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글을 잘 쓰던 블로거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며칠마다 한 번씩 감명깊은 글을 쓰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로는 글을 쓰는 기간이 많이 길어진 때였습니다.
어느날 그 블로거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계속되는 고통에 둘러싸여 더 이상 걸을 수 없고
해결 방법이 더 멀어져 더 이상 볼 수 없으면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든다."
처음에 이 글을 봤을 때는 왜 행시에 합격했는데 이렇게까지 썼을까 하는 거리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이 문구에 대한 하나의 주석입니다.
그림 형제의 우화 중 "어부와 그의 아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부는 낚시를 하다가 넙치를 하나 잡았습니다.
그 넙치는 말을 할 수 있었고, 소원을 들어줄 테니 나를 풀어주라고 말했습니다.
어부는 넙치를 풀어줬습니다.
어부는 이 이야기를 그의 아내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지저분하고 누추한 집에서 살고 있는 그의 아내는 이 집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어부는 넙치에게 그 소원을 말해주었고, 넙치는 그 소원을 들어줬습니다.
근사한 집이 생긴 그의 아내는, 그러나 집이 더 컸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어부는 넙치에게 그 소원을 말해주었고, 넙치는 그 소원을 들어줬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근사한 성이 생겼음에도 불행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자기가 여왕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부는 넙치에게 그 소원을 말해주었고, 넙치는 그 소원을 들어줬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여전히 불행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끝내는 해와 달이 뜨는 광경을 견딜 수 없다며, 나의 허락 없이 해와 달을 뜨고 지게 할 수 없다면 도무지 행복할 것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넙치는 소원을 들어주는 것을 포기하고 어부와 그의 아내는 다시 누추한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어부의 아내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계의 어떤 것이 어떻게 있느냐가 그의 아내를 불행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 자체가 있다는 것이 그의 아내를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부의 아내처럼 욕심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어부의 아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던 적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한번쯤 순전히 세상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가장 혼란스럽고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냐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질문 하나를 합니다. "대체 삶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는 사실의 영역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영역인 세계의 한계에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바꾼다면, 그것은 단지 세계의 한계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지, 사실들을 바꿀 수는 없다. 즉 언어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서, 그렇다면 세계는 선악의 의지를 통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세계는 전체로서 이지러지거나 차야 한다.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에게 세계는 다르게 주어집니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세계가 이지러집니다.
즉 세계의 한계가 소멸하고 투명해짐으로서 세계를 세계 그 자체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계를 세계 그 자체로 봄으로서 일어난 일을 오직 일어난 일로 보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따릅니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세계가 차오릅니다.
불행한 사람은 세계에 일어나는 일에 부딪힙니다.
불행한 자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가치로, 삶의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세계의 한계들만을 맞닥뜨립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가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이것은 받아들이기에 너무 버거운 논변이지만, 이 문구로부터 어떤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윤리적 속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세계가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라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로부터 행복해질 지 불행해질 지,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지 부딪힐 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게 됩니다.
어떤 특정한 윤리적인 문제는 세계 자체에 대한 관점, 세계관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특정한 윤리적 문제는 삶의 의미를 묻는 행위와 큰 관련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 5장에 나오는 문장 “그분께서는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를 생각해봅시다.
행복한 사람은 비가 내리는 것을 비가 내리는 것으로,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단지 일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에 반해, 불행한 사람은 비가 왔을 때 이를 삶의 의미와 연관짓습니다. "내가 왜 이런 수난을 받아야 하지?"라고,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같은 이유로 해가 내리쬐는 때에도 불행할 것입니다. 어부의 아내처럼 불행할 것입니다.
예전에 글을 잘 쓰던 블로거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며칠마다 한 번씩 감명깊은 글을 쓰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로는 글을 쓰는 기간이 많이 길어진 때였습니다.
어느날 그 블로거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계속되는 고통에 둘러싸여 더 이상 걸을 수 없고
해결 방법이 더 멀어져 더 이상 볼 수 없으면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든다."
