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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대] 나를 생각해주세요모바일에서 작성

ㅇㅇ(118.235) 2024.06.30 15:39:24
조회 128 추천 0 댓글 2




“선생님, 정말이지 이건 현실과 다를 게 조금도 없는 느낌이란 말입니다.”
“다 그렇게들 얘기하시곤 하죠.”

그가 초조하게 내려다본 손목시계는 오후 2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러 이유로 정신과를 예약해 두었던 시간대다.

지금 그는 예정대로 그곳에서 진료를 받는 도중이었다. 짙은 눈그늘과 자꾸만 떨어대는 손, 즉 잠깐만 들여다봐도 폐인 같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는 몰골을 하고서.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앉아 있는 의사가 한숨을 쉬더니 재차 말문을 열려는 기색을 느끼고, 그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름진 얼굴의 의사가 확고한 어조로 단언하는 것을 듣는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건 심신미약에서 비롯한 환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때였다. 또 한 번 그에게 기이하기 짝이 없는 감각이 찾아든 것은.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온다.

철없는 아이에게 훈계하듯 말하던 의사의 움직임이 점차 느릿해지더니 끝내는 거의 정지에 가까워졌다. 마치 밀랍인형처럼 보이는 늙은이를 앞에 두고 그는 두통과 함께 밀려오는 졸음을 느꼈다. 지난 며칠 동안 수 차례나 경험한 바 있어 잘 아는, 아마 정신병 같은 현상의 전조였다.

눈꺼풀을 한 번 여닫는 찰나에 기나긴 시간이 지나가버린 듯한 착각이 들고 나서는, 다음부터 모든 것들이 본래와는 다른 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세상이 늘어진 필름이고, 그 짧고 긴 깜빡임은 어쩌면 어느 버튼, 그래. 되감기 버튼을 누르는 손짓인 양. 그리하여 모든 것들이 반대로, 거꾸로 가기 시작한단 말이다……

“……다니습않 지나지 에각환 한롯비 서에약미신심 건그 ,만지리드씀말 듭거”

말을 삼킨 의사가 중지를 들어 콧대에 잘 걸려 있던 안경테를 헐겁게 내려놓고, 나지막이 한숨을 빨아들이는 것을 그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때 그는 양쪽 눈동자 뒤편에 붙박인 채 말똥한 의식을 굴려대기만 할 따름으로, 방금껏 해왔던 행동들을 최근 순서로 반복하는 것 말고 다른 움직임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다시, 꼭 아까 그랬던 것과 완전히 똑 같은 장면을 연기하듯이 그는 왼팔에 찬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2시 47분. 다만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초바늘이 반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손목에서 시선을 떼어낸 그는 의사에게 자기 증상에 대해 뒤에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의사가 “.죠하 곤시하기얘 들게렇그 다” 라고 먼저 맞장구치듯 하면 그의 주둥이는 제멋대로, “다니입말 란이낌느 는없 도금조 게 를다 과실현 건이 지이말정 ,님생선” 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계속됐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들며 의사와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인사말을 나눴고, 뒷걸음질로 진료실 문고리를 잡고 나갔다.

흰 복도를 거쳐 대기석을 등지고 서서 바지에 손바닥을 문대자 땀으로 흠뻑 축축해졌다. 천천히 주저앉은 직후, 여자 직원의 안내 방송이 그의 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안하기라도 한 것처럼 굳게 깍지 껴 마주잡은 두 손에서 점차 물기가 말라가고 있었다. 어떤 쪽에 있어서든 모두 기다리는 시간이다. 간호사의 호명을, 지긋지긋한 회귀回歸의 끝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실제보다 몇 박자 늦게였다.

그는 이번엔 그 자신만의 의지로써 벌떡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이 의아한 듯 흘겨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2시 34분이다. 초바늘은 이제 향해야 마땅할 방향을 지닌 채,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그 혼자서만 기억하고 있는 간격, 사라져버린 13분 따위야 신경 쓸 바 아니란 것처럼.

의사는 이것이 단지 환각 증세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는 믿기 힘겨웠다. 그의 감각도, 이성도, 추측도, 그 무엇도 그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보았던 것과 완전히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 한에야, 그가 겪어본 적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고 역류해왔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이 사실은 헛것을 입증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되려 현실을 입증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곧장 정신과 밖으로 나가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차례가 머잖지만, 진료 따위나 받으려던 생각이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닫혀가는 철문 너머로 어렴풋이, 마이크와 스피커를 통해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오고 있었다. 이제 꼭 세 번째 듣는 대사 그대로, 사소한 억양, 높낮이, 잡음, 무엇 하나 다르지 않게.

