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스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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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런 애러노프스키의 <레퀴엠>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브스턴스>를 보는 순간 그 영화를 떠올릴 테다.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초기작이 늘 그렇듯 경쾌한 전자음이 함께하며, 현란한 컷 편집과 함께 작중 인물이 매혹되는 꿈을 보여주며, 그 꿈에 매혹되어 중독에 이끌리다가 끝내 파멸하는 서사까지. 자신의 성공적인 옛 커리어를 상징하는 보도블럭 위에서 자신을 숭배하는 환상을 보며 죽는 엔딩 씬은 대놓고 <레퀴엠>의 TV 쇼 엔딩을 오마쥬한 듯 보일 정도다. (실제로 <레퀴엠>의 사라와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 사이에는 꽤나 많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 정도였다면 애초에 감상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브스턴스>는 보기 전부터 내가 어느 정도 혹평을 하리라 예상했던 영화였기에-나는 페미니즘의 '페' 자와 여성 성상품화 관련 이야기만 들으면 바로 넌더리를 내는 사람이다-더욱 더 그 이유를 스스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는데,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가 되었으니 이를 확실하게 굳히기 위해 감상을 써보고 있다. 애석하게도 그 이유는 페미니즘과도 직결되는 사유인 것 같지만.
<레퀴엠>과의 유사성에서 좀 더 파고들어보자. 대런 애러노프스키 본인이 마약 중독에 시달린 경력이 있는지는 의문인데, <레퀴엠>은 정말 철저할 정도로 각기 다른 마약 중독자의 삶을 파고들며 그 발단에서부터 파멸까지의 과정을 공익 광고에 가까울 정도로 자극적이고 충격적으로 제시한다. 그 원작 소설과 비교하면 전작인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가 소설에 비해 영화에서 훨씬 인간미 있는 형태로 제시된 것과 달리, <레퀴엠>은 오히려 훨씬 더 냉랭한 어조로 각색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칼 같은 태도 덕분에 <레퀴엠>은 명작으로 남을 날카로운 비극으로 벼려졌지만, 사실 어떤 의미로는 좀 과하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레퀴엠>을 처음 본 날 며칠간 후유증에 시달렸고, 이 비수를 가벼운 마음으로 볼 생각을 품었던 며칠 전의 자신을 탓했다. (공익광고풍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듯, 마약에는 절대 손도 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함께.) 그리고 여기에서 <레퀴엠>과 <서브스턴스>가 갈라지는데, <서브스턴스>는 사실 그런 생각이 들진 않았다.
이유는 꽤나 단순한데, <서브스턴스>가 토로하는 고민과 고뇌는 사실 꽤나 직설적이다. <레퀴엠>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TV 쇼에 출연하고자 다이어트 약물을 먹는 사라조차도 그 욕망은 꽤나 부차적이다. 마약에 이끌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약이라는 거대한 블랙홀로 휘어진 공간에서 서서히 삶의 궤도가 틀어지며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형태에 가깝고, 이들은 마약이 없었다면 그냥 그럭저럭 삶을 잘 살아갔을 테다. 허나 <서브스턴스>에서 블랙홀은 결코 이 약물 '서브스턴스'가 아니다. 블랙홀은 엘리자베스의 안에 있다. 실존주의와 후기자본주의 사이에 걸쳐 있는 단순한 욕망, 늙고 싶지도 않고 젊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늙지 않고 평생 살고 싶다는 욕망과 젊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이 이야기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의 고전적인 동화를 따라가다가도, 그런 동화에서는 결코 표출하지 않을 불안을 강박적으로 토로한다. "나는 내가 싫어졌어" 하고 중얼거리는 늙은 엘리자베스의 고백에는 <레퀴엠>의 엔딩에 버금가는 충격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서브스턴스>의 초반을 보며 엘리자베스의 이 고백이 어디까지나 앞당가졌을 뿐, 딱히 약물에 의해 촉진된 것은 아니리라 예상할 수 있다. (좋게 늙어가는 이야기란 정말 가능할까? 쿳시의 <슬로우맨>, 로스의 <에브리맨>, 박범신의 <은교>를 읽자니 그 성공 가능성이 의심스럽다.)
덕분에 <서브스턴스>는 늙은 엘리자베스/젊은 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이 평면적으로 제시되면서도, 동시에 이 주인공의 토로에 있어서 진심이다. 본인이 실제로 어떤 생각을 했을지야 그 사람에게 달려 있지만, 나는 최소한 감독과 배우 둘 중 한 명 이상은 이 토로에 있어서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늙고 싶지 않고, 영영 젊은 상태로 남에게 보여지고 싶다. 이런 시각 자체가 싫다는 게 아니다. 그건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이 사람들은 젊을 때의 관심을 진심으로 원한다! 굳이 <레퀴엠>과의 유비를 이어가자면, 여기서 마약은 저 바깥에 있다. 서브스턴스는, 아마 이를 주입하는 주사기 정도에 가깝지 않을까. 혹은 그것조차 아닐 테다. 번뇌는 바로 그 본인 안에 있을 터이니, 나무아미타불. 그러나 여기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레퀴엠>은 개인이 어떻게 부서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서브스턴스>도 그런 영화인가? 나는 이 질문에 부정적이다. 반면, <서브스턴스>는 그 반대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러나 서사의 방식은 아니다.
