡수하는 수도권이 출산율은 꼴찌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지역의 과밀화는 더욱 치열한 경쟁과 집값 등 의식주 비용의 상승을 초래하는데, 이런 문제들로 청년들은 출산은커녕 결혼과 연애조차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지방에서 아무리 출산부터 대학 입학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아도 그 청년이 상경해 하루하루 하는 것조차 급급하다면, 정부나 일개 시민이나 머리가 아플 것이다.당신이 세후 236만원 받는데 상경해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월세로만 70만원을 지출한다고 생각해 봐라. 삶의 여유가 있겠는가? 참고로 세후 236만원은 20대 후반 중위소득이며, 70만원은 서울 ‘원룸’ 평균 월세다.필자는 수도권 태생인데 대학 동기나 선후배가 지방에서 상경하면 없는 돈 쥐어짜 술 한잔 사고 그런다. 이들이 서울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출하는 비용에 눈물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왜 청년들은 굳이 상경을 하는 것일까?2. 지방에 산다는 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http://www.kbiz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760 대기업집단 계열사 75% 수도권 집중… 지역경제 쇠락 부추긴다지난달 고용노동부는 ‘2020~2030 중장기 인력수급 전망’을 통해 생산가능인구의 큰 감소를 경고했다. 2030년에는 15~64세 생산가능인구가 320만명 넘게 감소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전체 고용시장의 83%(1744만명)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인력수급 문제가 8년 안에 최악의 상황에 빠질 공산이 커졌다. 이처럼 생산 가능한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는 상황에서 전 국토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절반 넘는 인구가 몰려 있다는 현실도 중소기업 경영자들에겐 기업생존을 위협하는 악재다. 수도권 인구 비중은 1960년 20.8%에서 2www.kbiznews.co.kr한국 전체 대기업집단 계열사 75%, 중소기업의 51.3%가 수도권에 몰려있다. 번듯한 직종으로 선망받는 블루칼라를 제외하면 더욱 심할 것이다.혁신도시 등으로 공기업 등 일부 기업이 지방으로 이전했으나, 사기업의 지방 이전은 전무한 실정이다. 오히려 지방 이전 시 인재 유출을 우려해 판교라인과 기흥라인으로 불리는 남방한계선까지 구축하는 지경이다.경기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수원에 삼성 있고, 마곡에 LG 있고, 용인에 SK 하이닉스 있다고 반론할 수 있다. 수원 삼성 사업장에서 강남역까지 길 안 막히면 차 타고 35분 걸린다. 미안하지만 이건 지방 이전으로 볼 수 없는 경우다.3. 인프라의 낭비.https://www.donga.com/news/Economy/article/all/20231128/122378591/1 ‘30분 출퇴근’ 개막…GTX A 수서~동탄·별내선 등 줄줄이 개통광역급행철도 A노선, 신안산선, 별내선 등 경기도를 통과하는 광역철도가 내년부터 잇따라 개통에 들어간다. 이에 따라 수도권 30분 출퇴근 철도시대가 본격 개막된다. 28일 경기…www.donga.com한국은 2020년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를 앞지르는 데드크로스를 겪고 2025년 노인이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사회를 맞이할 예정인데 수도권에는 매년 도로와 철도의 증축 계획 발표와 이를 촉구하는 집회가 벌어진다.비단 교통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도권 신도시에서는 학교 증설을 요구하는 목소리, 광역버스 추가 배차를 요구하는 목소리, 문화시설 설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 사이 지방에서는 목소리를 낼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수도권 과밀화는 인구 감소가 예정된 한국의 점진적인 SOC(사회간접자본) 축소를 방해하고 지방과의 불균형을 초래해 지방 소멸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지방에 사람이 없으니 SOC 투자를 안 하고, 투자가 없으니 사람이 상경하는 악순환이 형성된 것이다. 