……님 들어오세요……

층을 내려가면서 그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아무런 예정도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에 다다른 탓이다. 몰두할 것이 없으면 그때의 일이 또 수면 위로 떠오르려 한다. 그게 무엇이든 몰두할 것이 필요했고, 다행히도 그는 제법 쓸 만한 물건을 알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신세를 지기도 했으므로, 뭐 얼마 더 진다고 해서 큰 흠이 될 것도 아니었다.

술이 마시고 싶었다.


사실 그러면 안 될지도 몰랐다. 과다한 알코올 복용이 환각에 무슨 영향을 끼칠지 알 도리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마셨다.

늘상 그래왔지만 지금은 특히 더 그렇듯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가라앉히는 데는 술이 가장 좋았다. 뭔가 잊어버린 것만 같이 더러운 기분을 감추는 데도, 죄의식을 지우는 데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회한스럽다 해도 저지른 일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되돌릴 순 없다…… 순간의 충동과 그 대가로서 찾아온 불행. 그것을 잊은 체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완전히 마음에서 지우고 없앨 수는 없다고, 그는 잘 알고 있었지만 밤새 마시기를 멈추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 과거, 그의 잘못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기억은 평생토록 남는다. 시간이 흐르고 술이나 들이킨다고 해서 자연스레 사라질 리가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지난 일을 바로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벌써 한참 동안이나 그는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이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만치.

아니……
아닌가?


다음 날 그는 숙취에 찌든 채 거실에서 일어났다. 잠이 깬 자리 주변엔 깨끗이 비운 소주병들이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었다. 치우려고 분리수거함이 있는 베란다를 향하였더니 거기에도 병과 캔이 한가득이었다.

돌아와서 옷이 잔뜩 주름잡혔고 악취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날 정신과엘 들르면서 입었던 것을 갈아입지도 않고 고꾸라졌던 모양이다. 대강 씻고는 새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었다. 침실 경대 위에 놔뒀던 시계를 챙겨 차면서 보니, 8시 정각이 가까웠다.

머리 끝까지 취해 곯아떨어졌던 것치고는 일찍도 깼다. 알람도 없이. 버릇 탓이겠지. 버릇이란 그게 어떤 것이든 간에 하루아침만에는 고쳐지지 않는다.

그는 주방으로 가서 정수기 물을 받아 인스턴트 커피를 탔다. 별생각없이 하나를 완성하고, 또 두 번째의 잔를 완성했을 때 이제는 한 잔이면 충분하다는 걸 까먹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두 잔째의 커피도 언제부턴가의 버릇인 모양이다, 하고 생각하던 그는 그것을 싱크대에 가져가 쏟아버리고, 내려놨다.

먼저 만들었던 잔 속의 새까만 내용물을 홀짝이자 무척이나 쓴 맛이 났다. 다른 누군가에게 있어서라면 몰라도, 그의 취향에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는 향이었다. 실수했던 것이다. 두 번째가 그의 것이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그만 내다버릴 커피를 잘못 고른 일을 돌이킬 수도 없고, 남은 것마저 내버리긴 기껏 뭐라도 해보려던 시도가 아주 없는 셈이 되는 것이었기에 그는 잔의 밑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마시며 그 씁쓸한 맛을 곱씹었다. 역시 마음에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듣던 대로 잠 깨는 덴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는 떠올리고 말았다.

그는 직상 상사에게 연락을 걸어 오늘도 결근임을 알렸고, 통신 건너편의 상대가 “힘든 건 이해하겠지만 그래도……” 라고 마치 위로하듯 말하고 있을 때 전화를 귓가에서 떼어내고는 연결을 끊었다.

이해하겠다고.

뭘 이해한다는 것일까?

문득, 그는 꼭 자기가 여태껏 비워버린 잔이나, 병이나, 캔처럼 텅하니 휑하게만 보이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멍하니 느릿느릿한 시선으로.

