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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치킨 TS 아포칼립스 근터물 5화까지 봐주실 분?

ㅇㅇ4(123.248) 2025.01.28 00:46:51
조회 171 추천 0 댓글 7

사실 근터물이라긴 좀 애매하긴 함


아포칼립스의 천사님!


나, 강림!


귀여움, 확정!


1.


  사이렌 소리 때문에 눈을 떴다. 휴대폰은 미친듯이 재난경보를 울려대고 있었다. 다급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정체불명의 괴생명체가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출현. 시민 여러분께서는.......


  무언가에 방해받은 듯 방송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실제 상황? 그러면 별 수 있나. 장애인인 나는 대피도 못하고 죽겠군.


  냉소하면서 일어나는데 감각이 이상했다. 분명 존재하지 않아야 할 다리의 존재가 느껴졌다. 환상통? 많이 겪어봐서 아는데 그런 게 아니다.


  이불을 팍 날리며 일어난다. 두 다리가 멀쩡하다. 그런데 몸의 다른 부분이 멀쩡하지 않다.


  살짝 나온 가슴? 긴 은발?


  그리고 아랫도리가 허전한데.......


  나는 황급히 일어나 원룸 화장실로 향했다. 다행히 정전이나 단수는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어?


  내 게임 캐릭터와 똑 닮은 소녀였다.


 "뭐, 뭐야?"


  은발 벽안.


  사심이 잔뜩 담긴 '천사'의 외모.


  프릴프릴한 흰 원피스(형상변환한 갑옷이다) 뒤로 순백의 날개가 펼쳐져 있다. 파닥거려 보면 원래 신체의 일부인 듯이 자연스럽다.


  심지어 목에는 컨셉용 물고기 목걸이까지.


  그게 무슨 컨셉이냐고? 이 캐릭터의 이름은 라파엘라. 그리고 라파엘라의 상징은 물고기.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나는 RP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왜 하필 라파엘라냐고? 그야 죽은 누나의 세례명이니까!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죽은 누나 세례명을 캐릭터명으로 지은덴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가톨릭 교리상으론 말도 안 되지만, 어릴 땐 착하게 살다 죽은 사람이 천사가 되는줄 알았다.


  그래서, 어린이(사실 중2때였다)의 동심과 소망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누나가 하느님 곁에서 천사가 되어 살길 바라며.


  지금은 냉담했지만.


  "상태창...?"


  약간 떨떠름한 기분으로 상태창을 말해 본다. 진짜 될지 몰랐는데 눈 앞에 정보가 몇 개 떠오른다.


[상태창]


레벨 47 라파엘라


직업레벨 43(사제)


종족레벨 4(하프 셀레스티얼)


성향: 중립/선(42/100)


능력치


근력 277 내구 248 민첩 151


마력 5 신성 532 신비 224


  ...


  이거 현실인가?


  클리셰대로 볼을 쫙 잡아당겨 본다. 아픈진 모르겠는데 말랑하고 쫀득하다.


  말랑말랑...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굉장히 귀엽다. 이게 지금 내 몸인 것만 빼면!


  "어... 꿈은 아닌 거 같은데."


  나는 가볍게 손을 내밀면서 주문을 외워 본다. 신성 주문 같은 것도 진짜 쓸 수 있나 궁금해서.


  "빛이시여."


  손 위에 진짜 치유의 빛이 생겨난다. 어떻게 했는지 자세힌 몰라도, 원래 알던 지식처럼 자연스럽게 주문이 시전된다.


  ...


  이게 다 뭔 일이지.


  나는 13년 된 노가다 망겜 RPG의 고인물.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게임 지옥에 갇힌 걸까?


  아니, 현실 도피를 하면 안 된다.


  뭔 일인지 몰라도 지금 상황은 확실하다.


  (1) 대한민국엔 난리가 났다.


  (2) 나는 어째선지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3) 그럼 이 상황에 해야 될 일은?


  정답: 생존!


  하지만 생존이 정답이라곤 해도, 나는 딱히 생존주의자 같은 건 아니고.


  만약에 진짜 이 몸이 하프 셀레스티얼의 것이라면, 식량이나 식수도 딱히 필요하지 않다.


  종족레벨 패널티를 감수하며 하프 셀레스티얼을 고른 보람이 있군. 직업레벨은 떨어져도 종특이 워낙 우월하니까.


  허기, 갈증, 피로 없음. 질병과 독 면역.


  높은 주문 저항과 각종 내성, 방어력 추가.


  신성과 신비에 스탯 보너스.


  암흑 시야와 투명한 적에 대한 명중 보정.


  마자막으로 하루에 한 번 천사 소환권.


  아니 잠깐!


  종특 이전에 식량과 식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 사제였지.


  "빛이시여, 저희에게 은혜로운 양식을 내려 주시고, 여기 모인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그러자 빛이 있었다.


  빛은 은혜로운 양식이... 그러니까 물고기 모양 생크림 케이크와 흰우유가 되었다!


  ...인게임에서 내가 착용한 '물빵' 스킨. 설마 이런 것까지 적용되는 거야?


  당황하며 생크림을 찍어먹어 본다. 식사가 필요없는 몸일 텐데도 달콤하고 맛있다.


  "어... 어......."


  이쯤되니 좀 무섭다. 이거 개꿀잼 몰카인가?


  "빛의 이름으로 간구하오니, 미천한 종을 보다 거룩하게 하소서."


  버프도 된다.


  전투 중에 외우기엔 주문이 좀 길지만, 사제를 성기사급으로 싸우게 해주는 개사기 버프.


  거룩한 힘.


  "으... 아?"


  이정도면 대충 마법만 써도 싸울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럼 생존 대신 사람들을 구하러 다녀야 하나?


  라파엘라는 착한 천사니까!


  귀여운 천사 라파엘라! 초절정 미소녀 라파엘라!


  중립 선 RP! 중립 성향은 가끔 바뀌어도 선성향은 항상 100 고정이었다!


  게임과 현실도 구분 못하냐 할 수 있겠지만, 분명.


  누나라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내게 이 게임 캐릭터의 이름으로만 남은 누나.


*


  "어......."


  사람을 구할 생각으로 나왔는데, 바깥은 지독한 안개 속에 있다.


  그 뭐야, 왠지 사이비 말을 잘 듣고 마트 안에 있어야 할 듯한 영화. 그런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


  ...원룸으로 돌아가야 하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군대가 와서 괴물을 와다닥?


  하지만 여기는 대한민국! 미군이 아니라 국군이 온다구요.


  장애인이었던 나는 군대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그리 믿음직한 집단은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주변을 살펴보는데 눈이 마주친다.


  남자.


  멀쩡하게 생긴, 키도 좀 큰, 그래서 왠지 짜증나는 남자.


  나이는 스물둘? 스물넷? 잘 모르겠네. 이 원룸 이웃인 모양이지.


  "저기요."


  "네, 네?"


