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키보렌의 전설 속 칼바람 대신, 질척이는 인공 안개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싸구려 음악 소리, 그리고 끊임없이 신경을 긁는 데이터 송수신음으로 질식할 듯했다. 변화는 이미 오래전에 이 땅을 휩쓸고 지나갔고, 사람들은 그 변화가 가져온 현란한 불빛 속에서 길을 잃었다. 하늘을 삼킨 마천루 그림자 아래, 거리는 저마다의 욕망과 절망을 안고 숨 가쁘게 흘러갔다. 옛 영웅들의 이름은 이제 빛바랜 주점 간판이나 아이들의 교육용 게임 캐릭터로나 남아있을 뿐, 그들의 투쟁과 고뇌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었다. 별빛이 사라진 하늘 아래, 도시는 스스로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이었다.

네 종족은 여전히 같은 땅 위에 발을 딛고 있었다. 다만 그 의미는 퇴색되어 껍데기만 남았을 뿐이었다. 인간들은 정보의 바다에 잠겨 허우적거렸다. 눈과 귀를 자극하는 가상의 천국 속에서 그들은 모든 것을 가졌다고 믿었지만, 정작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유령처럼 부유했다. 끊임없는 갈망은 여전했으나, 어디를 향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나가는 육신 대신 신경망 속에 뿌리를 내렸다. 심장은 차가운 데이터 저장소로 대체되었고, 하나됨의 의식은 주기적인 시스템 동기화 명령어로 바뀌었다. 물 대신 정보의 흐름을 지배했고, 독 대신 치명적인 코드를 퍼뜨렸다. 불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는 서버실의 온도 조절 장치 고장이나 예기치 못한 시스템 다운에 대한 불안감으로 형태를 달리했을 뿐, 여전히 그들을 옭아매었다. 레콘은 강철보다 더 단단한 합금 날개로 하늘 대신 지상의 왕국을 세웠다. 마천루 꼭대기에 앉아 그들이 좇는 별은 이제 더 이상 머나먼 하늘의 빛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주가 지수와 기업 평가액이었다. 자신의 기준은 계약서의 조항과 수익률로 치환되었고, 물을 피하는 오랜 습성은 도시의 배수 시스템 설계나 침수 보험 가입 문제 따위로 전락했다. 하늘을 동경하던 종족은 가장 깊숙이 땅의 논리에 속박되었다. 그리고 도깨비. 여전히 밤의 그늘 어딘가에 존재했다. 다만 그 그늘은 이제 광케이블이 엮어낸 데이터의 그림자였고, 그들이 속삭이는 이야기는 암호화된 패킷의 형태로 네트워크를 떠돌았다. 도깨비불은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로 바뀌었고, 수수께끼는 난해한 보안 코드 해독 문제로 탈바꿈했다. 유쾌한 장난은 때로 심각한 시스템 마비를 불러왔고, 오래된 지혜는 쓸모없는 잡동사니 취급을 받았다. 변화의 물결 가장 앞에서 춤추던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그 거대한 파도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어지러움을 느꼈다. 얼굴에는 웃음기 대신 냉소가 서렸다.

세상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지만, 그 빛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내일이면 더 강력한 기계 육체, 더 빠른 정보 처리 속도, 더 짜릿한 가상 경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희망만이 사람들을 움직였다. 그 희망 아래, 모두가 발밑에서 진동하는 불길한 징조를 애써 무시했다. 대륙 어딘가에는, 오래전 그 어떤 분노한 신의 권능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웅크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불꽃으로 모든 기록과 기억, 존재 자체를 먼지로 되돌릴 수 있는 힘. 모두가 그 그림자를 느꼈지만, 그 누구도 감히 그 실체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끔찍한 비밀을 공유한 공범들처럼,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아슬아슬한 오늘을 버텨낼 뿐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눈물이란, 처리 속도만 잡아먹는 불필요한 시스템 오류 같은 것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