수도권 광역철도에 3조원 쓸 때 지방에는 2,000억원만 썼다는 게 그 증거이다.수도권에서는 유입되는 청년들을 위해 전철역 신설을 하고 있는데, 지방에서는 시골 노인들을 위해 (준)공영제로 운영할수록 적자인 버스를 억지로 운영하고 있다. 실로 인프라의 낭비라 볼 수 밖에 없다.1부에서는 위와 같이 수도권 과밀화가 지방소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봤다. 2부에서는 직접적으로 지방소멸이 왜 문제인지 알아보겠다. 사실 한 번에 하려고 했는데 엄두가 안 나서..
작성자 : 새보만평고정닉
2머전) 뉴질랜드군이 쏘아올린 존나게 큰 공
(* 어제 썼는데 내용에 일부 오류가 있어서 수정하고 재업함) 밀덕들에게 독일 팔쉬름예거(공수부대)의 용맹을 널리 알린 사건이자 동시에 막대한 인명손실과 이후 여건 등으로 독일의 공수작전을 보기 뜸해지면서 팔쉬름예거의 커리어하이인 동시에 본격적인 활약의 끝이라는 아이러니한 의미를 가진 '크레타 섬 전투' 크레타 섬 전투는 독일 공수부대에게 있어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피로스의 승리임과 동시에, 그럼에도 온갖 억까스러운 여건속에 극적인 역전승을 한 그들 용맹을 증명하는 장이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크레타 섬 전투는 영국군과 그리스군이 지키는 크레타 섬을 독일이 공수부대와 항공수송부대, 소수 고속정 상륙부대 등으로 점령하려 했다가 초기 투입되어 교두보를 확보해야 할, 미군 교리로 치면 파라트루퍼 정도의 역할을 해야했던 팔쉬름예거가 당시 공수기술의 한계, 유출된 정보, 영국군의 반격, 그리스 민병대의 투쟁 등으로 거의 전멸하다시피, 아니 그냥 사전적 의미로는 전멸급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어떻게 말레메 비행장(Maleme airfield)을 점령하는데 성공하면서 그 비행장으로 항공수송부대가 밀물처럼 들어오고, 중화기와 정예부대가 보충되며 간신히 승리한 그런 전투였다. (평소 관심없는 분야였다면 꺼무위키라도 켜보자) (오늘날 말레메 비행장 사적지에 있는 추모비) 그런데 관심이 있다면 알겠지만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패를 가른 건, 즉 그 말도 안되는 온갖 억까속에서 결국 피로스의 승리라도 어쨌든 독일의 발칸반도 완전 정복을 이룩해준 건, 바로 결정적인 사건 하나, 눈치챘겠지만 말레메 비행장 점령과 그 탈환 시도 실패 때문이었다. 초기 낙하산으로 투하된 독일 팔쉬름예거는 역으로 크레타 민병대에게 포로로 잡혀 처형되는 등 그야말로 갈려나가다가 말레메 비행장 근처에서 오이겐 마인들 장군의 '서부 그룹(Comet)'이 그나마 가장 성공적인 강하를 했고, 말레메 비행장을 방어하던 뉴질랜드 22대대의 대대장 레슬리 앤드류(Leslie Andrew)가 갑자기 철수명령을 내렸고, 이에 팔쉬름예거 서부 그룹이 소수의 병력으로 말레메 비행장을 점거하는데 성공하면서, 그리고 이것을 뒤늦게 탈환하려는 뉴질랜드군의 시도가 좌절되면서 이게 존나게 큰 눈덩이가 되어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말레메 비행장을 간신히 점거한 독일군은 시발 기회는 이때다를 외치며 모든 상륙정, 수송기를 총 동원해 말레메가 있는 크레타 서부로 향했고, 이중 상륙정은 격침되었으나 수송기 강하를 막지 못해 이전 제대로 무장하지도 못한 팔쉬름예거들이 아닌, 짱짱하게 MG42와 무반동.포등으로 무장한 독일군이 나타나면서 전황이 뒤집혔기 때문. 이 영국-그리스 입장에선 피눈물이 나는 결정적 실수, 즉 말레메 비행장 방어 실패는 나무위키에선 그냥 지휘 문제로 22대대가 철수했다 정도만 기술되어있지만 실제론 더 복잡한 요인이 작용하면서 나타난 참사였다. 전황을 바꾼 말레메 비행장 전투의 결정적 국면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1. 팔쉬름예거 Comet 그룹의 강하를 성공적으로 막지 못한 영국-그리스 해안방어 부대의 실패 (1941년 5월 20일) 2. 앤드류 대대장의 오판과 22 대대의 철수, 그로 인한 비행장 방어 실패 (1941년 5월 21일) 3. 마오리 전사들의 착검돌격 실패, 그로 인한 비행장 완전 상실 (1941년 5월 22일) 이렇게 3일에 걸친 참사와 그로인한 눈덩이는 재미있게도 셋 모두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고는 하지만 그중 가장 크게 현장 지휘관 및 군 상부의 의사소통 실패 / 의사결정권자들의 잘못된 결정 / 언어 등 양군 지휘체계의 혼란 이렇게 세 가지 '소통과 결정' 부분에서의 문제로 벌어졌다고 보는 분석이 많다. 