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의 어느 날, 내가 20대 중반이었을 때 일이다.
내게는 3살 터울인 남동생이 있는데 이 녀석 특유의 사교성과 활달함에 외국인 친구가 몇몇 있었다. 당시 동생은 어학당에 다니는 여러 국적의 친구를 만났었고, 몇 년 전에 일본의 여고생과 펜팔을 나눈 적이 있었다.
한동안은 그 친구와 편지만 나누는가 싶더니 급기야 국제 통화로 이성의 감정이 싹트려는 조짐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본 여고생이 한국에 놀러 오겠다고 한다. 그것도 홀몸으로.
물론, 숙소는 따로 있다고 했다. 마침 한국에서 사는 친구가 있어 겸사겸사 놀러 온 모양인데 모르긴 몰라도 내 동생 얼굴을 보려는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동생 말로 그 일본 여학생은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앳된 아이라고 한다.
지난번 괌에서는 일본인 형들과 함께 놀다 친해진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지속적인 우정을 쌓았는데 그때도 일본인 형들이 한국에 놀러 왔을 때 여행 가이드를 자처하더니 이번에도 그 여학생을 봐줄 생각인가 보다.
그리고 며칠 뒤 일본인 여학생이 7일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말로는 친구 보러 왔다지만, 7일 중 5일을 동생과 함께 보냈으니 이 정도면 한국에 온 목적이 동생 때문이라는 게 확실해 보였다.
동생은 그녀와 함께 서울 곳곳을 둘러보며 그녀의 눈과 발이 되어줬다.
그리고 마지막 날, 동생 녀석에게 전화가 왔는데 아 글쎄
"형. 일본에서 온 그 있잖아. 사토코상 오늘 마지막인데 울집에서 자게 해도 될까?"
"헐~ 남자 둘이 사는 집인데 괜찮겠냐?"
"형만 괜찮다고 하면 돼. 마침 사토코상이 우리 사는 모습을 궁금해하기도 해서"
순간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를 위한 걱정은 별로 없었다. 사는 모습이 보고 싶다는데.
다만, 집안 꼴이 엉망이라 최소한 손님 맞을 준비는 해야 않겠나. 이래저래 귀찮아질 일이 잔뜩 생길 것에 망설였던 거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예비 여대생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 안 궁금하면 남자도 아니지 ^^;
당시에는 일본 문화가 완전히 개방하지 않은 상황에서 음성적으로만 보던 일본 만화책 애니메이션 등이 있었다.
거기서 접한 '일본 여고생'의 이미지에 환상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테니.
그나저나 그 여자도 보통은 아닌 것 같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잘 알지도 못하는 타국의 남정네 집을 방문하겠다니.
홀몸으로 여행 온 것도 그렇고 펜팔 하던 남자네 집에서 흔쾌히 묵겠다는 것도 그렇고.
당돌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호기심 많은 처자일 뿐인가?
어쨌든 서로에게 추억거리는 되겠다 싶어 그녀를 우리 집에 들이기로 하였다.
몇 시간 뒤 현관문이 열리더니 동생과 일본 여고생이 신발을 벗고 들어온다.
일본어도 잘 못하는데 첫 마디를 뭐라고 해야 할 지. 약간의 긴장감이 흘렀고 나는 그저 삐쭉삐쭉 서 있기만 했다.
동생은 '우리 형이야'라며 소개하는데 아니 이 여자가 갑자기 허리를 90도로 굽히더니 한참을 그러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 뵙겠습니다. 사토코라고 합니다"
일본어였지만, 대충 알아들었다. 나는 다짜고짜 그녀의 손을 잡고 내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는 혼자 상상한 거고. 현실은 되지도 않는 일본어로 어버버버 하며 인사를 건넸다.
동생이 옷 갈아입으러 방에 들어간 사이 나와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의 1분이 내 인생에서 가장 긴 1분이었다. 기본적인 대화 몇 마디는 나눈 듯했으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없다. 빨리 동생이 나와 이 요상한 분위기에서 나를 구해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
그나저나 그녀의 첫인상은 뭐랄까?
줄곧 만화나 미연시 따위의 여고생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지금의 그녀는 옷차림도 그리 화려하지 않은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어깨까지 늘어트린 긴 생머리에 검은색 단정한 스커트. 한 가지 확실히 기억났던 건 당시 유행했던 반스타킹이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딱히 대접할 것도 없고 그녀도 숙박을 위해 온 것인 만큼 빨리 그녀를 쉬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옷 갈아입으러 들어간 상태에서 여전히 소식이 없는데. 일단 그녀도 편한 옷을 갈아입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그녀를 내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사뿐히 문을 닫아 준 다음 동생 녀석을 잡아 족치기로 했다.
"니 어쩌려고 데려왔어? 잠은 어디서 재우고?"
