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관심 있어 보이길래 올리기는 하는데
솔직히 정리하고 보니 별로 그런 내용이 들어 있진 않을듯

질 들뢰즈는 니체의 사상을 이와 같이 간결하게 요약했다. "한번 던져진 창조의 주사위는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따라서 니체가 필연(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우연의 소멸이라기보다는 우연 자체의 조합이다." 이는 우리가 무언가로부터 이어지는 연쇄를 필연적인 과정으로 분석할 수 있더라도, 그 연쇄가 일어나기 전 주사위의 던져짐 자체는 우연에서 촉발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특별히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면, 기억해보라. 분명 우리는 주사위가 던져지는 순간의 모든 물리적 조건을 알고 있기만 하면, 주사위가 던져진 순간 이미 그 눈이 정해져 있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이는 합리성과 결정론의 전제로, 모든 물리적 전제를 알고 있는 존재, 소위 '라플라스의 괴물'이 실제로 모든 물리적 연쇄를 확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듯 불확정성 정리는 그 물리적 연쇄의 추적이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끝난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이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다 미리 정해져 있지는 않다는 숨통을 트여주었다, 라고들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그보다 100년 전, 비슷한 발견은 사람들에게 숙명론이라는 굴레를 씌워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언 해킹의 <우연을 길들이다>는 통계와 우연이 지금처럼 만연하며 사람들에게 수용되기 전, 어떻게 이것이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필연적인 수준을 떠나 실제로 존재하는 진리로서 받아들여졌는지를 추적하는 책이다. 푸코의 계보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쿤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과학사를 탐구하는 이언은 합리적 사고관과 근대 국가의 행정, 그리고 "쇄도하는 활자화된 숫자"의 영향 속에서 사회적 변화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를 따라가고자 한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이 이야기는 넓게 보아 두 가지의 문제를 다룬다. 어떻게 우리는 무작위적인 것처럼 보이는 수치로부터 분명한 법칙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법칙이 옳다는 것을-늘 '오차 범위' 내에서 이리저리 튀곤 하는 상황 속에서-보장할 수 있을까? 이 두 문제는 예전에는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고 싶다면 그 지식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원리로 구성되어, 매번 달라지지 않는 정해진 결과를 유도할 수 있어야 했으니까. 무언가 수치가 튀고 있다면 그건 잘못된 측정을 한 것이지, 이 튀고 있는 수치를 '설명'하는 이론은 무지몽매한 미신인 "우연"에 기대는 멍청한 행위일 뿐이다.
시작은 꽤나 단순했다. 근대 국가에서 세금과 징병을 위한 조사를 위해 수많은 대규모 측정이 시작되었고, 많은 아마추어 측정가들이 비공식적인 측정 수치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요한 베르누이가 자신의 여행기에서 자신이 본 그림의 '크기'들을 측정해 공유한 것처럼-불필요하고 하찮아 보였지만, 어쨌든 근대 사회는 예전에 비해 미친듯이 수치가 활자로 쏟아지는 시기였다. 이언은 이를 쇄도하는 활자화된 수치라고 일컫는데, 이 수치는 법칙을 따로 적용하지 않더라도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수치였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는 프로이센 인구 통계를 활용해 현재 인구에 비해 얼마나 인구가 성장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지, 얼마나 징병을 기대할 수 있는지 등의 분석 결과를 프리드리히 대제에게 선보이며 통계의 중요성을 알리고 선구적인 통계 수집 기관을 창설했다. 라이프니츠의 공헌은 통계 자료를 '어떻게 분석해야 하느냐'처럼 고차원적인 접근보다는, 보다 믿을 만한 통계를 수집하는 방식에 더 집중되었다. 이것은 학문은 학문이지만, 국가의 필요를 위한 행정적 학문에 더 가까웠다. (특히, 사회는 개인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독일의 전일주의적인 관점에서는 더더욱 그러한데, 통계는 사람의 신장처럼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측정 결과에 가깝지, 이 안에 무엇이 있는 흐릿한 성운 따위는 아니다)
반면 개인주의적인 서유럽에서 통계는 보다 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전후 올바른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요구는 "도덕과학sciences morales", 곧 '가장 합리적인 사회의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을 촉발했다. 거기에는 '오심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배심원의 수 및 찬반 비율의 기준은 어때야 하는가' 같은 주제도 포함되었다. 12명의 배심원이 있을 때, 7:5로 찬성이 결정되었을 때 유죄를 선고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라플라스는 12:0 만장일치 찬성보다 7:5 찬성이 오심률이 훨씬 높다는 것을 논증했고, 오스트로그라드스키는 12:0 투표 결과가 212:200의 투표 결과와 다를 것이 없다고 논증하였으며, 푸아송은 12:0과 7:5 사이의 오심 확률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분석하며 이 논쟁을 마무리지었다. 이 논쟁을 위해서는, 단순히 서로 다른 판결에 대한 통계 자료 이상으로, 각 배심원의 '신뢰도'라는 무언가 추상적인 존재를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이 시기에 이미 도덕과학은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다시 국가를 위한 행정으로서의 통계를 복권시켰고, 통계의 확률 및 신뢰도에 대한 논쟁은 다른 영역에서 이어졌다.)
