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윈대 : 1만 시간이 됐다.
고등학생 시절, 수능으로 바빠야 할 우리의 커리큘럼에는 이상한 시간이 있었다. 수요일 7교시에 위치한 ‘명사강의’라는 시간이었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왔었다.
한 번은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세일즈맨이 왔는데, 계단을 오르는 세일즈맨을 보며 내 친구는 옆에서 ‘엔더맨’이라고 말했다. 마인크래프트에 등장하는, 누군가가 쌓아놓은 집의 블록을 슬쩍 빼가는 녀석 말이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맞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팔다리는 기묘할 정도로 길었고, 얼굴은 홀쭉 패여 있었으니까. 스티븐 잡스나 워랜 버핏 같은 이미지를 기대했건만, 그런 건 없었다. 췌장암으로 죽기 직전의 스티븐 잡스도 저 사람보다는 생기가 있었을 것 같다.
세일즈맨? 차라리 장의사가 더 어올리지 않을까? 게다가 둘은 모두 양복을 입고 다닌다는 공통점도 있다. 연단에 올라선 세일즈맨은 별 거 아니라는 듯 가방을 옆에 척, 내려놓았다. 맨 앞에 앉은 나는 그 가방에 ‘프라다’라고 써진 걸 똑똑히 보았으며, 휴대폰에 검색한 결과 그 가방이 760만원짜리라는 것 또한 알게 됐다.
‘명품이라고 해서 꼭 멋진 건 아니군. 저 가방을 봐, 문방구에서 5만 5천원 주고 산 것 같잖아.’ 난 그렇게 생각했고, 이 생각은 내 인생에서 한 생각 중 가장 쓸모 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적어도, 명품에 대한 환상은 죄다 깨졌으니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학생 여러분.”
그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그 목소리마저 실망스럽다고 느꼈다. 어쩌면 저렇게 다 실망스러울 수 있지?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나는 기묘한 경험 속으로 빠져들었다.
뭐랄까, 그것은... ‘실망감과 기대감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 남자가 얼마나 더 실망스러워질지, 저 남자가 얼마나 더 개판을 칠지. 기묘하게도 나는 그의 실망스러움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남자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제가 오늘 말씀드릴 것은... 1만 시간의 법칙입니다.”
뭐든지 1만 시간을 노력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세일즈맨은 마치 무언가를 팔 듯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 광경을 참으로 기묘하다고 느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내가 그에게 무엇을 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
“손 대지 마.”
나는 다 낡아빠진 빈폴 가방을 들어올렸다.
“내 거라고.”
“이 자식은 무슨 빈폴을 프라다 다루듯이 하네.”
옆에서 친구가 낄낄거렸다.
“그거 네가 고등학교 때 들고 다니던 거 아니냐? 15년 된 가방.”
“엄마가 사 준 거야.”
“누가 들으면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겠어.”
친구라는 말은 취소다. 개자식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저리 꺼져.”
“말 안해도 그럴 거야.”
친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시 후, 골목 너머로 한 남자가 등장했다. 누가 봐도 아직 학생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당근마켓인가요?”
“네.”
“기타 파시는 거고요?”
“물론이죠.”
친구가 씩 웃으며 기타를 내밀었다. 학생 녀석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기타를 위아래로 훑었다.
“저... 여기 줄 감는 부분이 좀 닳은 것 같은데...”
“무슨 소리에요. 원래 그런 거예요.”
친구가 설명했다.
“스트랩 라인은 살짝 닳아 있는 편이 오히려 마찰계수가 늘어나거든요. 오히려 연습할 때 도움이 돼요.”
“아... 정말요?”
“음악 잘 모르시는구나.”
스트랩 라인? 마찰계수?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다.
이 개자식이 되는대로 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살게요. 이십오만 원 맞죠?”
“아뇨, 이십일만 원만 내세요.”
이 말은 당연히 개자식이 아니라 내가 한 말이다.
싱글벙글 웃는 녀석을 보니 왠지 배알이 뒤틀린 것이다.
“줄 감는 부분 하자 있는 거 맞아요.”
“아...”
그러자 학생 녀석의 눈이 변했다.
“그러면 저, 다, 다음에 살게요.”
“잠깐만요!”
개자식의 말과 다르게, 학생녀석은 그대로 우다다 달려 도망가 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뭐가.”
“어떻게 잡은 호구인데.”
개자식이 따져물었다. 어깨가 1cm정도 위로 치솟았다. 팔다리가 유달리 길쭉한 이 친구와 내가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까? 아마 십중팔구는 박살이 날 테다.
미래형으로 쓸 필요는 없었다. 나는 실제로 박살이 났다.
“개새끼.”
개자식은 나에게 침을 퉤, 뱉고 갈 길을 가 버렸다.
개새끼가 누군데? 개자식이야말로 개새끼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린 아이에게 기타를 속여 팔고, 그 어린아이가 기타를 치다 어른이 되고, 서른 세 살이 되고, 또 다른 아이에게 기타를 넘겨 주고...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치미는 광경이 아닌가.
“씨발놈.”
나는 다시 연습실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오늘의 연습 할당량은 5시간 21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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