  "무슨 상황인지 아세요?"


  "아, 아뇨. 그나저나 한국어......."


  "아 이거. 저 원래 한국인이고. 남자예요. 일어나 보니까 이렇게 돼 있던데요."


  남자의 눈빛이 묘해졌다. 나는 귀엽고 깜찍한 라파엘라 모드로 인사했다!


  "라파엘라예요!"


  "그, 김민형입니다. 원래는 한국인이셨다고......."


  "이제부턴 라파엘라니까요!"


  "...어어, 세계 랭킹 2위?"


  민형이란 남자의 눈빛이 더 묘해졌다. 게임 캐릭터가 되더니 과몰입하는 폐인을 보는 눈빛?


  사회적 생명이 경각에 달한 나는 초대형탈룰라를 시전했다! 참고로 기술명은 원래 붙여서 쓴다!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장애인이었어서요. 복지사 분 없이는 일상생활이 힘들다보니... 게임에 좀 과몰입하게 되더라고요."


  라파엘라의 초대형탈룰라! 효과는 굉장했다!


  민형(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역으로 본인의 사회적 라이프가 0이 될뻔한 민형이 뒷수습을 시도했다. 만화라면 삐질삐질이 효과음으로 붙지 않을까?


  "그, 제가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이게 그런 의도가 아니라......."


  "괜찮아요!"


  "그래도 죄송......."


  "라파엘라는 천사니까요!"


  "...?"


  아.


  아아-


  모두가 상처뿐인 세계의 완성인가.


  게임 캐릭터에 과몰입하는 폐인과, 탈룰라 때문에 비난할 수 없는 정상인.


  크흑.


  나는 방금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학생이신 거예요?"


  "예. 요 앞 대학교를 다닙니다. 그럼 라파엘라님은 직업이?"


  "어느 쪽 직업이요? 제 직업은 사제인데."


  "..."


  우왓!


  다시 나왔다! 게임폐인을 보는 정상인의 경멸 가득한 눈빛!


  그렇지만 지금은 게임이 리얼라이프가 되어버렸다구!


  "게임에서의 능력을 쓸 수 있는 모양이라. 이쪽 직업도 알아둘 필요가 있잖아요? 현생에서라면 소설가입니다."


  "아, 소설가요."


  뭐냐.


  저 '저사람 이상한 사람이더니 역시 예술충이었어'와 '소설가라니 직업이 있을줄은 몰랐군'이 교차하는 눈빛은!


  라파엘라는 귀엽잖아요? 좀 더 귀여워해줘야 한다구요.


  나는 속으로만 투덜대며 민형에게 묻는다.


  "참, 민형 씨도 게임 했어요?"


  "네. 확인해봤는데 저도 상태창... 아니 이게 지금 왜 떠. 아무튼 보이더군요. 저는 투사입니다."


  "...투사? 444요?"


  참고로 444란 건 투사 캐릭터의 별명이다.


  마력 4 신성 4 신비 4. 투사의 기본 스탯.


  마력을 제외한 모든 스탯이 필요한 사제와 달리, 그야말로 근내민에 몰빵하는 근육덩어리!


  근육뇌!


  으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


  민형은 대책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


  "아니 이런 상황에 무슨... 에휴, 됐습니다. 겉모습이 멀쩡하시니까 더 황당하네요."


  "멀쩡 정도가 아니라구요! 라파엘라는 천사니까! 초절정 미소녀 라파엘라! 동네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고고한 나르시시스트 미소녀! 아니 이건 설정 붕괴구나!"


  "..."


  역시 외모가 좋긴 좋다.


  지금의 천사 같은 외형이 아니었으면, 컨셉질 작작하라며 욕먹었겠지.


  아니면 초대형탈룰라 덕에 억지로 배려 받거나.


  지금은?


  장난스러운 분위기긴 하지만 민형이 은근슬쩍 내 시선을 피한다. 아무래도 라파엘라는 초절정 미소녀니까.


  파릇파릇한 남자애가 함부로 눈맞추긴 부담스럽겠지. 이 외모로 진짜 소녀인 척했으면... 으흐흐.


  재밌을 거 같긴 한데 실행은 못할 거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현실감을 얻기 위해 라파엘라 RP라도 하는 중이라서.


  민형은 대충 내 행동을 납득했는지 말한다.


  "알겠습니다. 각자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른 거겠죠. 저랑은 달리 모습까지 변하신 모양이니."


  "네. 아마 장애 때문 아닐까요? 장애가 있는 몸으론 싸울 수 없으니까. 사제의 주문은 24시간이 지난 상처에는 효과가 없잖아요?"


  "음.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사실 지금도 뭐가 뭔지......."


  "웹소설에 자주 나오는 상황 아니에요? 게이트! 아포칼립스! 게임 능력 각성!"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원룸 건물 내부를 살펴봤다. 그러고보니 내부가 죽은듯 고요했다.


  나는 불안해져서 민형에게 말한다.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다니요."


  "바깥에 나와본 사람이 저희뿐인 게. 그럼 다른 이웃 분들은......."


  "설마?"


  "확인해보죠."


  나는 민형과 함께 원룸 건물로 들어가 101호의 문을 두드린다. 예상대로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잠깐, 눈빛교환.


  결단을 내린 민형이 힘으로 문짝을 뜯어낸다. 각성한 신체능력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모양이다.


  뜯겨나간 문짝이 덜컹, 하고 떨어진다. 내부는 고요하고 싸늘하다.


  죽음처럼.


2.


  독거노인인 듯한 이웃이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귀를 심장에 대니 박동이 들리지 않았다.


  "돌아가신... 건가요?"


  민형이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라파엘라 컨셉질을 할 순 없다.


  나는 노인의 피부를 짚으며 진지하게 답한다.


  "의사가 아니니 정확힌 모르겠어요. 하지만 심장이 뛰지 않네요. 몸도 차갑고요. 고통의 흔적은 전혀 없으니, 꼭... 질소 중독 같아요."


  "아......."


  "이 안개의 구성성분이, 평범한 사람에겐 고농도의 질소처럼 작용할지도 모르겠어요. 저희는 각성자... 네, 각성자라 할게요. 각성자라 멀쩡하고요."


  라파엘라가 했다기엔 너무 T스러운 대답이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공감능력을 발휘하기보단 움직여야 할 때다. 파릇파릇한 민형 씨는 솔직히 슬슬 한계인 듯하고.


  대학생 남자애치곤 꽤나 현실적인 성격 아닌가 싶다. 보통 이런 상황에 특별한 힘이 생기면 좋아하지 않나?


  아니, 내가 너무 게임 폐인 소설가 기준으로 생각하는 건가.


  나는 조용하게 민형을 부른다.


  "민형 씨."


  "네."


  "물은 아직 나오나요? 전기는 들어오는데요."