즉 의사소통이라는 언뜻 보기에는 총과 대포보다 중요하지 않아보이기도 하는 전쟁의 요소가 이 모든 참사를 불러일으킨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후술할 Comet 그룹을 이끈 오이겐 마인들. 나중에 공군 소장으로 승진) 1. 1941년 5월 20일 - 크레타 서부 하니아(Chania) 해안가에 강하한 오이겐 마인들의 팔쉬름예거 Comet 그룹을 현장에서 진압하지 못함 5월 20일 전까지 팔쉬름예거는 개같이 뚜드려맞고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영국군, 그리스군, 크레타 주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에게 잡혀 개같이 쳐맞고, 포로취급도 못 받고, 일부는 가혹행위를 당하다 민병대가 드럼통에 넣고 불을 붙여 화형(!!)까지 당해버렸다. 당시 낙하산 기술의 한계로 팔쉬름예거는 낙하산 강하를 할 때 양손을 모두 써서 낙하산을 제어해야 했는데, 이러면 무기를 들 손이 없고 낙하산 조종하다 뭐라도 거치적거리면 안되니 조금이라도 긴 무기는 휴대하고 낙하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건 독일군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미군, 영국군도 개머리판이 접히는 m1 카빈/스텐 기관단총 등을 개발해 낙하산을 양손으로 조종하면서도 짧게 휴대할 수 있는 카빈을 매고 낙하하게 끔 개인화기 개발을 하기도 했는데, 독일군은 개머리판이 접히는 Kar98k 소총마저 보급되다 만 상태였다. 그 당시 팔쉬름예거에게 낙하산을 양손으로 조작하며 맬수있는 무기, 즉 낙하산 조작시 팔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짧게 휴대시킬 수 있는 무기는 개머리판을 신축할 수 있는 MP 38과 MP 40 기관단총, 그리고 권총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중 기관단총은 주로 분대장 정도에게나 보급되었고 권총도 전원에게 보급되지 않아 낙하산 줄을 자를 대검 하나만 가지고 낙하한 대원들도 많았다. 그럼 뭐 들고 싸우냐고? Kar98k 소총과 MG34/42 기관총 등 제대로 된 개인화기를 따로 보급상자로 투하해놓고 나중에 수거해서 싸우려고 했다. 그런데 야간이 아닌 주간 공수/예상을 넘는 영국의 철통방어 및 대공사격/대공사격으로 수송기와 글라이더 파일럿들이 안정적으로 무기상자를 투하하지 못함 등으로 팔쉬름예거는 몸뚱이는 내렸는데 가지고 있는 무기는 분대장 기관단총, 그나마 운좋은 몇몇은 권총, 그것도 없어서 낙하산 줄 자를 대검 이게 끝인 상태에서 무기상자가 애먼데 떨어져 회수하지 못하거나, 아예 크레타 민병대가 먼저 무기를 접수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져 전술했듯이 그야말로 아무것도 못하고 개같이 뚜드려 쳐맞고 포로로 잡히고 화형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성공적으로 강하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훗날 공군 소장으로 승진하는 오이겐 마인들이 이끄는 서부 강하 그룹, 당시 독일군 코드명 'Comet' 부대였다. (실제 크레타에 있는 당시 그리스군 해안포) Comet 부대는 크레타 서부 해안에 강하하려고 했는데, 원래 계획은 수송선을 탄 다른 부대가 지중해를 가로질러 그들과 합류해 합동으로 크레타 서부를 평정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누구나 제해권도 없는데 수송선으로 기습상륙한다는 그럴싸한 계획은 할 수 있다. 해군 군함에게 다 격침되어서 뒤지기 전까진. 영국 해군 군함에게 합류하기로 했던 독일군 수송선 부대가 전부 격침되어버린다. 하지만 오이겐의 Comet 그룹 강하는 취소되지 않았고 오이겐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단독으로 크레타 서부에서 영국군-그리스군과 싸울 준비를 한다. 원래대로라면 Comet 그룹의 강하를 저지해야했던 것은 말레메 비행장을 방어하던 21/22/23 뉴질랜드 대대, 그리고 인근 동부와 남부 해안가를 방어하던 그리스군 소속 해안방어 부대였다. Comet 그룹은 50대의 글라이더를 동원, 해안가에 강하했으나 역시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고 일부는 해변에 '착륙'이 아니라 물속으로 '착수'해 파도를 헤엄쳐서 뭐지 시발 내가 공수부대가 아니라 해병대에 들어왔었나? 