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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정리 강박이 유별나긴 한가 보더라

ㅇㅇ(112.154) 2021.09.17 20:43:23
조회 93 추천 0 댓글 2

한국 학생은 노트, 독일 학생은 카드


“Was ist deine Theorie(네 이론이 뭔가)?” 면담 신청을 하고 몇 달을 기다려 겨우 만난 지도교수는 대뜸 내게 물었다. ‘내 이론이라니?’ 난 그때까지 한 번도 내 이론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내 이론을 만들 생각도 없었다. 겨우 학부를 마쳤을 뿐이었다. 그것도 매일같이 데모, 수업 거부, 시험 거부로 이어진 대학 생활이었다. 개뿔, 이론은 무슨. 이론은 미국과 유럽의 대가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도교수는 분명히 이제 막 독일에 정착한 내게, 내 이론이 뭔가를 묻고 있었다. 없다고 했다. 당신의 이론을 배우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나가라고 한다. 석사, 박사 논문을 쓰겠다는 학생이 어찌 자기 이론이 없을 수가 있느냐는 거다. 자기 이론의 방향이라도 생각해서 다시 오라고 했다.


주체적 시선으로 공부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학문적 문제의식이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내 주체적 관점이 분명해야 남의 이론을 베끼고 흉내 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서구의 대가라면 기죽기부터 하는 ‘주변부 열등감’부터 버려야 했다. 아니, 아주 구체적으로 공부하는 방법부터 바꿔야 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대가의 이론을 그저 외우는 것만으로는 ‘내 이론’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도서관에서 독일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양을 자세히 살펴봤다. 특별한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작은 카드에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학교 앞, 노점상들도 다양한 크기의 카드를 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카드를 정리하는 알파벳이 순서대로 적혀 있는 다양한 모양의 상자도 팔고 있었다. 나무·가죽·플라스틱 등 종류도 다양했다.


독일인들은 정리에 대한 집단 강박이 있다. 정리가 안 돼 있으면 불안해한다. 거의 공포 수준이다. 사람이 다치면 냅다 달려가 ‘Alles in Ordnung?’이라고 물어본다. 의역하면 ‘괜찮습니까’란 뜻이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모든 것이 다 잘 정리되어 있습니까’가 된다. ‘괜찮은 상태’란 ‘정리가 제대로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사람들은 죽어라 정리만 한다. 공장에서도, 사무실에서도, 가정에서도 정리는 의무다. 정리가 ‘정상’과 ‘또라이’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 학생들은 책상 위에 공부하며 요약한 카드와 그 카드를 정리하는 카드 박스를 꼭 두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의 습관대로 여전히 노트를 썼다. 노트와 카드.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편집 가능성’이다. 카드는 다양한 편집이 가능한 반면 노트는 편집이 불가능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독일에서 배운 것은 바로 이 ‘편집 가능성’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프로이트의 책을 읽으며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을 카드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한다. 가장 위에는 키워드를 적고 그 밑에는 연관된 개념(오늘날 인터넷의 연관 검색어에 해당), 출처, 날짜 등을 차례로 적는다. 그리고 카드 한 장의 앞·뒷장에 그 내용을 요약한다. 피아제, 비고츠키, 융과 같은 심리학자의 책을 읽을 때도 같은 방식으로 정리해 나간다. 모인 카드는 알파벳 순으로 정리한다. 여기까지는 노트 정리와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번잡스럽다. 정리하고 외우는 양을 따지면 독일 학생들의 학습량은 한국 학생들에게 상대도 안 된다. 독일 역사, 유럽 문화 전반에 관해서도 한국 학생들이 훨씬 더 많이 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부터 차이가 난다.


독일 학생들은 모인 카드를 자신의 개념에 따라 재정리한다. 예를 들어, ‘발달’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프로이트, 피아제, 비고츠키, 융의 이론을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다시 정리한다. 그저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는 게 아니다.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카드를 재정리한다. 새로운 카드 정리의 내적 일관성이 바로 자신의 이론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노트를 보며 달달 외울 때, 그들은 자신의 카드 목록을 재구성하며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가는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헷갈리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카드 편집을 통해 새로운 이론 구성이 가능하려면 편집해 낼 카드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편집의 재료가 많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고작해야 카드 몇 장으로 아무리 뒤섞어봐야 거기서 거기다. 제한된 카드로 잔머리 굴리며, 자꾸 뒤섞어 내놓는 행위를 전문용어로 ‘순 구라’라고 한다. 남의 이론을 많이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편집할 수 있는 카드를 많이 만들기 위해서다. 실력이 있다는 것은 섞어낼 카드가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실력’의 기준도 이제 변하고 있다. 이전에는 많이 외우고 있어야 실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잘 찾아내는 것(know-where)’이 실력이다. 드디어 ‘검색’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자세한 썰은 '에디톨로지'라는 책에 나와있는데, 막 저자가 컴퓨터로 논문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만든 거 보고 눈 돌아간 지도교수가 이민국 직원이랑 고성 질러가며 비자 문제도 해결해 준 덕분에 대학원도 무사히 마쳤다는 얘기도 하는 걸 보면 ㄹㅇ어지간히 정리하는 걸 좋아하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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