"형 방에서"
"뭐? 왜 하필 내 방이야?"
"형 방에 침대 있잖아"
예상은 했지만, 이거 좀 곤란하다. 그렇다면 내 침대에서 그 여자가...아니 난 지금 무슨 생각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화장실 청소했어?"
"아까 니 연락받고 부랴부랴 청소했잖아! 아 짜증."
"변기도 깨끗이 닦았어?"
"아..."+
그녀가 옷 갈아입는 동안 나는 부랴부랴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랑 변기를 박박 문질렀다. 아닌 밤중에 이게 웬 고생?
대충 하고 나오는데 방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얼굴을 빼곰히 내민다.
나도 모르게 위에서 아래로 시선을 훑게 되고. 그녀의 옷차림은 지극히 집에서 입는 옷이었다. 얇은 반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차림. 그녀는 동생과 몇 마디 나누더니 뭔가를 챙겨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뭐라던?"
"샤워 좀 할 수 있겠냐고"
하긴 이렇게 더운 날, 온종일 돌아다녔으니 아무리 남자 둘이 사는 집이라 해도 샤워는 무척 하고 싶었을 거다.
나는 동생과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욕실에서는 쏴아아아아 하는 소리가 나니 이게 좀처럼 적응 안 된다.
볼륨을 낮추자 쏴아아 하는 소리가 더 두드러지게 나니 영 신경이 쓰여 볼륨을 높였다.
몇 분 뒤 욕실 문이 열렸다. 나의 얼굴은 TV를 향해 있었지만, 내 눈은 본능적으로 욕실의 문을 향해 있었다. ㅋㅋ
사뿐히 나오는 그녀. 희고 가냘픈 발목을 따라 올라가는 나의 시선은 그녀의 젖은 머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총총걸음으로 내 방에 들어가 버리는 그녀.
"역시 적응 안 되네"
실은 그녀가 샤워하는 동안 나는 볼일이 급했다. 나는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볼일을 보는데.
그녀가 나온 직후였기 때문에 욕실 안은 온통 수증기로 몽글몽글 피어오른 상태다.
평소에 나지 않는 여성스러운 향기가 내 주변을 가득 애워쌌다. 향이 우리 집 비누가 아니다. 따로 챙겨왔나?
숨 막힐 듯한 수증기에 환기를 시킬까 하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창문을 열지 않고 그냥 나와버렸다.
이 향기가 좀 더 오랫동안 있어주길 바랬던 걸까? 나도 내 속을 모르겠다.
거실에는 어느새 머리를 말린 그녀가 동생과 나란히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다시 거실에 나와 보니
그때는 우리집 역사가 담긴 가족 앨범을 보여주며 키득키득 웃고 있더라.
중간에 어떤 사진을 손으로 가리더니 앨범을 덮어버리는데 아주 그냥 자지러진다. 뭐지? 돌사진이라도 봤나?
나는 온통 신경이 쓰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둘만 아주 신 났다.
이제는 밤이 깊었고 그녀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방으로 홀연히 사라진 그녀. 지금 그녀는 내 침대에 누워있겠지?
아. 그만 생각하자. 거실에 남은 우리 형제는 그렇게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곧 한국을 떠나는 그녀를 위해 나는 특기인 김치 볶음밥을 대접했다.
오이시이~ 오이시이~!를 연발하며 맛있게 먹어주는 일본 여고생. ^^ 이제는 졸업생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한국에서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고 간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녀는 펜팔 친구인 내 동생의 배웅하에 그렇게 떠났다.
집에 혼자 남은 나.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밥 차리느라 눈을 좀 더 붙이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 방 침대에 눕는데.
이불에서 낯선 여자의 향기가 났다.
"맞다..어젯밤 그 여자가 바로 이자리에서"
이때만큼은 내 침대가 내 침대 같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자니 코끝을 스치는 향에 묘한 기분이 든다.
이날은 동생이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받은 날이기도 했다. 펜팔 하면서 든 정도 있겠지만, 한국에 머무는 동안 물심양면 친절히
대해준 동생에게 감동했다고 한다. 공항으로 배웅하러 나간 동생은 그녀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고민 끝에 하는 말이라면서 고개를 숙이더니 양손을 쭉 내밀어 편지를 주었다고 한다.
편지에는 "나랑 사귀어 주지 않을래"라고 적혀 있었다고 했다.
일본 만화에서나 볼 법한 그런 장면이 실제로 벌어진 거다.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쭉 내밀어 '오네가이~' 하면서.
하지만 동생은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국제 연애란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서로 떨어져 살면서 연애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지극히 현실적인 동생은 정중히 거절하고 그녀를 보냈다.
그 후 2년이 흘렀다. 사토코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얼마 전 한국을 다시 찾았다.
영어 교사가 된 사토코는 지금도 동생과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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