처음에 이 글을 봤을 때는 왜 행시에 합격했는데 이렇게까지 썼을까 하는 거리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 동어반복입니다.
불행한 자라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그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채 그 문제들에 부딪힙니다.
행복한 자는 보통 인생의 의미를 찾지 않습니다. 세계에 그의 의지가 부딪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찾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부의 아내처럼 소원을 빌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질문을 하려고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기대하려고 합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가치 있는 삶을 어떻게 사는가, 더 잘 사는 법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합니다.
여기서 답변을 받으려는 욕구는 어부의 아내가 소원을 이루려는 욕구보다 더 강할지도 모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어부의 아내처럼 불행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대체 삶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되어 있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런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소멸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오랫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이에 더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회의주의는, 만일 그것이 물음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의심하고자 한다면, 반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존립하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존립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또 이 대답이란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그 수많은 문구들을 통해서 보이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물음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물음을 던지는 것은 오직 무의미하다는 점 말입니다.
그의 목표는 물을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자기 스스로 경계지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자연과학적인 질문 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같은 물음은 대답되어 있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되어도 삶의 문제는 전혀 건드려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대답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삶의 문제의 해결이라고 말입니다.
삶의 문제에 있어 어떤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문제를 준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음으로서 해결됩니다.
그럼으로서 달이 이지러지듯이 삶의 문제는 소멸합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고, 더 이상 볼 수 없어도 삶은 이지러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물음(혹은, 비종교적으로 말해, 삶의 진정 가치있는 물음)과 그 답변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좋은 지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질문과 답변은 “현문우답”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현명한 질문에 어리석은 대답이 나오는 것, 이것은 종교적인 물음을 생각해봤다면 한번쯤 부딪혀본 것입니다.
개도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이나, 아이에게도 원죄가 있느냐라는 진정 날카로운 질문 앞에서, 답변은 절대 그 질문보다 명료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현문우답과 가장 비슷한 사례는 선불교의 어록들일 것입니다.
“한 중이 조주 스님에게 ‘갓난애에게도 육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물었다. 조주 스님은 ‘급한 물살 위에 공을 던지게’하고 대답했다. 그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 중은 투자 스님에게 다시 물었다. ‘급한 물살 위에 공을 던지라니 무슨 뜻입니까?’ 곧 투자 스님은 ‘염마다 조금도 멈추지 않고 도도히 흘러간다네’ 하고 대답했다.”
"한 스님이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라고 묻자, 임제스님이 곧장 '할!' 하고 고함을 벽력같이 질렀다. 그 스님은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말했다. '이 스님과는 그래도 말을 나눌 만하구나.'"
(삶의 의미에 대해 물어본 사람이라면 자주 경험했던 것처럼)
진정으로 가치 있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정말 이상할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휘파람을 부는 것과 같이, “급한 물살 위에 공을 던지게”와 같은 이상한 말과 같이, 말이 아닌, 말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다시 말해 그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한 문제는 언어적인, 경험적인 것과 관계가 없는 것 같다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언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던 사람은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히는 것이었고, 이러한 정신을 깊이 존경하지만, 절대적으로 희망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진짜 중요한 것 앞에, 침묵으로 일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피합니다. 그는 삶에 대한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eschew)”습니다. 그리고 오직 자연과학적인 질문만을 질문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행한 자라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그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채 그 문제들에 부딪칩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처음부터 그런 삶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았던 사람이나, 이것이 대답될 수 없는 질문임을 깨닫고 그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은 사람을 뜻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저는 “유한주의자”라고 하겠습니다.
이론의 유한성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인간의 유한성을 다룬 사람이었습니다.
세계 앞에서 던지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세계에 부딪혀서 외치는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질문 대신
세계의 모든 것을 세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나의 의지를 세계와 일치시킨다면,
세계 앞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인다면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한 질문에 대해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음으로서
불행한 삶에서 행복한 삶으로 거듭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모든 분께 이 글이 도움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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