  화장실로 향한 민형이 수도를 튼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나오면서 챙긴 스마트폰 화면을 본다. 역시 신호가 터지지 않는다. 그런데 배터리가 72퍼센트에서 멈춘 그대로였다.


  단순히 자주 확인하지 않아서? 그건 아니다. 한동안 꽤 오래 뒤적였으니까 1퍼센트 정도는 닳았어야 한다.


  이 공간자체가 이상하다. 상식적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단순히 단수, 정전이 없는 정도의 문제가 아닐 거다.


  나는 민형을 다시 한 번 부른다.


  "민형 씨."


  "예."


  "이 안개, 아무래도 이상하네요. 통신은 안 터지는데 수도랑 전기는 멀쩡하고. 아까부터 휴대폰 배터리가 전혀 닳지 않았어요. 지금부터는 상식을 좀 내려놓아야 할지도 몰라요."


  "...알겠습니다."


  "너무 긴장하진 마시구요. 아마 생존자... 그러니까 각성자는 저희뿐일 것 같고. 좀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일단 이웃 분들의 장례부터 치러 드리죠."


  "그래도 될까요?"


  "사실 확신은 없어요. 그렇지만 인간의 존엄이란 게 있으니까."


  "..."


  "안개 바깥도 불안정한 상황인 듯하니, 저희 선에서라도 이분들을 배웅해드려야 할 거 같아요."


  민형은... 민형의 표정이 사뭇 굳는다. 좀 엉뚱하게도 나는 우스운 상상을 해버린다.


  '이 인간 왜 은근 상식적이야' 같은 반응을 기대했는데. 고인을 앞에 두고 그걸 기대하는 시점에서 상식인은 아닌가?


  아무튼 좋다. 나는 멀쩡한 척하는 법은 잘 알고 있다. 돌아가신 분의 시신 앞에 앉아 가볍게 기도한다. 그냥 알고 있는 기도 중 상황에 맞을 만한 것을 골라, 살짝 바꿔서.


  "언제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하느님. 오늘 이 세상을 떠난 이웃을 기억하시어, 사탄의 손에 넘기지 마시고, 거룩한 천사들에게 고향 낙원으로 데려가게 하소서.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자녀되어 살았사오니, 지옥벌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기도를 마친 나는 어두운 수건 한 장을 가져와 시신의 얼굴을 덮는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까. 민형을 살짝 돌아보니 그가 묻는다.


  "크리스천이신가요?"


  "글쎄요. 냉담 중이긴 한데, 표할줄 아는 예의가 이것뿐이라서요."


  "..."


  어쨌든, 외형만은 천사인 소녀가 시신앞에서 기도하는 것.


  그럭저럭 거룩한 인상은 심어줬을 것이다. 아마 편안해질 법한 모습이기도 했겠지. 민형의 표정이 조금 풀린 걸 느낀다.


  그가 내게 조심스레 묻는다.


  "부모님이 걱정되진 않으십니까?"


  "어... 저는 두 분 다 돌아가셔서."


  ...


  잠깐, 침묵.


  아니 저희 분위기 좋았잖아요!


  이번 건 맹세코 내가 의도한 탈룰라가 아니다!


  그러나 일단 탈룰라가 되어버린 이상 끝까지 말해야 한다! 괜히 애매한 함정 포인트를 남겨두긴 싫으니까!


  "저... 사고였어요. 가족여행이었는데, 부모님이랑 누나가... 저는 장애를 얻은 몸이 됐구요."


  ...


  분위기가 무슨 장례식장처럼 변했다. 민형은 아주 진지하면서도 곤란한 듯한 얼굴이다. 그걸 보니 더 말하기 두렵지만 그래도 끝은 내야지.


  "오래 전 일이라 이젠 괜찮아요. 좋든 싫든... 그 사고가 저라는 사람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애증 같은 기억이죠."


  민형은 뭔가 말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공감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려 애쓴다.


  사실 별로 괜찮진 않다. 잘려나간 다리의 환상통은 계속 나를 괴롭혔고, 피투성이가 된 누나의 시체는 아직도 종종 악몽에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라파엘라니까.


  어쩌면 대한민국의 희망일지도 모르는! 절세가련 미소녀 라파엘라!


  최강 사제 라파엘라!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괜찮은 척을 해야만 했다.


  민형을 위해서도.


*


  시신들을 수습하고 매장하는 데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그사이 나에 대한 민형의 인상이 많이 변한 모양이었다.


  마이페이스 컨셉충에서, 진지할 때는 진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민형을 배려한 연기다. 나는 친사회적인 마이페이스 컨셉충이거든.


  누나가 아닌 사람이 얼마나 죽든, 딱히 내 알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곁에 있는 산 자를 위해 고인에게 예의를 표한다.


  오랫 동안,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라파엘라라는 캐릭터는, 뭐랄까.


  그런 내가 만들어낸 이상이다.


  정답지가 뭔지 고민하지 않아도, 항상 올바른 일을 해내는 고고하고 아름다운 영웅.


  나처럼 사회성을 시뮬레이트할 필요가 없는 천사.


  이제 그 안에 들어가버린 게 나였지만.


  나는 상념을 끝내고 묻는다.


  "민형 씨, 배고프죠?"


  "괜찮... 아니, 좀 고프네요."


  "그쵸. 라파엘라는 미소녀라 화장실도 안 가고 밥도 안 먹어도 되지만, 민형 씨는 아니니까요."


  "..."


  이정도 농담을 할 여력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내 판단이 잘못된 걸까? 민형은 좀 지친 듯한 눈빛을 한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나는 주문을 외운다. 라파엘라 특제 물빵을 만들어내는 주문.


  "빛이시여, 저희에게 은혜로운 양식을 내려 주시고, 여기 모인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오늘 하루 종일 천주교식 기도를 하고, 바로 이교의 신에게 기도하니 좀 멋쩍긴 한데. 둘이 은근 비슷하니까. 주문 번역도 천주교 스타일로 됐고.


  아무튼 물빵이 나온다. 상콤하고 귀여운 물고기 모양 케이크와 흰우유.


  라파엘라랑 잘 어울리지 않나요? 그야 물고기니까!


  물고기!


  성 라파엘의 상징!


  신성으로 된 1회용 접시와 포크까지 나오는 배려심 넘치는 주문!


  물론 천사의 상징인 것과는 상관 없이, 인게임에서 피로 회복 효과가 있으니 민형에게 주는 거다.


  나는 상식적인 사람이라구.


  상식적인 척을 잘하는 사람.


  물빵을 받아든 민형이 잠깐 주저하다 먹었다. 디저트 취향이 아닌지 뭐랄까, 너무 달다는 표정이었지만.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상황이긴 하지. 나는 민형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묻는다.


  "민형 씨?"


  "예."


  "같이 기도하실래요?"


  "..."


  우리는 원룸 바로 앞의 공터에 시신을 매장했다. 거기 너머는 안개가 너무 짙어 나가기가 망설여졌으니.