대신 <서브스턴스>가 대표하는 장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바디 호러. <서브스턴스>가 참 보기 힘들 정도로 그로테스크하게 잔인한 장면이 많은 영화라고 들은 사람이라면 영화의 전반부를 보며 안도했을 텐데, 처음 서브스턴스를 주사하고 갈라진 껍데기에서 기어 나온 뒤로 그런 보기 힘든 잔인한 씬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좀 더 후하게 쳐주자면, 척수액을 뽑아내고자 주사기를 같은 상처에 꽂아넣는 장면 정도) 그러나 존재감을 감춘 듯했던 고어 씬은 엘리자베스와 수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심화되며 쏟아져 나온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것 때문일까? 다시 생각해보자. 본격적으로 잔인한 씬이 쏟아지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더 이상 젊은 수의 모습을 즐겁게조차 바라볼 수 없게 된 엘리자베스의 고통스러운 하루와, 씁쓸한 토로, "나는 내가 싫어졌어"가 나온다. 늙은 여성으로서 살아가느니 차라리 젊은 여성으로서의 하루를 위해 자신을 더 소모하고 싶은 마음. 당연하게도 그녀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늙기 전까진 교체를 망설이거나 미루지도 않는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조차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이 고백은 너무나 진솔하고 보편적이라, 이 시점에서 관객은 잠시 그 토로의 무게에 짓눌린다.
(외삽: 아마도 내 이야기에 한정된 고백. 나는 글쓰기에 있어서 엘리자베스의 고백에 공감했고, 지금도 그것을 느끼고 있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은 걸 알아갈수록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괴상한 딜레마를 느끼고 있다. 더 나은 글을 쓰고자 무언가를 접할수록 나는 글에서, 독자에게서 한 발짝 멀어지고, 내가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내 자신의 성숙/노화가 이를 천천히 진행시킨다. 나는 조금 더 노력하지만, 아마도 내가 덜 노력하며 썼던 예전의 글이 지금의 내가 노력해서 교정하는 글보다는 더 재밌었을 것이고, 어쩌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내가 노력하지 않고 쓰는 글이 노력하는 글보다 좀 더. 츄, 하고 키스를 날리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포스터에서 보며 그 추함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던 걸 떠올리며 그걸 더 느끼고 있다. 아마도 남들도 비슷한 감상을 가질 테다. 당연한 일이지만, 늙어간다는 걸 좋게 바라보려면 놀라운(!) 긍정성이 필요하고, 나는 그런 걸 원하진 않는다. 쿳시가 <추락>에서 언급하듯, 나이 든 남자가 젊은 여자를 탐하지 않는 법을 서서히 익히도록 사회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던가.)
그러나 그 무게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곧 영화는 훨씬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며 슬슬 관객의 눈을 다른 의미로 사로잡는 스펙터클을 제시한다. 폭로에 대한 수의 불안감, 이 젊음이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으리라는 서사적 긴장감, 폭삭 늙어버린 엘리자베스의 끔찍한 육체, 그리고 수가 엘리자베스를 곤죽으로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고어한 씬의 시작. 여기서 이 다양한 스펙터클은 성공적으로 관객의 눈을 가린다.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불안감 대신 '작중인물의 처지'에 대한 불안감, 끊이질 않고 이어지는 끔찍하게 잔혹한 스플래터가 슬슬 멈췄으면 하는 불편함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이 불안한 서사의 끝을 오히려 매우 비현실적이고 화려하게 장식하며 불안을 해소시키는 몬스트라 엘리자 수의 피범벅 쇼. 불안감을 정화시키는 이 씬은 모든 갈등을 어처구니 없는 촌극으로 만들 각오와 함께 동작하며, 끝나지도 않고 이어지며 발레리나처럼 빙글빙글 돌며 주변에 피를 흩뿌리다가 괴물이라고 매도받으며 얻어맞아 몸이 부서지고 기어가는 모습까지 보고 나면 더 이상 그런 불안은 존재했는지조차 의문이 든다.
여기에 이 영화의 의미가 있다. <레퀴엠>과는 달리, <서브스턴스>는 문제를, 나쁘게 말하면 은닉하고, 좋게 말하면 정화한다. <서브스턴스>는 언젠가 끝이 올 수밖에 없는 젊음에 집착하는 욕망을 다스리는 시도에 가깝다. 늙어가는 자신조차 사랑해줄 남자를 만나거나, 새로운 자신의 처지에 납득하며 집에서 요리를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는 불 같은 욕망을 끌어올려서 그 욕망으로 가득 찬 종기를 단칼에 베어내, 피와 고름이 섞인 역겨운 액체가 온 사방에 퍼지며 자신의 가짜 젊음에 홀려 주변에 온 사람들을 흠뻑 적시는. 그래서 <레퀴엠>만큼 모든 사람에게 명작으로 여겨지지는 않겠지만, 이 욕망과 주제에 사로잡힌 사람들만큼은 확실하게 사로잡는 영화. 물론 신나는 전자음악과 함께 하며 마지막까지 유쾌하게. 공익광고와 광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나는 양쪽 다 좋아한다. 그래서 <서브스턴스>가 좋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나보다 더 이 영화를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누군가를 동정한다. 그리고 사실, 남한테 말하는 것만큼 이 영화를 좋아하진 않을 사람도 있을 테다. 늙지 않은 사람은 늙음을 모른다. 아마 나 또한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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