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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감상 수정본

STGM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6.20 09:22:51
조회 61 추천 0 댓글 9

 이 연극을 보고 굉장히 강한 반감을 느꼈다. 이 반감은 연극의 원작이 된 영화와 희곡 각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서 많이 누그러졌지만, 연극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철회할 수 없다.


 연극은 12명의 배심원단들이 살인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 판결 당일은 무더운 여름의 도중이어서 배심원단들은 더위를 참기 어려웠고, 그들이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은 곧장 사형 판결로 이어지고, 그들이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법정에서 퇴장하지 못한다(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살인 사건은 아들이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것으로 의심받는) 사건이었고, 대부분의 배심원들 정확히는 11명의 배심원들은 유죄 판결을 내리고자 했지만 단 한 명의 배심원이 사건을 보다 신중하게 토론해볼 것을 요구한다. 조금 더 신중한 태도를 취한 단 한 명의 배심원으로부터 사건의 미심쩍은 부분이 차례차례 지적되어가며 최종적으로는 무죄 판결이 내려지는 것이 이 연극의 줄거리이다.


 연극에 대한 감상을 적기 전에, 이 연극이 계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싶다. 물론 연극을 포함한 모든 창작물들은 계몽을 목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연극이 관객의 어떤 지점을 계몽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당연하지만 연극이 계몽하고자 하는 바가 배심원으로서의 참된 태도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는 지점은 여러가지이지만 가장 중요한 지점 하나만 꼽자면, 이것이 한국에서 공연되었다는 점이다. 국민참여재판은 미국식 배심원과는 다르게 판사의 판결을 구속할 수 없으며, 따라서 배심원의 유죄 선고가 곧장 사형으로 이어진다는 설정은 현실과 다르다. 또한 한국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열리는 비율은 극히 낮아서,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원들의 자세와 원칙을 교육하는 일이 시급한 사회문제로 부상한 것도 아니다. 


 때문에 나는 이 연극이 관객을 계몽하고자 하는 바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원칙에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이 연극에서의 재판이란 사실 우리 인생에 대한 비유인 것이다. 우리는 처음으로 무죄를 주장한 배심원처럼 항상 신중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다수가 만드는 침묵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지 않고 소수의견을 꿋꿋하게 주장해야 하며, 부모로부터 아동학대를 당한 저소득층 소년에게 관대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이것이 연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계몽의 메시지다. 


 말하자면 연극에서 첫 무죄 배심원이 보여주는 윤리는 서구적 자유주의의 윤리이다. 이것이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삶과 크게 불일치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일치되는 지점도 있다. 특히 이것을 단순한 법정 드라마로만 바라본다면 피고인 소년에게 내려진 무죄 판결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데 연극의 내용을 우리 인생에 대한 비유로서 바라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장 커다란 문제 의식을 갖게 된 부분은 이 연극이 진정으로 관용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연극의 관용은 오로지 피고인 소년에게만 향할 뿐, 다른 배심원들 특히 지루하고 더운 배심원 활동을 견디기 힘들어 빨리 야구나 보러 가고 싶은 배심원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짙은 차별 의식을 가지며 혐오 표현을 쏟아내는 레드넥스러운 배심원, 자신의 아들과의 관계에서 쌓인 상처를 피고인 소년에게 투영하는 찌질한 배심원을 향해서는 전혀 관용의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태도가 올바르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그들 안타고니스트들을 악마화하는 것은 너무 쉽고 편한 방법이라는 뜻이다. 편견에 휩싸이지 않고 신중함을 가지고 판단하자는 것이 극의 메시지 아니었나? 이렇게 편하게 상대방을 악마화하는데 어떻게 자기성찰을 통한 객관화가 가능한가. 현실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고 보다 복잡하다.


 이렇듯 윤리의 문제를 배심원에게 돌리는 연극의 내용은 보다 더 커다란 문제를 은폐한다. 그것은 시스템의 문제이다. 만약 국선변호사가 보다 성실하게 소년을 변호했다면, 검사가 보다 철저하게 수사를 진행했다면, 미국 나름의 맥락과 이유가 있겠지만 배심원들이 의심스러운 지점이 생길 때마다 증인과 수사관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구조라면, 소년의 무죄는 훨씬 빠르고 이의없이 결정되었을 수 있다.


 이쯤에서 처음으로 무죄를 주장한 배심원의 직업이 건축가라는 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상영된 이 연극의 원작이 되는 영화와 희곡을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살펴본 바로는 첫 번째 배심원의 직업이 건축가인 것은 원작에서도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몇몇 다른 배심원들의 직업은 바뀌는 경우가 있었고, 그것은 주로 원작에서 남성으로 설정되었던 배심원들이 여성으로 바뀌는 과정의 부산물이다. 어쨌거나 배심원들의 직업은 각색을 통해 충분히 바뀔 수 있는 문제였으나 주인공에 해당하는 첫 배심원의 직업은 건축가로 고정되었다. 나는 이것이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주인공의 직업은 건축가이되, 건물을 설계하는 건축가가 아니라 사회의 제도를 설계하는 건축가인 것이다. 재판장에서 그가 자유주의의 윤리를 크게 외치는 것은 그 자체로 건축의 과정이다. 


 그런데 그가 자유주의의 윤리를 건축하는 과정은 곧 이 연극의 줄거리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연극의 줄거리는 사회의 진짜 문제인 시스템의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건축가 배심원은 시스템의 문제를 은폐하는 주범이다. 그런데 겉보기에 건축가 배심원은 소년의 무죄를 격정적으로 변호하는 듯이 보인다. 이것을 위선 아닌 다른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 작품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의 윤리가 내 삶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와 크게 불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나의 진심이다. 나의 분노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크게 일어난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이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와 정반대되는 윤리, 가령 전근대적인 봉건 시대의 윤리로 쓰여진 작품이라면 슬펐을지는 몰라도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대상에게 분노하지는 않는다. 기대가 클수록 분노도 깊은 법이다.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의 윤리는, 적어도 이런 식의, 허수아비치기의 오류에 기반한,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된 윤리는 아니다. 


 희망이 있다면, 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있을 것이다. 건축가 배심원은 법정을 퇴장하기 직전에 멈추어 탁자에 꽂힌 칼을 응시한다. 이 칼은 소년의 무죄를 주장하는 증거물이었다. 나는 이 응시가 소년이 사실 진범일 수 있을 거라는 망설임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윤리는 이러한 망설임과 자기반성의 시도로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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