  원래는 다른 건물이 있던 장소인데 우리 원룸을 빼면 싹 다 사라져 있더라.


  조금 머뭇거리던 민형이 내 곁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둘이서 함께 만든 작은 공동묘지를 본다.


  기껏해야, 시체를 파묻고 주문으로 만든 꽃 한송이를 두었을 뿐이지만. 신원은 모두 확인해뒀으니 사태가 진정된 다음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민형에게 조심히 말한다.


  "특정 종교에 거부감이 있으시다면, 굳이 안 하셔도 돼요."


  "아뇨, 아닙니다. 그런 건 없어요. 다만 잘 모르다보니......."


  "그러면... 이건 호칭기도라고 하는 거거든요. 원래부터 장례식 때 하는 건데, 뭔가 종교적인 의미라기보단 그냥 예의라 생각해주세요. 제가 아는 예의가 이것뿐이라."


  "알겠습니다."


  나는 민형에게 기도의 대략적인 형식을 알려준다. 그다음 민형의 스마트폰에 기도문 내용을 적어주고.


  민형이 준비 됐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선창하고 민형의 답사가 이어진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모 마리아와 삼대 천사와 세례자 요한과 성 요셉... 열두 사도와 순교자와 성스러운 선조와 다른 모든 성인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그토록 많은 이들의 이름을 거쳐 기도의 끝에 도달한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기도를 마치고 나자 민형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 있다. 그는 멋쩍은지 갑작스런 말을 하며 분위기를 돌린다.


  "이렇게 긴 기도를, 외우고 계시네요."


  "아, 완전 외운 건 아니고. 빼먹은 성인도 많을 거예요. 원래는 꽤 독실한 집안이었다보니......."


  가정사가 언급되자 민형은 정말로 눈물을 보인다. 당황스러운 반응이지만 그럴 법하다.


  지금 내 모습은 정말로 사랑스러운 미소녀 라파엘라. 본모습이 어쨌든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그냥 천사미소녀일 뿐이다.


  그런 미소녀가 가족도 없이 살면서, 죽은 이웃을 위해 예를 다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좀 감동적으로 비치긴 하겠지.


  아니면 거룩하거나.


  나는 딱히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다 라파엘라의 외모빨이야.


  암암.


  거룩한 미소녀 라파엘라!


  진짜 천사님! 옆집 천사님!


  하지만 옆집 천사님처럼 내조타락시킬 능력은 없어! 장애인의 소수자성을 주장하겠다! 다리 없었음! 가사 능력 무!


  불쌍한 미소녀 라파엘라!


  불쌍한 천사미소녀는 집안일따윈 안 한다네!


3.


  안개 속에서도 밤이 왔다. 나는 민형과 함께 원룸 복도를 산책했다.


  민형 왈: 따로 떨어지긴 불안하고,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 모습인 분과 한 방에 들어가긴 좀.......


  이라는 애매한 타협의 결과.


  민형이라는 이 사람, 꽤 선량한 소시민이구나.


  이런 상황에 그런 거나 신경쓰고 있다니.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 쪽이 좋아 보이긴 한다.


  하프 셀레스티얼은 안 자고 버틸 수 있는 종족이니까. 아무래도 내가 민형을 지켜야겠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것들'이 찾아왔다.


  심연충.


  심연균열에 서식하는 불규칙적인 벌레 형태의 몬스터.


  사악한 존재로 분류되기 때문에, 턴 언데드쪽 특성 몇 개를 찍었으면 터닝이 가능하다.


  위력은 진짜 언데드에 대한 터닝보다 약화되지만, 라파엘라는 초고렙이니까!


  "빛의 이름으로!"


  전투라기보다는 그냥 대규모 터닝이 이어졌다. 사기캐인 사제는 상성몹에 대한 양학도 사기다.


  이런저런 제약이 많아 독보적인 인기까진 못 누렸지만. 사제로 악한 행동을 계속하면 레벨이 다운된다는, 노가다 RPG에선 말도 안 되는 패널티 때문에.


  막상 동레벨 던전에선 그냥 좀 튼튼한 힐셔틀이기도 하고. 자버프나 공격주문에 자원을 낭비하면 트롤이랄까? 그렇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솔플 유저들이 사제를 선호했다.


  나는 심연충 무리가 달려들 때마다 턴 언데드를 사용한다. 레벨 차이가 많이 나니 그 끔찍한 벌레들은 가루가 되었다.


  있어선 안 될 부분에 사지와 날개가 돋아나있는 거대 갑충들.


  으으.


  라파엘라는 이런 거 싫어요.


  귀여운 물고기가 좋아요.


  민형은 어정쩡하게 서서 내 싸움을 구경했다. 아무래도 근접 클래스인만큼 실전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당장은 무기가 없기도 하고.


  대충 심연충 웨이브가 마무리된 다음, 우리는 계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형이 머쓱한듯 내게 사과해온다.


  "죄송합니다. 별 도움이 안 됐네요."


  "어쩔 수 없죠. 저야 사기캐인 사제라 딸깍이 되지만, 444는 직접 싸워야 하니까."


  "...휴. 저도 법사나 할 걸 그랬어요."


  "그러게요. 이런 상황이면 확실히 법뻔뻔이나 사제가 좋겠네요. 날먹이 되니까. 무기빨도 덜 받고."


  끄덕끄덕 민형에게 동의를 표한 귀여운 라파엘라! 나는 말을 이었다.


  "참, 이제 라파엘라는 알겠어요!"


  "무엇을요?"


  "여긴 아마 심연균열일 거예요! 아까 본 몹들도 그랬고."


  "심연균열?"


  민형은 게임을 해봤다면서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오래된 RPG인만큼 워낙 지역이나 컨텐츠가 많아, 사소한 것 하나하나는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므로 라파엘라의 무례한 질문!


  "실례지만, 레벨이?"


  "23이요."


  오.


  생각보다 높다.


  이 노가다 망겜 RPG는 레벨업이 지독하게 어려우니까. 23이면 가볍게 하는 일반인치곤 높은 편이다.


  47인 나는?


  폐인 미소녀 라파엘라!


  끄덕끄덕 라파엘라!


  나는 모를 만하다는 투로 말했다.


  "23이면... 초창기부터 하셨을 레벨은 아니고, 굳이 이쪽 루트로 레벨업하신 게 아닌 이상 처음이겠네요."


  “예. 애초에 접은지 좀 된 게임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고요."


  "으음."


  나는 알고 있는 내용을 정리해서 민형에게 전달했다. 심연균열은 이차원과 연결되는 컨셉의 던전 중 하나.


  테마가 무작위하고,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몹으로 나오는 것은 대부분 심연충. 가끔은 판데모니엄의 존재들.


  평범한 사람을 질식사시키는 안개라거나, 수도와 전기가 계속 지속되는 것. 휴대폰의 배터리가 닳지 않는 것 등이 이상현상인 모양이다.