제 심박만 쿵쿵거릴 만큼 조용했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넓어 보였다.
창틀에 모양을 맞춰 들이치는 햇볕.
유독 묵직하게 느껴지는 왼편 손목.
무엇보다 코끝을 맴도는 커피 냄새.
숨이 콱 막혀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후, 그는 아파트 단지 내부의 공원으로 내려와 있었다. 별달리 목적지를 정해두지도 않은 채 걷기만 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만발한 벚나무들 아래서 움직이는 것들을 그는 목도했다.

높이 솟은 희고 큰 덩어리들, 꽃잎들이 흔들리는 화단, 달리는 자전거 위 미소 짓는 아이, 교복 입고 가방 멘 학생, 어디론지 빠른 걸음으로 향하는 어른, 가족.

너무, 너무나도 맑은 사월의 경치였다. 불어오는 바람 끝자락에 실려 팬지꽃 향이 아른거리고, 바라보는 곳마다 어여쁜 무지개가 떠 있는 듯 여겨질 정도로……

하지만 그는 그것들이 싫었다. 끔찍했다. 그 모든 것들이 추악한 얼굴들을 속에 감춘 가면의 껍데기로 생각될 따름이었다. 그의 뺨에서부터 턱을 타고 식은땀이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닦아보지만 닦는 손마저 땀으로 범벅이다. 방울들이 맥없이 추락한다. 발치에, 콘크리트 바닥에. 뚝. 뚝. 행복해하는 것에 대해 그는 역겨움을 느끼고, 동시에 무력감을 느낀다.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다가오더니, 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갔다.

뒤늦게 고개를 쳐든 그는 벌써 꽤 멀어진 그들의 뒷모습밖에 확인할 수 없었다.

그들은 팔짱을 낀 채 나아가고 있었다. 나아가면서, 서로에게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속삭이고, 때로는 떠들고, 깔깔 웃고, 달라붙고 또 떨어지고, 손을 깍지 껴 맞잡고, 같은 방향을 보고, 기꺼이 보폭을 함께한다.

저들은 행복해하고, 그리고 또, 사랑하는 이들이다.

과거의 환영…… 꽃향기를 어스름히 감싸 덮는 쓴내……

각막에 비치는 그들의 형체가 느닷없이 흐릿해지더니 둘, 셋, 여럿으로 겹치기 시작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었다. 벚나무, 수풀, 화단, 햇살, 사람, 뭐 그런 것들 모두 다.

그리고 어째서일까, 이상하게 졸린 것 같다.

또 그 감각이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또 다시 한 번 시계바늘이 반대로 경주해 돌아가고 나면, 또 다시 한 번 이 기분을 실감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끔찍하고 역겹고 더없이 무력한 자기 자신을? 좀체 코끝에서 흩어지지 않는 쓴 커피 냄새와 멋진 봄날의 공원과 지나가는 연인들과 왈칵 터져나오는 눈물을?

가스 찬 변사체처럼 떠밀려오는 기억을?

아니,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갑자기 찾아드는 역행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받아들이며, 누구도 보지 못하는 발버둥과 누구도 보지 못하는 아우성을 쳐댈 뿐.

그런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진심으로 바라게 된 소망이 딱 한 가지 있다면, 차라리 꼭 다시 한 번만……

그의 눈이 감겼다.

여백.

눈이 뜨였지만, 세상은 여전히 여러 겹이었다.

잠깐 후에는 눈가의 물기가 없어지며 또렷한 색채와 윤곽이 돌아왔고, 한 쌍의 남녀가 뒷걸음질로 그에게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지나쳐갔다.

점박이로 띄엄띄엄 물들어 있던 콘크리트 바닥에서 땀방울들이 솟구쳐 그의 턱에 붙고, 그의 손등에 문대어진 다음 뺨을 타고 올라가 흡수되었다.

사람들은 다같이 뒷걸음질치며 이상한 발음을 내뱉고, 아이들은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끌어올리는데, 하늘에 붙박인 구름떼만은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이윽고 그도 움직일 순서였다.

그는 이제 널리 대중화된 뒷걸음질로 공원을 방황하다가 자기가 사는 호에 돌아갔다.

얼마 안 되는 층계를 뛰듯이 오르고, 4층에 이르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구겨 신은 신발을 현관을 쑥 자연스레 벗고 거실까지 가서 주위를 한차례 둘러본 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 중앙 아래를 눌렀다 떼자 통화 중이 되었다. 귓가에 가져다 대서, “…도래그 만지겠하해이 건 든힘” 라는 위로를 들은 그는 결근하겠다던 이야기를 도로 주워담았다.