본격적으로 통계와 우연을 주목받게 한 것은 자살 문제였다. 현대에도 자살이 큰 문제로 취급되기는 하지만, 기독교가 훨씬 우세했던 시기의 유럽에서 자살은 그 자체로 흉악범죄였으며, 이 흉악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의 수가 많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가 더 자살자가 많다고 탓하며 그 원인을 분석하고자 했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영국의 악천후(흥미롭게도, 실제로는 영국의 자살자가 더 적다)나 우리에겐 너무나 낯선 수음(!) 같은 원인을 지적했다. 애석하게도 통계는 자살자가 평균적으로 매년 크게 다르지 않게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분명하게 유지되고 있는 통계적 비율은, 아직 원인을 모르는 무언가가 있어 어쨌든 우리 중 누군가는 자살을 할 것이라는 것을,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각 개인은 통계에서 중요하진 않았다. 어쨌든 전체를 보았을 때는 이 수가 유지될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 '평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인식과 함께 일종의 숙명론이 감돌았다. 사회는 개선될 수 없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저 사회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마련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1930년대에는 확률이 자유의지의 존재 여지를 제공해 주었지만, 1830년대에 확률은 자유의지를 완전하게 배제해버렸다."
이러한 역설적 현상은 통계학이 단순한 수치 분석 도구를 넘어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강력한 담론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통계적 '정상성'의 개념은 단순히 수학적 평균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과 통제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 이 분석은 푸코의 생명정치 이론과 맞닿아 있는데, 국가는 자국민의 생명을 자원으로 다루며 그 수를 헤아리고 더 융성하도록 잘 관리해야만 했다. 오늘날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한 예측 분석이 개인의 행동을 분류하고 통제하는 현상처럼 생활 환경은 개선되어야만 했고, 사람들은 더 좋은 삶을 살아야 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통계학이 발전할수록 개인의 특수성은 점점 더 '오차' 또는 '일탈'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평균의 존재를 인식시킨 케틀레에게 이 과를 돌려도 될지도 모른다. 케틀레는 합리적이고 기계론적인 사고방식 내에서 평균의 존재성을 논증했는데, 다음과 같다. (여기서의 분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종 모양의 가우스 정규분포이고, 이 존재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했다.)
1. 사람의 신장을 여러 번 측정한다고 하면 매번 수치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리 크지 않은 오차로 결국 어떤 분명한 측정값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2. 먼 거리의 별을 관측할 때도 엄밀히 잘 측정하기만 하면 키를 잴 때보다 훨씬 널뛰기하는 자료를 갖고도, 분명한 측정값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 방법을 여러 관측값들에 그대로 적용해, 신장을 측정했을 때와 비슷한 분포를 띄는지 아닌지를 통해 이 관측값이 하나의 집단에 대한 것인지, 여러 집단에 대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4. 만일 이렇게 하나의 집단에 대한 측정값을 알 수 있다면, 그 측정값, 곧 평균은 신장을 측정할 때 사람이 존재하듯, 멀리 떨어진 별이 존재하듯, 실제로 '존재'하는 집단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케틀레의 논증에 설득되었고, 자살률은 각 국가에 자리잡은 존재가 되었다. 이 자살률을 설명할 원인이 필요했다. 자살은 범죄였고, 동시에 무언가 신체의 영향을 받은 질병이었다. 자살의 두 측면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통계를 촉진했다. 범죄 측면에서, 자살자는 부랑자, 창녀 같은 '비참한 사람들Les Miserables'이었으며 질병 측면에서 자살자는 신체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어떤 식으로든 일탈한 사람이었다. 평균적인 사람에서 멀어진 사람이었으며, 신체 기관 중 일부가 비정상적으로 변형된 사람이었다. 곧, 평균과 정상이 연결되었다. 정상적인 것이라는 미덕이 등장했고, 사람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문제가 있는 기관을 정상 상태로 되돌려야 하듯 일탈자 역시 정상 상태로 되돌릴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정상, 중산층, 그 밖의 온갖 계급적인 존재로서 인식했으며, 여기에서 또 사람들의 생각이 둘로 나뉘었다. 그런 평균적인 정상을 올바른 것으로 삼는 사람(뒤르켐)와, 평균보다 더 나은 사람, 혹은 평균이 점차 나아지는 집단을 꿈꾸는 사람(골턴). 뒤르켐의 <자살론>은 전자를 다루며, 후자는 우리가 이제는 백안시하는 우생학으로 나아간다.