  나는 약간 풀죽은 척하며 말한다.


  "안타깝게 됐네요."


  "안타깝다니요?"


  "돌아가신 분들이요. 여기가 심연균열이면, 아마 시신은 수습할 수 없을 거예요."


  "아......."


  민형 역시 잠깐 묵념한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좀 더 급한 문제에 대한 화두를 꺼낸다.


  "그리고... 나가는 법을 알긴 하는데요."


  "예."


  "다른 균열형 던전과 달리 심연 탈출은 심부로 들어가야 해요. 핵이 있는 곳 근처에서 출구가 무작위 생성되거든요. 계속 걸어나가다보면 심부에 도달하게 되어 있어요. 할 수 있겠죠?"


  민형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걱정 마세요!"


  "...?"


  "귀여운 라파엘라!"


  양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면서 얼굴에 가져다댄다. 아무튼 귀여운 천사미소녀가 귀여운 포즈를 취했다.


  황당해하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민형에게 내가 말한다.


  "라파엘라는 강하니까! 심연 정도는 동네 놀이터예요!"


  "...3인칭으로 말씀하시니까 신뢰가 안 가는데요."


  지극히 상식인다운 민형의 발언!


  상식은 묵살한다!


  진지하게 상식이 도움될 만한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게임 지식이 더 유용하겠지.


  아무튼 상황판단이 완료됐으니 나는 민형과 함께 원룸을 떠난다. 미지의 안개일 때나 두려운 거지, 게임적인 공간이란 걸 알게 되자 마음이 편하다.


  아쉬운 건 성검이 없어서 근접 전투가 될지 모르겠단 건데, 통상적인 수준이면 턴 언데드와 주문만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안개 속으로 깊게 들어가면서 나는 민형에게 속삭인다.


  "민형 씨?"


  "예."


  "다크 비전 있어요?"


  "아뇨. 대신 블라인드 파이트 특성은 찍었습니다. 작동한다면 밤이어도 적의 기척은 느낄 수 있겠네요."


  "오. 좋아요. 블라인드 파이트! 많이들 찍는 특성이죠. 그럼 굳이 조명 주문은 안 써도 되겠네요."


  ...


  이런 능력을 들으니 확실히 초인이 된 상황인가 싶다. 시각장애인도 아니면서 눈을 가린 채 싸울 수 있는 능력이라니.


  안개 초입에서는 심연충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 간간이 조우하는 무리마다 턴 언데드를 써주면 깔끔한 양학.


  어차피 동레벨로 가면 적들이 턴 언데드 내성을 기본 장착해서, 어디까지나 양학에만 최적화된 기술이긴 하다.


  그렇게 점차 안개의 심부로 나아가자 다른 괴물이 보인다.


  움직이는 갑옷. 리빙 아머 세 마리.


  원랜 판데모니엄에 나오는 몹 중 하난데, 가끔은 심연에도 출현하는 녀석이다.


  출신상 턴 언데드는 안먹히는 녀석이지만... 고레벨 사제는 그럭저럭 주문딜도 나오니까.


  "빛이시여, 임하소서."


  내가 사용한 주문은 태양 작열.


  언데드, 그리고 판데모니엄이나 심연 계열의 적들에게 추가 대미지가 있다.


  밤의 안개 사이로 강렬한 섬광 한 줄기가 내리꽂힌다. 와, 게임에서 보던 거랑은 위력이 차원이 다른데?


  이정도면 사람도 녹여버릴 거 같다.


  역시 라파엘라!


  절세가련의 초강력 미소녀!


  리빙 아머를 쓰러뜨리자 진짜 게임처럼 무기를 남긴다. 갑옷은 녹아 사라졌으면서 칼은 왜 남는 거야?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태양 작열에 내성이 있나?


  당연히 별로 대단한 무기들은 아니다. 그냥 잡몹이 들고 다니는 종류의 검. 딱 최소한의 마법적 처리만 된 내구성 중심의 무기다.


  하지만 무장 판정을 받는 것과 아닌 것은 전투력이 다르다. 게임상의 판정이니까 현실에서는 다를 수도 있지만.


  나는 검 한 자루를 쥐고 다른 한 자루를 민형에게 넘겨준다.


  "라파엘라는 유능해요!"


  "...이 타이밍에 갑자기 자뻑을 하시는 것만 빼면요."


  "큼큼. 아무튼 민형 씨."


  "예."


  "이제부터 험한 세상일 텐데, 민형 씨도 싸워봐야 하지 않겠어요?"


  "..."


  대답이 없다. 아마도 용기가 필요한 거겠지. 진짜 싸울 수 있다는 용기.


  나는 그의 기분에 맞춰 진지하게 말한다.


  "민형 씨. 버프는 걸어드릴게요. 그리고 정말 위험하면 어떻게든 구해드릴 테니까."


  "...배려 감사합니다. 정말 행운이네요. 라파엘라 님같이 강한 분께 보호받으며 첫 전투를 치를 수 있는 건."


  "읏, 칭찬해도 뭐 안 떨어져요! 물고기 케이크는 드릴 수 있지만!"


  나는 민형에게 버프 몇 가지를 중첩한다. 축복, 성역, 악으로부터의 보호, 상급 마법의 무기, 전투의 파도, 기타 등등.


  나한테 필요한 버프는 셋.


  거룩한 힘, 성스러운 검(위 둘은 자버프라 남한텐 못준다), 상급 마법의 무기.


  나머진 중첩해봐야 거룩한 힘 하나에 다 묻혀서.


  성스러운 검을 시전하자 리빙 아머의 검이 광선검처럼 타오른다.


  와! 불칼!


  라파엘라 케루빔 모드! 풀파워!


  사실 풀파워는 진짜 성검을 들어야 하지만.


  아무튼 RP를 중요시하는 나로서는 몹시 마음에 든다. 전투 모드의 천사는 역시 불칼을 들어야 해!


  민형은 불타는 검을 든 나를 약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러고 있으니 진짜 신화 속의 천사 같아 보이겠지.


  온전한 천족은 아니고 하프 셀레스티얼이라 헤일로가 없는 게 아쉽네.


  헤일로 없는 라파엘라! 절반 천사 라파엘라!


  그래도 귀엽죠!


  나 역시 근접전을 상정한 만큼 좀 떨린다. 턴 언데드나 태양 작열은 그냥 게임하는 기분으로 썼지만.


  불칼의 빛에 어그로가 끌린 건지 곧 심연충 무리가 달려든다. 나는 심호흡을 한 다음 한 발을 앞으로 내뻗고, 마치-


  진짜 13년간 죽음의 위기를 넘겨온 고레벨 사제인 것처럼, 몸이 움직인다.


  인간형 적과 다른 심연충의 특징. 그러므로 이것은 괴물을 죽이기 위한 검이다. 검으로 괴수를 상대하는 데 가장 특화된 움직임.