부엌으로 간 그는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씩 토했고, 싱크대에 널부러져 있던 다른 잔을 들어 하수구 속의 내용물을 불러들였다.

가득 차게 된 두 잔을 상에 놓고 스푼을 가져와 휘젓자 새까맣던 색들이 점점 맑아졌다.

정수기로 물을 빨아들이고 뜯어둔 인스턴트 포장을 잔 위에 올렸더니 남아 있던 커피가루들이 중력을 거슬러 제 보금자리를 찾았다.
그는 손목시계를 풀어 경대 위에 두며 지나간 8시를 기념했다.

화장실에서는 몸을 더럽게 만들었고, 주름잡히고 알싸한 냄새가 그득 배어 있는 옷으로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베란다 구석에 쌓여 있는 술병들을 챙겨 거실 바닥에 하나씩 정성스럽게 옮겨둔 다음, 그 난장판 한가운데 드러눕더니 새우처럼 웅크렸다.

곧 그날 잤던 잠마저 되감기기 시작했다.

창밖이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일어난 그는 빈 병들에 술을 게워내고, 게워내고, 게워냈다.

위장을 비울수록 취기는 점차 가셨고, 잔뜩 불거져 있던 피부도 연한 살구색으로 변해갔다.

그의 해장은 태양이 서쪽에서 뜨고 중천에 닿을 무렵까지 끊이지 않았다.

맨정신이 되어서 집밖으로 나선 그는 근처 편의점에 들러 소주를 대량으로 매매하고 카드로 대금을 받았다.

그 길로 후진으로 차를 몰고 정신과에 가서 대기석에 앉아 있다가 진료 접수를 취소하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외출을 위해 입었던 옷차림을 벗어 걸어두고 나서 좌절에 빠진 채 시간을 보내다 넓은 침대에 누웠다.

또 하루가 줄어든다.

그는 잠으로 빠져드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이토록 기나긴 시간을 되돌아온 것은, 그러고도 끝날 기미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음주, 수면, 좌절의 도돌이표.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

망가져 있는 일과를 돌아보면서, 그는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일어나고 있을 일들을 상상해보았다.

어딘가에서는 소각로가 잿더미를 쓰레기로 재생시켜 내뱉고 있을 것이다. 네모지게 압축된 고철덩이는 폐차기를 거쳐 낡은 자동차의 형태로 다시 태어날 것이며, 교실에 모인 수험생들은 답안지에서 필적 확인란의 문구를 지워나갈 것이고, 미사나 의식 같은 것은 죄다 역순이어서 신성모독을 뜻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직장에서 수많은 서류가 한순간에 백지화되고, 공장은 시중에 내놓았던 제품들을 모아 원재료로 가공하며 폐수를 거두어들이고, 강은 하류에서 상류로 흐르고, 새싹들은 땅 아래 줄기를 감추고, 막 핀 꽃봉오리는 여유롭게 입을 다물어가고 있을 터였다.

인부들이 매장한 관짝을 다시 파낸다든가, 중환자실에서 호흡기를 매달고 있는 환자가 갑자기 멎었던 숨을 내쉬기 시작한다든가, 투신했던 몸뚱이가 떠올라 옥상에 안착한다든가 하는 일도, 언젠가 어느 곳에선 반드시 일어나겠지. 그는 생각했다. 그렇잖은가?

온 우주가 그의 사고만 앞쪽을 향하도록 해놓고서는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금방 멈춰서지도 않고 끝도 없이 가고 있었다. 그가 품었던 단 하나의 소망을, 이번에는 이루어주겠다는 듯이.

자신이 밟아온 발자취를 며칠 넘게 되짚어가던 그는, 마침내 그때에 가까이 다다랐다는 것을 알았다.

떠올리는 것조차 아픔이었던 그때의 기억에.

그러나 이제는 똑바로 마주해야만 했다.


구급차 안이었다. 보호자 자격으로 앉아 있는 그는 생명유지장치에 연결된 채 뉘여져 있는 여자를 초조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머리에서 피를 꿀럭였고, 한쪽 팔다리가 뒤틀려 있었다. 심술궂은 아이 손에 맡겨진 장난감 관절인형처럼 엉망이었다.