통계적 사고의 발전이 가져온 가장 논쟁적인 결과는 우생학의 등장이었다. 우생학의 발생 및 사람들의 열정을 이해하려면 이 우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종합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집단의 '평균인'을 상정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 평균인 사이의 차이를 통해 각 집단의 뚜렷한 차이를 계량할 수 있게 해주었고, 정확한 원인은 모르더라도 서로 분명하게 연관되는 상관관계의 발견 및 일탈의 원인이 되는 기관을 찾는 의학의 방향성은 골상학처럼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요인이 사람의 지능과 연결된다는 믿음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뛰어난 사람이 후손대에서 다시 평균으로 회귀하는 현상을 통해 어떻게 하면 집단을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차원적인 구상을 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유전의 근본 원리는 '알 수 없지만' 큰수의 법칙에 따른 전체적인 결과는 알 수 있다는, 합리에 우선하는 우연이라는 사회 현실 속에서 더더욱. 사람들은 주사위를 여럿 던질 때 그 결과들을 보며 얻은 상대적 빈도 이상으로, 주사위 자체에 특정 눈에 대한 어떤 내재적인 확률, 퍼스의 말을 빌리자면 "지향성"이 있다고 보았다. 우연은 이제 더 이상 미신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연은 확률의 이름으로 길들여지고 있었다.
<우연을 길들이다>의 마지막은 이러한 시대 정신을 표상하는 인물, 퍼스로 끝난다. 세상에 확실한 인과는 없이 모든 것이 우연적으로 결정된다는 퍼스의 발상은 그 자체로는 전부 영향을 받은 선대가 있는 것이었지만, 이것을 진심으로 믿고 논증하는 것은 퍼스가 유일했다. '다음 주사위 눈으로 1이 나올 확률은 1/6'이라는 명제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다음 주사위 눈은 1이 나올 것이다'라는 명제가 사실로 밝혀지거나 기각될 확률에 대한 것이다. 확률은 단순히 내재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과정에 대한 최초 중개자 역할을 했으며, 명제 A에 대한 확률이 아니라, 명제 A가 맞다는 것을 어느 수준 이상으로 보장하기 위한 믿음이 필요했다. 이것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사실은 세상에 없다. 이 선언이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우연성조차 올바른 학문의 일환으로서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통계적으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편차를 수용하고 이 편차를 포함해 올바른 지식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확률적으로, 우리는 바로 직후의 사건이 10%의 확률로 결과를 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담배를 피면 폐암에 걸린다는 게 그저 어떤 '경향성'을 띤 '확률'일 뿐이라는 게 공허한 말만은 아니다)
우연은 서서히, 처음에는 배제되었다가, 조금씩 변형되며, 이제는 온전히 우리 안에 갇힌 짐승이 되었다. '무작위로 뽑는다'는 말을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애초에 이것이 무언가 유의미한 전제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우연으로 구성되는 인공지능을 보고 있지 않은가? 확률의 존재성은 점차 이론적인 영역에서 현실적인 영역까지 나아가고 있으며, 우생학의 시대의 '평균인'은 인공지능 시대에 평균적인 지능의 사람의 언어 구사 양상으로 재등장했다. 어쩌면 미래의 <우연을 길들이다>는 퍼스가 '필연이 우연이 된' 시대정신을 대표하듯, 이 시대가 '우연이 필연이 되는' 시대정신을 띠고 있었다고 분석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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