  몸이 자동으로 최선의 수를 계산하며 심연충을 베어넘긴다. 아니, 자동이라기보단 오래 숙련된 장인의 몸짓 같다.


  작열하는 성검이 심연충의 몸을 가른다. 기괴한 살덩이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난다.


  순식간에 정리되는 전투 상황. 그래도 첫 실전인지라 머리가 새햐앟게 질린다.


  우리 선량한 소시민 민형 씨는 더 질려버린 모양이다. 나처럼 심연충들을 압도적으로 베어버리고도, 뭔가 두려웠는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는다.


  민형이 거친 숨을 내쉰다.


  "하아, 하아......."


  "괜찮으세요?"


  "괜찮, 헉, 습니다. 어떻게든 하긴 했는데, 아니, 솔직히 쉽게 했는데, 그래도 막상......."


  "괜찮아요.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사람만한 벌레떼와 싸운 거예요."


  "하, 위로, 감사합니다......."


  나는 민형을 일으켜주며 방금 전투를 복기한다. 무적의 미소녀 라파엘라! 라고 하고 싶지만.


  이 몸의 스펙과 전투경험을, 아직 자아가 따라가지 못했다는 인상이 든다. 그러니까... 근접전에 들어가는 순간 몸의 스펙이 나를 압도하는 느낌. 몸에 끌려간다? 몸에 익은 전투에 압도당한다?


  이걸 극복하고, 성검까지 들어야, 그때 풀파워 라파엘라가 되는 건가.


  라파엘라 케루빔 모드 초궁극체!


  뭔가 디X몬스러운 작명센스지만, 마음에 든다!


4.


  그 뒤로도 전투가 반복됐지만, 처음만큼의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통상적인 심연 균열의 레벨대는 13정도. 보통은 높아봐야 20이다. 제일 위험한 균열이 권장레벨 26이었던가?


  26짜리만 아니라면, 23레벨인 민형에게도 큰 위협은 못 된다.


  23이면 어느 정도의 강함이냐고? 글쎄.


  13년간 게임이 미쳐돌아가서 그렇지, 첫 출시 때 만렙은 15였다. 그리고 15레벨이면 일국의 용사 수준.


  20레벨부턴 단신으로 나라 하나와 싸울 수 있고, 30부터는 반신급이다.


  47은... 13년간 운영한 고인물 게임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레벨이란 거지. 원래라면 설정상의 존재들한테나 붙어 있어야 할 레벨이다.


  다른 차원을 한 번 파멸시킨 악마라거나, 가장 오래 산 드래곤이라거나, 봉인된 흡혈공주라거나.......


  그리고 장기간 운영된 만큼 플레이어 캐릭터는 진짜 저런 것들을 쓰러뜨렸다.


  나, 라파엘라.


  세계를 구한 미소녀!


  아아, 이몸 말인가?


  취미로 '구원자'를 하는 사람이다.


  아니 천사!


  취미: 구원자!


  종족: 하프 셀레스티얼!


  혼자 자뻑하고 있자 민형이 말을 건다. 침착과 자신감을 꽤나 되찾은 목소리다.


  "라파엘라 님?"


  "넹! 라파엘라예요!"


  "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긴장하지 말라고 계속 농담해주시는 것도, 같이 애도해주신 것도, 실전을 경험하게 해주신 것도......."


  "으음. 그건 그냥 라파엘라가 미소녀라 그래요! 시커먼 아저씨가 그랬으면 짜증만 났을 걸요!"


  "하하... 겸손하시네요. 나가서는 뭘 하실 생각인가요?"


  "일단, 사람을 돕고 싶어요."


  "...왜죠?"


  "솔직히, 절세가련 미소녀니 어쩌니 하지만... 자격 없이 얻은 힘이니까요. 그냥 특정 게임을 오래 했단 이유만으로 초인이 된다? 부조리하지 않나요?"


  "부조리한 일이죠."


  "네. 부조리한 일. 부조리한 세상. 저는 그런 게 싫고, 이젠 조금이라도 바꿀 힘이 있으니까... 라고. 아마 제 누나라면 그렇게 말할 거예요."


  "..."


  죽은 누나 이야기가 나오자 민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사실 선이니 착함이니 하는 가치를 별로 믿지 않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도 못하지만.


  누나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내 삶은 누나에게 받은 것이니까.


  그건 그저- 죽은 누군가를 멋대로 이상화하고 동경할 뿐인 고집일지라도.


  그 고집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나은 길로 이끌어주었다.


  그러니, 부조리한 힘을 얻었어도.


  나는 누나를 위해 살 것이다.


*


  핵의 위치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감지 마법 같은 걸 쓴 건 아니고(심연에선 대체로 소용없다), 심연충의 밀도가 높아지는 걸로 알게 된다.


  그리고 등장하는 보스급 무리.


  특수능력을 가진 심연충과, 강력한 판데모니엄의 악마 조합.


  유감스럽게도 턴 언데드 범위에 판데모니엄의 존재는 포함되지 않는다. 일종의 특수한 보호라 특성으로도 안 된다던가.


  심연충은 유틸 몰빵 타입. 정지 마법, 독, 질병따위를 거는 놈들이다.


  악마는 별다른 템플릿이 없어 보이는 발로르. 레벨 20짜리 악마고 일반적으론 최강의 악마다.


  이 게임이 레벨인플레에 미쳐버린 게임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민형이 상대하기엔 좀 위험할 수도 있는데 요즘엔 그냥 잡몹 취급이다.


  크흑.


  발로르!


  한 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악마!


  하지만 이젠 잡몹이죠.


  강함 이전에 무기를 뺏을 생각으로 싱글벙글이다. 발로르답게 제대로 된 마법 무기가 있으니까.


  통상 무장인 마법검과 불타는 채찍 한 세트. 강력한 효과는 없지만 일단 튼튼하다!


  최신 메타의 장비에 비하면 잡템이지만, 없는 것과 있는 것은 천지차이!


  사랑스러운 미소녀 라파엘라!


  정의의 이름으로 발로르를 약탈하겠어요!


  "민형 씨, 잠깐 빠져요!"


  아무튼 전투가 개시되는 순간 나는 턴 언데드부터 건다. 일단 뒤에 있는 귀찮은 심연충은 삭제. 발악하듯 자폭기 디버프를 날리지만 내가 누구?


  47레벨 하프 셀레스티얼 사제! 내성굴림을 굴릴 필요도 없이 그냥 무시한다!


  발로르가 어마무시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육박해온다. 그러나 내 성검의 맞수가 되진 못하지.


  나는 정교하게 움직여 발로르의 양팔을 절단한다. 성검...은 아니고 성검 버프를 받은 칼날로 슉슉.


  무기가 손에 들려 있는 상태로 죽이면 폭발하거든. 인게임에선 신체절단이 없으니 발로르를 잡아도 무기를 못 건진다.


  시세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용도! 픽픽 죽는 잡몹이 애매한 성능이긴 해도 마법무기를 주면 안 되니까!