장치 모니터에 표시되는 그녀의 심박 파동은 조금씩 폭을 넓히는 중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그는 기도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저 선이 평탄해지지 않길, 다른 한편으론 제발 지금, 여기서 끝나버리지만은 않길.

구급차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후진으로 도로를 역주행했고, 그렇게 지나간 길을 양옆으로 물러나 있던 승용차나 트럭들이 역시 후진하면서 다시 채워 놓았다.

구급차가 질주를 멈춘 것은 어떤 건물 앞에서였다. 길가를 다니던 이들의 인파가 주위를 에워싸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구급대원들이 내려 트렁크 문을 열었고 그도 따라 내렸다. 뒤이어 그녀가 기다란 들것에 실려 나왔다.

그가 건물 주위 인도에 조성되어 있는 화단에 무릎 꿇자, 대원들이 그 앞에 조심스레 그녀를 내려놓고는 차로 돌아갔다.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의식이 없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은 채 “?왜” “?왜” 하고 중얼거렸다.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팬지꽃들 한가운데서. “?왜 체대도” 이제 두 번째였지만,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마음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 이전에 있었던 일들도 그는 잘 알았다. 그런 과거는 사라지지 않으므로.

그는 느닷없이 그녀를 내버려두고 뒷달음질로 바로 앞의 건물에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 2층에 이르러 COFFEE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문을 통과해, 그 자신이 있던 자리를 찾았다. 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게 돼 있는 두 의자. 맞닿은 벽면이 통째로 유리였다.

거기 앉은 그는 커다란 창 바깥으로 그녀의 처참한 모습을 순간 내다보았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소란스럽던 카페 안의 누군가가 “…이람사, 사” 하더니 새된 비명을 되삼켰고, 그 뒤로는 거꾸로 된 클래식 음악만 들려왔다.

커피향 속에서 작은 목소리로 잡담을 나누기 시작하는 손님들. 믿기 힘들 정도로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 혼자 차지하고 있는 상에는 두 잔의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의 것은 라떼였고, 반대편에 있는 것은 에스프레소였다. 그녀가 유별나다 싶게 좋아하던……

그는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 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속으론 온갖 생각을 했다. 그녀는 뉴턴을 부정하듯 하늘로 솟구치고 있을까? 부러졌던 뼈가 있어야 할 데로 고정되고, 파열된 장기들이 다시 엉겨 붙고, 그리하여 생기를 찾아 옥상에서 이곳으로 뒷걸음질쳐 올까? 이제 와선 뭐가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는 까닭으로 다퉜던 일을 복기하기 위해서?

카페 문간에 달린 방울이 딸랑였다. 그는 들어오는 그녀의 등판을 보았다.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그녀를. 살아서 자기 발로 움직이고 있는 어여쁜 그녀를.

그는 천천히 일어섰고, 그녀는 그의 면전에까지 와서 휙 돌아서고는 말했다.

“.요어있 잘 .요게볼가……”
“…”
“?죠겠렇그 .죠겠말 고리버어잊 방금 건 은같 나 은신당 ,면지어헤 로대이 .요군로이급취 애린어 도직아 난 테한신당 시역”
“.어굴 럼처끼새애 좀 만그 발제”

그녀가 상에 놓여 있는 손목시계를 가져가 찼다.

“.요네었없 에밖것 런이 국결 건 은받 테한신당 .요게릴드려돌 리미 ,거이 .요어됐”
“.어았않 는지하각생 지까게렇그”
“?죠이뿐 것 는다줬아받 까니오겨앵 록도리질 가내 ,냥그 은신당 ?죠렇그”
“…”
“!요군는않 도지하랑사 를나”

그는 그 자신 말고는 누구도 모르게 오열하고 있었고, 거기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바로 이 순간 세상이 그의 소망을 들어주었다.

그녀가 재차 소리친 것이었다.

똑바로.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군요!”
“사랑해.”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급히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언제까지나 계속 너를 생각했어. 아무리 잊으려 해봐도 잊을 수 없었어.”
“…그럼 안아줘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도 지그시 눈을 감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커피와 팬지꽃 향기가 한데 뒤섞여 어슴푸레 맡아져왔다. 짖궂은 봄날이었다. 짖궂은 운명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영원히 놓지 말아달라는 것처럼 힘을 주고 있던 그녀의 팔이, 스스르 풀려나고 있었다.

“.요줘아안 럼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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