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장: 핏빛 하늘 아래

눈을 떴을 때, 서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익숙한 도시의 풍경이 아니었다.

숨 막힐 듯 빽빽하게 들어찬 거대한 나무들. 발목까지 차오르는 축축한 낙엽과 흙냄새.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하늘이었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하늘은 마치 거대한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물든 것처럼 섬뜩했다.

"…엄마?"

옆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음 소리에 서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흙바닥에 쓰러진 어머니, 서지윤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도 작은 자극에 쉽게 무너지던 어머니였다.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은 그녀에게 치명적일 수 있었다.

"엄마, 괜찮아요? 정신 차려봐요!"

서준은 다급하게 지윤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낯선 환경과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는 그녀의 불안정한 정신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여… 여기는… 어디니, 준아… 무서워…"

지윤은 어린아이처럼 서준의 옷자락을 붙잡고 떨었다. 그녀의 공포는 서준에게 고스란히 전염되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질 수 없었다. 비록 어머니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자신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괜찮아요, 엄마. 내가 옆에 있잖아요.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

서준은 지윤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지만, 일단은 이 기괴한 숲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끝없이 이어진 나무들뿐, 길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하늘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핏빛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는 마치 피눈물처럼 느껴져 불길함을 더했다.

"비… 비 온다, 준아… 빨리…!"

지윤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빗줄기는 순식간에 폭우로 변해 두 사람의 옷을 속수무책으로 적셨다. 차가운 빗물은 살갗을 파고들어 체온을 빠르게 빼앗아갔다. 이대로 비를 맞고 있다가는 저체온증으로 위험해질 수 있었다.

"저기! 동굴이에요!"

다행히 서준의 눈에 근처 바위틈에 자리한 작은 동굴이 들어왔다. 그는 거의 반쯤 정신을 놓은 지윤을 끌다시피 하여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동굴 내부는 생각보다 깊었지만,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은 간신히 비를 피할 수 있었다. 눅눅하고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지만,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벽에 기댄 지윤은 덜덜 떨고 있었다. 젖은 옷은 이미 체온을 빼앗는 흉기가 되어 있었다. 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엄마… 옷… 옷을 벗어야 해요. 이러다간…"

서준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지윤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들의 말뜻을 이해했지만, 그 행위가 불러올 어색함과 불편함, 그리고 깊은 곳에 숨겨둔 감정의 동요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에게 아들은 사랑하는 존재인 동시에, 과거의 트라우마와 얽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존이 우선이었다. 차가운 현실은 모자간의 복잡한 감정 따위를 고려해주지 않았다. 서준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젖은 윗옷을 벗었다. 그리고 시선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제 옷이라도 덮고 계세요. 조금이라도 마른 옷이 나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의 마른 옷이라곤 없었다. 지윤 역시 흠뻑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둘 다 위험했다. 극한의 상황은 결국 금기의 영역처럼 여겨지던 선택지를 강요했다.

"…안 돼요. 엄마 옷도 다 젖었어요. 이… 이렇게는…"

서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연민, 그리고 이 어색하고 비참한 상황에 대한 절망감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침묵 속에서 지윤은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젖은 겉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체념과 공포,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옷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맨살에 와 닿았고, 수치심과 생존 본능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결국 두 사람은 젖은 옷을 거의 벗어 던지고, 동굴의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서로에게 밀착했다. 어색하다 못해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서로의 떨림과 거친 숨소리만이 좁은 동굴 안을 채웠다.

차가운 살갗이 맞닿는 순간, 지윤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아들의 체온은 분명 따뜻했지만, 그 온기 속에는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무게가 함께 실려 있었다. 아들을 향한 모성애와 뿌리 깊은 두려움이 뒤엉켜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여리고 떨리는 몸을 감싸 안으며, 그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원인 중 일부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이 기괴하고 절박한 상황에 대한 원망이 그의 내면을 할퀴었다.

핏빛 하늘 아래, 낯선 이세계의 차가운 동굴 속에서,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어머니와 아들은 그렇게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떨고 있었다. 빗소리는 점점 거세졌고, 동굴 밖 어둠 속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수정을 가하는 것 조차 무결성을 훼손하는 듯한 느낌이 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