  양팔을 절단한 다음 목에 깔끔하게 한 방. 그리고 확인사살로 신성 주문을 외운다.


  "빛이시여, 임하소서!"


  이번에도 태양 작열.


  악마 계통의 적이라면 제일 무난한 선택이다.


  나는 리빙아머의 엉성한 마법검을 버리고 발로르의 롱소드를 빼앗는다.


  불타는 채찍은... 좋아. 인게임에서처럼 화염 인챈트를 ON/OFF할 수 있다. 어떻게 되는진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되네.


  나는 뒤에서 구경 중인 민형을 부른다.


  "민형 씨!"


  "옙."


  "그러고보니 특화 무기가 뭐예요?"


  "롱소드입니다. 제일 구하기 쉬우니까요. 시중에 좋은 매물도 많았고."


  "음...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채찍은 제가 쓰는 걸로 하고, 롱소드쪽을 민형 씨한테 드리죠. 저도 롱소드 특화긴 한데, 사제는 비특화 무기 손해를 적게 보니까요. 채찍이면 숙련작도 찍혀 있고."


  "예?"


  "받으세요. 형태가 리빙아머의 것과는 좀 다르지만, 23레벨 캐릭터면 이미 탈인간이니까. 탈인간 수준으로 다룰 수 있겠죠."


  발로르가 남긴 제대로 된 마법검은 민형에게 건넨다. 나는 사제니까 버프빨로 어떻게든 싸우는데, 민형은 다르다. 제대로 된 마법검 한 자루 없는 건 너무 불리한 조건이다.


  투사는 무기빨을 심하게 타거든. 자기보다 약한 잡몹이야 평범한 칼로도 녹이겠지만.


  아... 물론 게임에서의 기준이니까, 현실에서는 또 다를지도.


  민형은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내게 말한다.


  "그, 라파엘라 님?"


  "네."


  "오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런 것까지 받긴......."


  "아뇨."


  "..."


  "저도 민형 씨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나는 그렇게 외치며 싱긋 웃는다. 이건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라 진실.


  라파엘라 모드로 말을 이어간다.


  "가련한 미소녀 라파엘라! 혼자서는 외로웠을 거랍니다!"


  "..."


  "민형 씨가 없었다면, 저도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감사를 전한 다음 균열의 핵을 바라본다. 이걸 망가뜨리면 더이상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민형이 있어서 심심하지 않았지. 외롭지 않았고, 괴롭지 않았다.


  "빛이시여, 임하소서!"


  태양 작열로 균열핵을 파괴한다. 곧 근처에 뚫린 현실로의 관문이 보인다.


  그곳에 손을 뻗자 빛이 있었다.


*


  ...


  엉망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정도일 줄은.


  온갖 괴물이 거리 위로 날뛰는 중이다. 도시는 불타고 있고, 망가져 있고, 자동차가 폭발한다.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아예, 다른 종류의 괴수들끼리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상황이네.


  방금 빠져나온 균열의 심연/판데모니엄 컨셉과, 늪지대 컨셉의 괴수들이 뒤섞인 채 서로 부딪혔다.


  이런 상황이면 하나하나 괴수를 죽이는 것보단...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주요 목표는 늪지대쪽 균열핵의 파괴. 다음은 대규모 파괴가 가능한 괴수의 배제. 또 생존자 보호.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해.


  나는 곁에 서 있는 민형에게 말한다.


  "민형 씨."


  "예."


  "급박한 상황이니 부탁 하나만 할게요. 피곤하실 텐데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상황에 편히 잘 수야 없겠죠."


  "네, 고마워요. 그러면... 민형 씨가 생존자 분들을 좀 지켜 주실래요?"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라파엘라 님처럼 랭커는 아니라서."


  "으음... 돌아다니는 적들의 수준을 보면 그리 위험한 녀석은 없을 거예요. 저도 함께 지켜드리고 싶은데... 먼저 균열을 닫으러 갈 생각이거든요."


  나는 우선 생존자들의 위치를 파악하기로 한다. 생명체 탐지 주문.


  "빛이시여, 드러내소서!"


  47레벨 사제의 주문인 만큼 범위는 어마어마하다. 괴수와 사람을 구별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


  유독 생명체가 많이 모여 있는 장소가 있다. 사라지지 않는 걸로 봐서는 싸움은 없음. 아마도 지하철인가?


  균열 내에서 시간이 꽤 흘렀으니, 군부대가 지하철에 대피한 시민들을 보호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민형을 다급하게 부른다.


  "민형 씨!"


  "예."


  "지하철에 생존자 캠프가 있는 거 같아요. 살펴본 바로는 당장 살육이 일어나진 않으니, 일단 같이 가보시죠. 상태가 괜찮으면 전 균열을 닫으러 떠날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화한 뒤 나는 민형을 안아든 채 날개를 펼친다. 그는 좀 당황한 모양이지만 이내 납득한 듯하다. 하프 셀레스티얼은 날 수 있으니까.


  소녀의 몸으로 성인 남성을 안으려니 무게중심이라거나 여러모로 불편한데! 하지만 해낸다!


  나도 초인! 민형도 초인!


  이정도는 견딜 수 있어!


  사실 그냥 힘으로 억지써서 안는 쪽에 가깝지만!


  펄럭, 하고 날개가 움직인다.


  그리고, 날개로 비행하는 거라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날아오른다.


  아아!


  게임할 땐 어차피 날탈이 있으니 쓸데도 없던 기능인데!


  현실이 되니 엄청 유용하다!


  라파엘라!


  유용한 라파엘라!


  만세!


  나는 순식간에 날아서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한다. 어째 품에 안긴 민형은 부끄러움 반, 공포 반인 거 같다? 아니 공포가 더 큰 거 같다?


  승차감이... 그렇게 안 좋았나...!?


  슬픈 라파엘라.


  라파엘라, 생각보다 유용하지 않음.


5.


  근처를 둘러보면 지하철 진입을 망설이던 괴수들이 적의를 드러낸다.


  확실히 이 아래는 생존자 캠프인가? 지성은 없어도 본성은 있는 괴수들. 아래에 위험한 존재가 있다면 진입을 망설일 법하다.


  학습능력이 아예 없지는 않달까.


  그와 별개로 나한테 덤비려는 걸 보면, 특별히 위험을 직감하는 능력은 가지지 못한 듯하고.


  하나하나 상대할 시간은 없다. 나는 일단 턴 언데드로 심연충 쪽을 쓸어버리고, 소수 섞여 있던 늪지대계 괴수를 정리한다.


  성검 버프를 받은 불타는 채찍은, 마치 늘어나는 광선검처럼 깔끔하게 적들을 절단! 양학에는 롱소드보다 훨씬 좋은 거 같은데?


  그래도 나는 검이 좋다. 천사는 역시 롱소드! 불타는 검!


