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이런저런 순서와 등급을 매기며 위와 아래, 전과 후를 가르는 일에 익숙해집니다. 

마감, 중요도, 신뢰, 애정, 관계, 흥미, 그리고 가장 중요한 돈. 

제일 중요하니까 세 번 더 쓰도록 하죠 돈돈돈.

물론 순번을 매기는 것은 딱히 타고났다기 보단 자연스럽게 세상살이 하면서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는 법을 터득한 어른들 나름의 지혜 덕분이겠지요. 그리고 그 기준을 세우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을테고요. 

본작은 아직 기준과 순번을 매기는 것에 서투른 세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세 사람이 순번을 매기는 것에 서투른 것은 놀이공원에서 쿄우가 '왜 먼 곳부터 가느냐'라는 볼멘 소리에 에리가 '순서는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후유키가 중재하여 에리의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 암시합니다. 

후유키에게 첫번째는 에리(의 옆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1화부터 사랑을 후순번으로 미루는 것도 아니고 아예 포기합니다.

물론 뒷부분에서 크싸레 기질을 보여주며 에리의 1순위를 후유키(친구-우정)에서 후유키(애인-사랑)으로 바꾸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굉장히 양가적이고 복잡한 부분인데. 

후유키는 에리에게 고백을 한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습니다. 

대신 에리의 첫번째가 언제까지고 후유키(우정)이라는 것을 서로 1권 말미에서 확약하는 형태로 공고히 하는 동시에 키사키를 이용해 에리, 자신이 사랑과 우정의 순번이 흔들릴 수 있다는 불안감을 자극합니다. 이러한 불안을 말미암아 에리는 한 가지 선택지와 마주할 겁니다.

쿄우와 사귀면서 후유키의 N번째(우정, 친구)가 되느냐

쿄우와 헤어지고 후유키의 첫번째(애인)이 되느냐.

물론 후유키에게 언제나 첫번째는 에리입니다. 하지만 후유키는 에리가 '후유키는 언제나 내가 첫번째야'라는 생각을 자극하게 만든다는 점은 굉장히 관계에 대해 수동적인 한편, 행동하는 적극성을 보인다는 점이 참 골 때리네요. 그냥 고백박으면 되지 않나 싶긴 하지만 그러면 백합이 아니겠죠?

여기까지 분석해본 결과 후유키는 굉장히 지능적인 싸이코패스이며 원하는 것은 무슨 짓을 하든 손에 얻고야마는 마키아벨리즘 광신도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벌써부터 가랑이가 젖어버렸습니다. 두렵군요.

에리에게 첫번째는 언제나 후유키(친구)입니다.

분위기 읽는데 서투른 에리의 곁에 있어주었던 건 언제나 후유키였고, 항상 옆에 있어주는 소중한 존재니까요. 그렇기에 에리는 연애보다 우정이 1순번입니다. 하지만 에리의 내면 묘사로 보았을 때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을듯 싶습니다. 왜냐하면 에리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후유키의 첫번째'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에리 또한 순번, 순위는 주요하지만 에리 자신의 순번보다는 후유키의 순번에 휘둘리는듯한 피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쿄우는 제껴두도록 하죠. 남자한테 관심 없으니까요. 힘빠져서 흐지부지 에리도 제대로 못 썼는데

일단 얘는 취미가 연애보다 위인 걸 보니까 안 됨 ㅇㅇ.

산뜻하고 유려한 작화와 별개로 질척거리는 후유키의 크싸레 심연을 옅볼 수 있는 재밌는 작품이었습니다.

삼각관계가 재밌긴 한데 장기 연재하다가 이래저래 꼬여서 흐지부지 하지 않고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네요.

저는 술이 1순위이기에 여기서 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