하며 간신히 뭍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을 저지해야 했던 그리스군과 영국군은 고질적인 언어 문제와 지휘체계 혼란 문제가 있었다. 일부 영국 장성들은 그냥 크레타 포기합시다 하는 와중 처칠이 불침항모 빼액 해서 크레타를 사수하려 한 거라, 영국군은 크레타 섬에 주둔할 때 충분한 통역사나 현지 심리전 인력들을 개발하지 못했고, 영국군과 그리스군은 영어와 그리스어가 안맞는 당연한 문제부터, 영국군 지휘관들과 그리스군 지휘관들의 알력다툼등 부차적인 문제까지 겪고 있던 참이었다. 본래대로라면 그리스 지휘부는 경험이 많은 영국군을 중심으로 통합 지휘체계를 넘겨준 상황이었지만, 그리스군 지휘관들이 계급장 부심을 내밀며 텃세를 부리면서 영국군과 그리스군은 생각했던 것 만큼 심리적 결함이 잘 되지 않았고, 결국 그리스군 해안방어 부대는 영국군에게 제대로 통보도 안/못하고 독단으로 Comet 그룹과 교전을 시작한다. 사실 Comet 그룹에 대해 영국군에게 정보 전달을 안한건지 통신시설이 열악해서 못한건지는 확실치 않는데 일단 적극적으로 영국군에게 알리려 한 시도는 안했다. 그러나 그리스군 해안방어 부대는 잘 싸워주지 못했는데 글라이더로 강하한 오이겐의 부대는 낙하산으로 강하한 동지들에 비하면 그나마 소총 정도는 들고 있었고, 그리스군의 수많은 해안포는 부각이 지상을 향하지 못하고 바다만 사격할 수 있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그리스군이 이 부각 고정을 해제할 방법을 몰라 지상으로 올라온 팔쉬름예거들에게 포격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배, 그리스 해안포는 그대로 Comet 그룹에게 노획되어 버린다. 이중 일부 소구경 포는 고정을 해제하고 이동시킬 수 있었고 이에 팔쉬름예거는 유일한 중화기로 노획한 그리스군의 해안포 몇 문을 얻는다. 다행인 건 글라이더 비행을 비행장을 지키고 있던 뉴질랜드 부대들도 볼 수 있었고, 심지어 대공기관총으로 일부 글라이더를 격추시키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뉴질랜드 부대는 그리스군으로부터 통신 보고는 못받았지만 독일군 글라이더의 확인으로 독일군이 곧 몰려온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1일차. (레슬리 앤드류 중령) 2. 1941년 5월 21일 - 군 상부와 앤드류 중령의 오판으로 말레메 비행장에서 뉴질랜드군 철수, Comet 그룹 비행장 점령 성공 미리 전술하겠지만 이 오판은 레슬리 앤드류 중령 개인의 책임보다도 군 상부의 문제, 지휘의 문제 등이 더 컸다. 비행장을 현장에서 방어하던 부대는 레슬리 앤드류 중령의 22 대대였고,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인근 위치에 23대대가 있었으며, 21대대는 같은 뉴질랜드 그룹으로 편제되어있긴 했지만 비행장에선 꽤 떨어져 있었다. 22대대에 대해 설명할 때 재미있는 건 그 구성원과 지휘관인데, 레슬리 앤드류 중령은 1897년생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1917년 20살의 나이에 빅토리아 십자상을 탄 전쟁영웅이었고, 이 때문에 가난한 출신임에도 장교에 대대장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22대대의 구성원들, 그러니까 앤드류 중령을 제외한 부사관과 다른 장교들 그리고 사병들은 모두 마오리족 원주민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전투에 대한 강렬한 투지와 뛰어난 육탄전 실력으로 뉴질랜드군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전쟁 영웅 출신 백인 지휘관+전투민족 원주민 부대원들 조합은 언뜻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앤드류 중령은 사람이 좋고 본인은 백인이지만 뉴질랜드 본국에서 진보적 교장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마오리족 병사들도 잘 대해줘 부대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20일 새벽부터 오후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으로 오이겐의 Comet 부대가 강하하고, 21일 밤에 이들이 22대대가 지키던 비행장을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야습하면서, 전쟁영웅 백인이 지휘하는 650명의 22대대 원주민 병사들은 세계최강을 자처하던 팔쉬름예거 정예부대와 교전하게 되었다. 22대대는 비행장 방어용 대공기관총과 빅커스 수냉식 기관총, 브렌 경기관총 등으로 상대적으로 오이겐의 Comet 그룹에 비해선 잘 무장된 편이었다. 