  그 와중에 민형도 나름대로 전선에 가담해, 거대한 나무형 괴수의 촉수 다발을 잘라낸다.


  오!


  좋은 노력이에요!


  기쁜 라파엘라!


  파닥파닥 라파엘라!


  나는 마지막 괴수를 해치운 뒤 빙그르르 돌면서 박수친다. 채찍이 잘못 튀지 않게 조심하면서!


  "라파엘라는 기뻐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내려가보죠. 혹시 발포당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주시고."


  "발포요?"


  "이 지경인데 뒤늦게 살아남아, 지하철로 합류하는 사람이 있을 거 같진 않네요."


  "과연......."


  지하철을 내려가자 당연하게도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다. 바리케이드 앞에도 심연충 몇 마리가 있어 턴 언데드.


  잡다한 가구와 물건이 쌓인 바리케이드... 부수는 건 간단하겠지만, 그래서야 민폐가 아닌가.


  공간도약 계열의 주문을 쓰기엔 바칠 보석이 없다. 사제는 전이술을 쓰려면 권능 단계의 주문으로 부탁해야 해서, 음.


  긴급상황이니 보석이 아깝진 않은데, 없으니까!


  주문으로 큰 목소리를 외쳐볼까? 그랬다간 괜히 다른 괴수만 불러들일 것 같은데.


  한참 고민한 나는 결국 해답을 찾아낸다. 소형화 주문!


  나는 민형과 함께 소형화해서 바리케이드의 작은 틈새를 넘어선다. 게임에서는 소형화하더라도 전투력이 그리 깎이지 않는데, 현실이라면?


  엄청 깎이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바리케이드를 넘자마자 바로 해제.


  거대화 주문에 비하면 코스트가 많이 낮아서 막 써도 괜찮다.


  그렇게 개찰구가 보이는 위치까지 나아가자... 잔뜩 긴장한 군인들이 우리쪽을 향해 총을 겨눴다.


  실제로 발포가 일어나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랄까. 아마 내 능력이면 총알이 문제는 안 될 텐데, 민형 쪽의 멘탈이 좀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사격 대상이 되는 경험이 썩 유쾌하진 않을 거라. 라파엘라는 민형 씨가 지금처럼 선량하게 남기를 바란다구.


  우리가 가만히 손을 들어올리자, 이윽고 군인들의 경계가 풀린다. 잠시 소란이 일어난 뒤 이곳 책임자인 사람을 부르러 간다. 대대장님이라나?


  나는 은근슬쩍 눈짓을 하며 민형에게 묻는다.


  "대대라 하면 보통...? 저 장애 때문에 군대랑 인연이 없어서요."


  "저, 저도 공익이라......."


  아니!


  갑자기 열받네.


  이 사람 멀쩡하게 생겨서는 공익이었어? 나처럼 다리 한 쪽 없어서 면제받은 것도 아니고!


  그런 내 눈치를 살피는지 민형은 소심하게 중얼거린다. 그, 원래는 제가 멸치였던지라... 공익 하면서 벌크업을.......


  ...


  이거 병역기피로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고 당당한 미필(본인)이 고민할 때쯤.


  쑥덕대며 기다리던 우리 앞에 진짜 대대장이 나타난다. 사실 내 모습을 봤으면 쏴버렸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인간에 가까운 모습인지라 공격받지 않은 건가.


  아니면 그냥 곁에 민형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대장, 박 모 중령은 각잡힌 자세로 경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군인다운 질문.


  "시민이십니까?"


  나는 민형과 서로 눈치를 살피다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내가 응대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민형은 은근히 나를 신뢰하는 듯한 느낌이고.


  "네. 그런데 그냥 시민?은 아니구요......."


  박 중령에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간단히 전달한다. 지금 웹소설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난 것 같다, 나와 민형은 특별한 힘을 얻었는데 게임과 비슷하다,


  균열이란 걸 닫아야 하는데 내가 가야 할 듯하다, 민형 씨는 여기 남아서 시민들을 돕는 쪽이 나을 듯하다... 등등등.


  군인 아저씨라 헛소리 하지 말란 반응일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니었다. 박 중령에 따르면 지하철에도 '각성자'가 있고, 통신이 차단되지 않은 초기에 소문이 퍼졌다나.


  나는 살짝 놀라서 묻는다.


  "통신 차단이요?"


  "예.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든 종류의 전파 통신에 재밍이 걸리는 상황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이야기. 지금 나타나는 괴수들은 군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러나 통신 차단 때문에 지휘체계가 붕괴되었다, 핵심 부대 쪽이 서울을 어떻게든 탈환하는 동안 다른 부대가 시민을 보호하는 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박 중령에게 묻는다.


  "중요한 이야긴 거 같은데요. 민간인인 저한테 공유해도 되는 내용인가요?"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입니다. 초능력이 생긴 시민분들께 최대한 협조를 얻어달란 명령이 있었습니다."


  중령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상황인 건가.......


  그래도 윗선의 판단이 유연한 모양이다. 이계의 괴수가 나타나고 초능력자들이 생긴 상황... 상식적으로 뻣뻣한 고위공직자나 정치인이면 부정부터 할 텐데.


  나같아도 내 임기 중에 이딴 일이 일어나면 믿지 못할 거다. 이게 다 무슨 개소리냐, 적대국의 음모냐, 혹시 꿈을 꾸는 거냐 하겠지.


  아무튼 박 중령도 상식을 반쯤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나는 원래 내 신분증을 제시했고, 원룸에서 수습해온 사망자들의 신분증도 건넸다. 각성 후 있었던 일에 대한 설명도 했는데 모두 믿는 눈치였다. 민형의 교차검증이 있기도 했고.


  대충 상황파악을 마무리한 내가 박 중령에게 말했다.


  "대대장님?"


  "예."


  "그, 제가 치료 능력이랑 식량을 만드는 능력이 있거든요. 식량 쪽은 3시간 후면 사라지긴 하는데......."


  이후 치유 능력과 그 한계(24시간 제한+부활 불가), '물빵' 주문의 효과와 한계도 설명했다. 박 중령은 참모진과 의견을 나누더니 내 도움을 받아들였다.


  지하철 셸터는 겁에 질린 시민들로 가득했다. 우는 사람,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 다친 채 죽어가는 사람과 일부러 괜찮은 척 웃는 사람.


  정말로... 재난 영화 속에서나 보던 아포칼립스의 풍경이었다.


  아무리 내 신경줄이 굵어도 이런 환경에서까지 RP를 유지하진 못하겠다. 나는 배가 아파오는 걸 느끼며 한 명씩 치료를 시작했다.


  24시간 제한만 지킨다면, 47레벨 사제의 치유는 그야말로 기적이다. 일반인을 치료하는 거니까 그리 많은 자원이 소모되지도 않는다.


  부러진 뼈도, 잘려나간 사지도, 깊게 패인 상처도 가볍게 치료된다. 아주 간단한 주문과 손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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