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밑바닥의 꼬마 사부 - 1화: 잘못 디딘 걸음
[삑- 삑-]
차가운 돌바닥에 희미하게 울리는 금속 탐지 막대의 소리.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둔탁한 마찰음.
"젠장, 또 함정인가."
카일은 혀를 차며 바닥을 살폈다. 미궁 '심연의 아귀' 47층. 슬슬 고대 문명의 잔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구역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악랄하고 예측 불가능한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서른넷의 베테랑 무투가 카일. '강철 주먹'이라는 별명답게 그의 주먹은 오우거의 두개골도 으스러뜨렸고, 그의 발차기는 미노타우로스를 휘청이게 했다. 십수 년간 파티의 최전선에서 미궁을 돌파해 온 그에게 이 정도 함정은 일상이었다.
"압력판인가… 해제는 까다롭겠는데."
오래된 먼지가 쌓인 바닥에는 정교하게 숨겨진 압력판이 있었다. 주변에는 희미하게 마력의 잔재가 느껴졌다. 단순한 물리 함정이 아니라는 뜻이다. 카일은 조심스럽게 탐지 막대로 주변을 훑었다. 연동된 다른 장치는 없어 보였다.
'독가스? 아니면 마비침? 그것도 아니면…'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일은 압력판 위에 새겨진 미세한 문양을 발견했다. 고대어로 보이는, 휘갈겨 쓴 듯한 문자. 해독은 불가능했지만, 직감이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건 그가 아는 일반적인 함정들과는 뭔가 달랐다.
"…일단 우회… 큭!"
판단은 빨랐지만, 발을 떼려는 순간 발밑의 돌이 예고 없이 무너져 내렸다. 압력판 함정이 아니었다. 그 자체가 위장된 함정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아래로 추락하며 카일은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시야가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했고, 직후 온몸을 꿰뚫는 듯한 섬광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 머리야…"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지독한 두통과 몸의 위화감이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욱신거렸고, 마치 오랫동안 앓아누운 환자처럼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젠장, 어디까지 떨어진 거지? 뼈라도 부러졌나?'
카일은 익숙하게 몸 상태를 점검하려 했다. 하지만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는 얼어붙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작고 가느다란 손이었다. 수십 년간 단련하며 생긴 굳은살과 흉터는 온데간데없고, 보얗고 매끄러운,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뭐지?"
당황하며 다른 쪽 손도 들어 올렸다. 마찬가지였다. 마치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의 것처럼 작고 여린 손. 설마 하는 마음에 더듬더듬 자신의 얼굴과 몸을 만져보았다. 거칠었던 수염 대신 매끈한 턱선이, 울퉁불퉁했던 근육 대신 가녀린 팔다리가 느껴졌다. 목소리를 내려 하자, 쉰 목소리 대신 앳되고 높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패닉에 빠진 카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근처에 얕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비틀거리며 다가가 수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물웅덩이에 비친 것은 틀림없는 어린 소녀였다. 헝클어진 흑단 같은 머리카락, 커다란 눈망울,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동그란 얼굴. 자신이 입고 있던 두꺼운 가죽 갑옷과 전투복은 사라지고, 몸에 겨우 맞는 낡고 해진 천옷만이 걸쳐져 있었다.
"내가… 여자아이가 됐다고? 그것도 이런 꼬맹이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함정의 효과인가? 저주? 아니면 강력한 변이 마법?
'젠장, 그 빌어먹을 함정… 단순한 추락 함정이 아니었어.'
분명 그 함정에는 신체 자체를 변형시키는 강력한 고대 마법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왜 하필 여자아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크윽…!"
갑자기 현기증과 함께 극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떨어진 충격과 갑작스러운 신체 변화로 에너지가 바닥난 모양이었다. 이 작은 몸은 성인 남성일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했다.
카일은, 아니, 이제는 이 작은 소녀의 몸을 한 존재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여긴 여전히 미궁 '심연의 아귀' 안이다. 층수는 알 수 없지만, 떨어진 깊이를 생각하면 최소 50층 이하일 가능성이 높았다. 상층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한 마물들이 도사리는 곳.
'정신 차려라, 카일. 살아남아야 한다.'
그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비록 몸은 어린 소녀가 되었지만,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과 지식, 그리고 '강철 주먹'이라 불렸던 무투가로서의 기술과 감각은 아직 머릿속에 생생했다.
힘은 거의 사라졌다. 단련된 육체도 없다. 하지만 싸우는 방법은 알고 있다. 생존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일단 가장 시급한 것은 안전 확보와 식량, 그리고 물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가 떨어진 곳은 비교적 좁은 통로의 막다른 곳처럼 보였다. 희미하게 이끼 낀 벽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물은 있군."
작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물방울을 받아 마셨다. 차갑고 비릿한 맛이었지만, 갈증을 달래기엔 충분했다.
다음은 식량과 안전한 은신처. 그는 떨어진 충격으로 주변에 흩어진 돌 부스러기 중 날카로운 것을 하나 주워들었다. 예전 같으면 맨손으로도 바위를 부쉈겠지만, 지금은 이 작은 돌멩이가 유일한 무기였다.
'이 몸으로 뭘 할 수 있지?'
카일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힘은 형편없었지만, 의외로 몸이 가볍고 유연했다. 무게 중심이 낮아 안정적이었고, 민첩성은 오히려 성인일 때보다 나은 구석도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이걸 활용해야 한다.'
그는 무투가로서 익혔던 기술들을 떠올렸다. 힘으로 압도하는 기술은 이제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유술, 급소를 노리는 정교한 타격, 지형지물을 활용한 회피와 기습은 이 작은 몸으로도 충분히, 아니, 어쩌면 더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슥-]
그때, 통로 저편에서 무언가 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즉시 몸을 낮추고 바위 뒤에 숨었다. 소리의 주인은 미궁 하층에서 흔히 보이는 '동굴 지네'였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턱과 약한 독을 가지고 있어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예전 같으면 발길질 한 방에 처리했을 마물.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카일은 숨을 죽이고 동굴 지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느릿하게 주변을 경계하며 다가오는 모습. 급소는 머리와 몸통 사이의 마디.
'…기회는 한 번뿐.'
지네가 바위 바로 앞을 지나가는 순간, 카일은 뛰쳐나갔다. 목표는 정확히 머리 아래 첫 번째 마디. 작은 몸의 민첩성을 최대한 살려 파고들며, 손에 쥔 날카로운 돌멩이로 온 힘을 다해 내리찍었다!
[카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네의 움직임이 멎었다. 성공이었다.
"후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카일은 주저앉았다. 고작 지네 한 마리를 잡았을 뿐인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희미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할 수 있다.'
몸은 변했지만, 그는 여전히 카일이었다. 미궁 탐험가이자, 강철 주먹의 무투가.
그는 떨리는 손으로 지네를 들어 올렸다. 겉모습은 흉측했지만, 하층부 탐험가들에게는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던전밥'이 익숙한 그에게는 거부감이 없었다.
"일단… 이걸로 버텨야겠군."
저주를 풀 방법은?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미궁을 계속 탐험해야 할까, 아니면 탈출을 목표로 해야 할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카일, 아니, 이제는 이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한 그는, 날카로운 돌멩이로 지네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이 빌어먹을 미궁의 끝을 보고야 말리라. 작은 주먹을 굳게 쥐며, 그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비록 그 주먹이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고 약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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