이러한 무장의 열세를 안 Comet 그룹은 여러 곳에서 동시에 영국군을 공격해 혼란스럽게 하며 야습한다는 계획을 실행했다. 그러나 원주민 전사들도 만만치 않았고, 이들은 팔쉬름예거의 야습에 쉽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응사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문제는 장교 간 통신과 의사소통이었다. 그리스 지역에 제대로 된 통신망 인프라가 구축이 안된 상황에서, 앤드류 중령은 그리스군으로부터 제대로 된 적의 규모나 위치를 보고받지도 못했고, 아무리 화력과 장비에서 우세하다지만 야습에 사방에서 공격당하는 상황에서 자연히 적의 규모를 모르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실제로는 자신들보다 수도 적고 무장도 빈약한 오이겐의 Comet 그룹이 수적으로 우세하며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다고 과대평가하는 오판을 내렸다. 앞서 말했듯 21대대는 22, 23대대와 거리가 있었는데 이에 그는 23대대쪽에 지원요청을 부탁한다. 사실 적이 많든 적든 교전이 시작되면 지원을 요청하고 상황을 보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임스 하제스트. 특이하게 전쟁중 정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 그런데 영연방군 휘하 뉴질랜드 여단의 여단장 제임스 하제스트 경은 23대대가 독일군과 만나 교전중이라며 22대대에 통보했고 이로 인해 앤드류 중령은 아무런 지원 병력을 받지 못한다. 제임스 하제스트는 22대대를 위해 여단 본부 병력에서 증원 병력을 꾸리긴 했는데 겨우 경전차 한 대와 차량 두 대로 이루어진 황당할 정도로 빈약한 증원 병력이었고 이들은 밤중에 길을 잃어 비행장에 도착도 못한다. 더 황당한 건 23대대는 독일군과 교전중이긴 커녕 독일군이 있는 곳에 있지도 않았고, 그냥 비행장 근처 민가에서 멍때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즉 23대대가 독일군과 교전중이라는 것은 제임스 하제스트를 비롯한 영연방군 군 상부의 뇌피셜 판단이었다. 앤드류 중령은 쟤네 사실 좃밥이니까 22대대를 잘 인솔해서 싸우라고 파이팅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너희 뿐만 아니라 옆에 23대대도 지원을 못해줄 정도로 독일군과 교전중이라는 정보를 받게 되고, 이에 비행장과 떨어진 23대대가 교전중이라 지원을 못할 정도면 우리는 완전 포위되었다라는 치명적인 오판을 하게 된다. 앤드류 중령은 실제론 옅게 흩어져 있던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으려고, 그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와 독일군과 싸우고 있지도 않은 23대대를 '구원'하려고 대대의 유일한 전차전력이었던 2대의 크루세이더 경전차와 가장 신임하는 마오리족 병사들로 '특공대'를 구성해 독일군을 공격한다. 그러나 크루세이더 경전차는 정비불량으로 그 타이밍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고, 전차지원을 못받은 특공대는 야간에 시야부족으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는지도 모른채 Comet 부대에게 전멸한다. 실제론 '옅게 포진된 Comet 그룹이 깔짝깔짝 kar98k로 저격정도만 하고 있던' 상황에서, 앤드류는 '우리가 완전히 포위되었고 주변 부대도 대규모 병력에 고전중, 포위망 돌파를 위한 특공대는 전멸'이라는 잘못된 정보속에 크레타 전투의 전황을 뒤흔들 매우 치명적인 오판을 한다. 야음을 틈타 부대원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비행장을 버리고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앤드류는 연대 본부에 다음과 같은 통신을 보낸다. "지원병력이 없다. 당장 증원이 오지 않는다면 비행장을 버려도 되겠는가?" 이에 하제스트가 내린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그래야 한다면야, 뭐. (If you must, you must.)" 결국 밤중의 교전 끝에 야음을 틈타 22대대는 철수하고, Comet 그룹은 성공적으로 말레메 비행장을 점령했다. 여기까지가 2일차. (점령 직후 말레메 비행장으로 몰려든 Ju 52 수송기들) 3. 1941년 5월 22일 - 뉴질랜드군 반격 실패, 팔쉬름예거 및 독일 항공수송부대의 비행장 완전 점거 5월 21일 아침이 밝아오고 나서야 뉴질랜드군은 상황파악에 나선다. 자신들이 치명적인 실수를 깨달은 그들이었지만 이미 모든 건 늦은 후였다. 그 당시 독일 지휘부는 아테네에서 전전긍긍하며 비참한 상황에 비관적인 상태였다. 그런데 오이겐이 말레메 비행장을 점령했다는 기적적인 통신을 전해오자, 독일군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하고 빠른 지휘체계를 통해 유리한 상황을 굳혀나갔다. 21일 날이 샘과 동시에, 즉 오이겐의 분투 단 몇 시간만에, 제 5산악사단 2개 연대 5천여명의 병력이 Ju 52 수송기를 타고 말레메 비행장으로 향했다. 사단장 율리우스 링겔 장군 역시 대공포화나 스핏파이어 전투기에 격추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수송기에 탑승했다. 루프트바페 Ju 52 수송기 조종사들의 실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은 좁은 야전 비행장 한 개에 수십대의 수송기를 사고없이 능수능란하게 착륙시켰다. 능숙한건 수송기 조종사들 뿐만 아니었다. 5산악사단 병력들은 유사시 북아프리카에서 빠르게 작전전개를 하기 위해 공수훈련은 아니지만 수송기에서 빠르게 내려 중화기를 전개하는 항공수송부대 훈련을 받은 상태였는데, 가장 먼저 Ju 52 수송기에서 내린 중장비는 불도저였고, 독일군은 불도저로 빠르게 현장의 잔해를 치워 다음 수송기가 내릴 수 있게 해주었다. 육공군 병사들은 먼저 내리면 그 다음 수송기가 무사히 착륙할 수 있게 주변을 정리하고, 숙련된 수송조종사들은 곡예에 가까운 착륙을 하기를 반복했다. 영국군이 상황을 파악하던 21일 밤이 되면, 단 반나절의 시간동안 독일군은 2000명 이상의 병력을 성공적으로 비행장에 착륙시키고, MG 42와 대전차 무반동.포등 중화기를 전개하고, 심지어 남는 불도저로 참호와 방어선까지 파는데 성공했다. 21일 하루가 종일 걸려서야 상황파악이 된 뉴질랜드군을 비롯한 영연방군은 21일 밤 야습을 통해 비행장을 재점거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영연방군의 야습은 지휘의 혼란으로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뉴질랜드군 20대대와 호주대대가 주력을 맡기로 했는데, 이들이 독일군 Ju 87 급강하 폭격기의 기습 공습으로 지연된다. 그럼 나머지 병력으로라도 야습을 감행했어야 했지만, 본부는 20대대와 호주대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며 4시간이나 작전을 지연시켰고, 잘 알듯이 4시간이면 밤이 떠나고 22일 낮이 밝아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20대대와 호주대대는 공습피해와 기타 여건 부족으로 공격에 참여하지 못했다. 공격에 참여하지도 않을 부대를 기다리다 무의미하게 야습할 시간을 놓치고 황금같은 밤의 시간을 넘겨보낸 것이다. '날이 밝아오는 새벽'의 '야습'은 뉴질랜드군 소속 마오리 병사들의 착검돌격으로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미 기관총을 거치하고 참호까지 판 상태였으며, 밤도 지나 시야도 탁 트인 상태에 이들의 착검돌격은 실패했다. 놀랍게도 이런 상황에서 일부 마오리 전사들이 착검한채 독일군 참호를 넘어 비행장 가장자리까지 닿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독일군의 반격에 이들도 물러났고 무의미하게 마오리 병사들만 희생시킨 꼴이 되었다. 결국 뉴질랜드 연대와 연영방군은 더 이상 말레메 비행장에 대한 유의미한 작전을 할 수 없다고 평가, 크레타 서부에서 물러난다. 그렇게 3일차. 그리고 크레타 전투의 운명은 기울어져버렸다. 크레타 전투의 분수령이 된 말레메 비행장 방어작전의 실패는 의사소통, 효율적 결정, 현지 병력과의 조화 등이 실패하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알려주는 씁쓸한 사례로 지금까지도 남게되었다. 출처: 뉴질랜드 역사 포럼 nzhistory.govt.nz The Lost Battle : Crete 1941 - CALLUM MACDONALD Bell, Rachael "Evidence and Interpretation in New Zealand’s Official History: The Battle for Crete, May 1941" 등 외
작성자 : 나쿠로이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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